서른을 앞둔 어느 날, '룸바'를 배우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의지가 불끈 솟았다. 황군을 꼬드겨 역삼동에 있던 댄스홀을 찾았다. 댄스교사의 설명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나왔어야 했다. 이유인즉 힐을 신을 수 없다는 것. 5센티 정도의 힐을 신고 서있을 수도 없는 내가 춤을 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무슨 얼빵신이 강림하셨는지, 아니면 이사도라신이 내리신 건지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맨발로 춤을 출 수는 없나요?"
황당하셨겠지만 그 예쁜 등을 더 곧추세우는 일로 일단 마음을 가라앉힌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신체적인 장애가 있다고 춤을 배울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맨발은 위험하니까 발레슈즈를 신고 배워보는 건 어떨까요?" 아~ 그러니까 나는 신체장애 판정을 댄스홀에서 받은 셈이었다.  

여튼, 선생님은 내게 더 큰 장애가 있음을 그때는 몰랐으리라. 나는 몸치였다. 
그리하여 황군과 나는 토요일이면 두려움과 설레임을 반반씩 섞어 댄스홀에 갔고, 나올 때는 자괴감과 피로를 얻어 돌아왔다. 처음에는 처음이니까, 좀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럴 수 있으니까, 더 시간이 흘러서는 뭐 선수하려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에는 때려치워!가 됐지만, 지금도 그 시절의 일을 복기하면 유쾌하기만 하다. 그때 춤은 제대로 출 수 없었지만 춤곡(서양 고전 음악에서 춤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은 참 많이 들었었고, 음악을 귀가 아니라 온 몸으로 듣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말이다. 깨달음을 멀고도 가깝다.  

 

 

 

 

 

 

 

  

그리고, 오랜만에 춤과 관련된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 [춤의 유혹]은 라틴댄스에서 왈츠 그리고 궁정댄스에 이르기까지 흔히 사교춤이라 불리는 커플댄스를 소개하는 책이다. 물론 방법론은 아니고, 춤의 역사적 배경이라든지, 그 시절 사람들의 욕망이라든지, 그러니까 춤의 미시사 정도라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이 책의 형식이 교본이었다면 오히려 내게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니, 나는 이 책에 스텝 밟는 과정을 도식화한 발바닥 그림이 실려있지 않음에 감사했다.    

이 책에는 보기만 해도 설레고, 상상하면 더 끔찍하게 황홀한 여러 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신대륙의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의 춤인 산테리아와 캉동블레,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삼바, 살사, 탱고, 집시들의 춤에서 흘러나온 플라멩코 등은 단순한 여흥으로서의 춤을 넘어선다. 이 춤들은 박해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인 언어로서의 힘을 가질 수 없었을 때 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몸부림이 실려있다. 몸으로라도 표현해야만 하는 절박함과, 반복되는 고통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오기들의 총합, 그리고 그 탈출구로서의 춤.
책을 읽는 동안 가슴 어디쯤이 무거웠던 까닭은, 여전히 어디선가 탕탕거리는 그들의 발구름이 존재할 것 같아서였고,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힘을 가진 자들의 영원한 타락이 눈에 밟혀서였다.  

그럼에도, 보란 듯이, 모든 살육의 기억들은 축제로 거듭나있다.
그렇다고 축제가 말 그대로 축제인 시절에 암울한 과거를 들이대며 같이 울어보자, 이 축제들의 의미를 바로 세우자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어쩌면 그것 역시 폭력일 것이다. 살을 부비고, 타인을 끌어안고, 플로어를 빙빙 도는 즐거움과 위안, 그 한없이 가벼운 유희를 뺏을 권리 또한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브라질에서, 쿠바에서,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축제들은 그 기원이 어찌되었건, 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입에 담지 못할 폐해들이 무엇이건, 나같은 소시민에게는 꿈에 그리는 일탈이다. 염치없지만 속세는 그렇다고 그래서 나 또한 그렇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어디 먼 이국땅까지 원정을 갈 수는 없지만, 이 밤, 금요일의 이 밤, 누구 나와 함께 춤이나 추실라우? 쉘 위 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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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17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서툴더라도 열심히 배우시면, 멋진 룸바를 추는 굿바이님이 되실거라고 믿습니다.^^
이사도라신에서 살짝 웃었습니다.ㅎㅎ

굿바이 2010-11-21 23:39   좋아요 0 | URL
이런 위로와 격려는 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룸바는 포기했습니다.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