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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작가는 언제나 자신의 체험을 말한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온전히 상상력으로 그려 내는 존경할 만한 작가가 왜 없겠느냐 마는, 적어도 대다수의 작가는 개인적인 체험을 질료 삼아 글을 뽑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 표지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그의 사진을 통해 그를 들여다 보고 싶었다. 어딘지 몽환적인 분위기, 도시적인 외모, 예술가다운 섬세함 그런 느낌들이 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그의 어느 부분에서 흘러 나온 것일까? 독자와 부딪치는 장면마다 부싯돌처럼 섬쩍지근한 불꽃이 튀는 맵찬 글의 맹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는 도시 이해할 수 없는 쑤퉁이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쌀"은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저리고, 맵고, 쓴 그래서 소리를 내어 따라 읽다 보면 입안이 얼얼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주인공인 우룽은 홍수에 모든 것을 잃은 고향 펑양수를 떠나 와장가로 흘러든다. 와장가라는 도시에서 그가 처음 느낀 소회는, 온기없이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공포이며, 생존을 위해서라면 짐승처럼, 단지 살기위해서만 생각해고 행동해야 한다는 절망감이었다.
주인공이 대홍기 쌀집, 도시 문명으로 상질될 수 있는 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온갖 멸시를 당할 때마다, 발가락을 잃고, 눈을 잃을 때마다 점점 아귀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명을 택한다는 것, 근대화의 환상을 갖는다는 것이 무방비한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향한 욕망, 도시에 들어선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과잉된 욕망은 심지어 열다섯 쯔윈의 옷마저 벗겨 버리니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점점 피폐해져 가는 농촌, 사람과 돈으로 넘쳐나는 도시. 그렇지만 도시의 부유함과 현란함은 지독히 냄새나는 것들 위에 세워진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작가는 아바오와 뤼대감의 죽음과 우룽의 문드러지는 육신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책의 제목이자 끊임없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쌀"은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난 모든 것들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룽이 떠나온 고향 펑양수가 곧 쌀이며, 떠나왔지만 그럼에도 평생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 또한 쌀이며, 타락한 육체를 정화하는 것 역시 쌀이며, 몸 속으로 매일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는 것 역시 쌀인 것이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쌀이 은은한 달빛속에서 희미하게 흰빛을 뿜어내고 있었다."(112쪽)면 그 맞은편에는 와장가가 있었고, 우룽과 대홍기 쌀집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쌀"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악취가 풍기고, 악랄하며, 인정사정 보지 않는것들 뿐이다. 즉, "쌀"이 문명 이전의 것이라면, 쌀을 가둔 "쌀집"은 문명의 상징이고, 대홍기 쌀집과 와장가의 사람들은 결국 문명이 낳은 사생아들인 것이다.
쑤퉁은 이 소설에서 인간의 욕망을 살과 뼈를 발라내듯 집요하게 그리고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것이 독자에 따라 흥미로울 수도 있고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인 문체는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훌륭한 장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독서를 하는 동안 나 역시 비릿하고도 선선한 쌀냄새가 그리웠다. 우룽처럼 배가 고픈 적이 없는 나에게도 쌀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쌀"이라는 소설은 부지불식간에 머리카락 빠지 듯 내안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소설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내 영혼에 새겨진 상처들이 흰쌀처럼 가볍고 희어져 어두운 밤하늘에 둥실 떠오르기를 나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