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목포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명절만큼 막혔다. 효심이 넘치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짜증이 넘쳤고, 짜증은 신록의 푸르름으로도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지만 또 그렇게 엄마와 아빠를, 또 그렇게 목포의 짠내를, 또 그렇게 민어와 돔을 떠올리면서 참고 또 참고, 산 넘고, 강 건너, 못된 딸년은 툴.툴.툴. 흘러가고 있었다. 실로 이렇듯 나를 찾아올 자식이 없음에, 나는 감사했다. 

#. 에피소드 하나  

보현이와 만났다. 고모와 고모부를 향해 활짝 웃는 보현이는 너무 커버려서 안아주기도 버거웠다. 예쁜 곱슬머리는 더 풍성해졌고, 턱은 갸름해졌고, 일곱살이 보현이에게 가져다준 기적은 눈부셨다. 찡긋거리는 콧잔등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해주었는데, 먼 훗날 이 콧잔등을 사랑할 아무개 녀석을 상상하니, 내가 다 울렁거렸다.  

나 : 보현아, 유치원에서 우리 보현이를 특별히 좋아하는 친구가 있니? 

보현 : 네! 

나 : 누군데? 

보현 : 지웅이요. 

나 : 지웅이는 우리 보현이의 어떤 점이 좋대? 

보현 :  음....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어요. 

나 : 아.......... 

 

#. 에피소드 둘 

아빠와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빠는 뭔가 궁금하실 때, 주로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나도 부러 아무 말 없이 애먼 딸기만 축내고 있었다. 

아빠 : 아픈건 좀 어떠냐? 

나 : 이제 멀쩡해요. 

아빠 : 뇌수막염이라고? 그건 아이들 걸리는 병 아니냐? 

나 : 에이~ 그냥 재수없으면...아무나 걸려요. 

아빠 : 스트레스로 머리가 더 아픈건 아니냐? 

나 : 원래 편두통이 심했잖아요. 괜찮아요.  

아빠 : 사업은? 

나 : 음.....뭐, 음......., 그러니까,....딸기 죽이게 맛있네요!

아빠 : 내 생각에 뇌수막염이 아니고, 화병같다. 

나 : 엥? 왜요? 

아빠 : 아빠도 그랬다. 

나 : 뭘요? 

아빠 : 사업 망한 걸로 치면, 너는 아직 멀었다.... 

나 : 아....예......  

 

생의 은밀한 위험도, 은밀한 기쁨도 아직 모르는 내 조카는, 눈부시게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랑스러움에 치근이 시큰거렸고, 내 치통을 눈치 챌 수 없는 조카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마당을 뛰었다.  

절망의 끝에서 고통의 무심함을 몸소 익힌 내 아버지는, 어린 손녀와 반쯤 늙어버린 딸년을 가끔 쳐다보며 마당 한 켠 텃밭에서 상추를 골랐다. 나는 상추를 고르는 늙은 아비의 등을 바라보다 이내 먹먹해진 마음을 붙들지 못해 또 그렇게 가만가만 딸기즙처럼 붉은 울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라일락은 무심하게 치를 떨며, 향을 뿜고, 장미는 꽃 필 날을 잡기 위해 여투어 둔 초록으로 온 몸에 칠갑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그런 오월. 살아갈 날이 제 각기 다른 내 아비와 나와 내 조카는 그렇게 한 마당에서 서로 다른 기쁨과 서글픔과 안쓰러움을 모른 채 하고 있었다. 기겁하게 눈부신 오월의 하루가 또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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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5-1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현이가 어느 면에서는 아빠를 많이 닮았나봐요. 보현이 얘기에 기절. 그 매력적인 곱슬머리를 저도 보고 싶어요. 귀연이와 하연이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졌나봐요.

오늘 공원을 좀 걸었는데, 온몸을 초록으로 칠갑한 것들이 죄다 반짝거려 눈이 부시더라고요. 언니는 5월보다는 4월이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5월과는 또 다른 의미로 눈부신 사람이니까요, 저는 그냥 무조건 언니편이에요.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의 결함 따위는 무시.ㅋ)

굿바이 2010-05-10 21:20   좋아요 0 | URL
이번에 보니까 많이 닮았어. 놀라워. 그리고, 보현이는 귀연이랑 하연이와 다르게 뭐랄까 멜랑꼴리와 고집도 보여. 기특하고 안쓰러웠어....
웃긴이야기 하나 더 하면,
나 : 보현이는 머리가 너무 예뻐. 묶지만 말고 가끔 풀어봐.
보현 : 알고 있어요. 그런데, 너무 예쁘면 텔레비젼에 나가야 해요.
나 :(약간 놀려주려고) 머리 스타일만 예쁘다고 연애인이 되는건 아니고, 얼굴도 예뻐야하는데?
보현 : 그러니까요!
나 : 아......

風流男兒 2010-05-10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조카는 너무나 많은 걸 알고있군요.
그저 놀라울 뿐. 길가에서 문득 풍기는 라일락향이 참 예쁜 요즘이에요.

그래도 날씨가 따뜻해지는 게 참 맘에 드는 요즘이랍니다 쿠쿠쿠

굿바이 2010-05-11 11:34   좋아요 0 | URL
맞아, 너무 많은 걸 알고있더라^^

라일락 향기를 놓치지 않는 진환이가 더 예뻐!!!

멜라니아 2010-05-1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눈부신 오월의 초록을 만나러 저는 이제 가파도로 갑니다

가기 전 읽어 보는 굿바이님과 웬디님의 글이 초록을 만날 때처럼 제 마음에서 생기를 만들어 냅니다. 좋은 사람들을 볼 때 솟아오르는 감정이지요!

보현이가 아주 영리해 뵙니다
이미 굿바이님의 글에 여러번 소개되었던 조카인 것 같구요 ㅎ

아버지와의 대화는 드라마의 대사 같습니다

아버지의 인품이 드러납니다. 좋은 아버지와 좋은 딸 사이.

그런ㄷ, 사업은? 이라는 질문은?
굿바이님 사업가세요?


굿바이 2010-05-11 11:36   좋아요 0 | URL
가파도요? 와아~ 마구 부러운데요!

저희 아버지와의 에피소드만 털어도 수필집 한 권은 나올 것 같아요 ㅋㅋㅋㅋ
아참! 사업도 하고있죠. 잘하는게 없어서 이것저것 다 하게되네요...

동우 2010-05-13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현이와 고모와 할아버지.

보현 : 알고 있어요. 그런데, 너무 예쁘면 텔레비젼에 나가야 해요.
나 :(약간 놀려주려고) 머리 스타일만 예쁘다고 연애인이 되는건 아니고, 얼굴도 예뻐야하는데?
보현 : 그러니까요!
이토록 귀여운 되바라짐. (세살짜리 내 손녀도 요쯤은 되바라지기를)

아빠 : 뇌수막염이라고? 그건 아이들 걸리는 병 아니냐?
나 : 에이~ 그냥 재수없으면...아무나 걸려요.
반쯤 늙어 버린 딸의 무덤덤함. (내 딸년도 이와같이 무덤덤한데)

나 : 뭘요?
아빠 : 사업 망한 걸로 치면, 너는 아직 멀었다.... (내게는 없는 이와같이 속깊은 넌즈시함..)




굿바이 2010-05-13 14: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보현이와 고모와 할아버지로 수필이라도 써야겠어요~

동우님도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