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라우라 레스트레포 지음, 유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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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고통의 양이 증가할수록 정신적.육체적 통증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고통을 경감하는 양태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으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현실, 고통받지 않는 자 없을 터이니 작가가 책 머리에 언급한 것 처럼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자,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고개 돌릴 수 있는 독자도 많지 않을 터이다. 그렇게 소설은 꼼짝할 수 없음을 전제로 시작된다. 

소설은 여주인공 아구스티나의 광기와 욕망을 쫓는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통받는 연인 아길라르의 헌신적인 사랑과 그녀의 광기를 담담하게 받아내는 소피 이모의 증언을 통해 광기로 감염된 아길라르의 가족사와 콜롬비아가 안고 있는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고백한다. 또한, 이미 초과해 버린 욕망을 대변하는 어머니 에우헤니아와 오빠 호아코, 그 욕망을 추격하며 뒤틀려 버린 미다스와 주변 인물들, 왜곡된 현실의 희생양 막내 동생 비치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위험한 욕망, 욕망을 조장하는 집단의 가치관,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 앞에서 좌절한 인간들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욕망, 거짓, 고통, 광기는 이 소설 안에서 동의어가 된다. 

   
  아들은 진실을 까발려 아버지 앞에 들이댔고, 어머니는 그 진실을 거부하며 아들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구한 거죠. 자네 말도 맞네만, 그게 다는 아니네, 소피 이모가 나선다, 왜냐하면 비치는 마지막 진실을 비장의 무기로 숨겨두고 있었는데, 바로 자기 자신의 자유였거든, 모두가 정신을 잃고 거짓말의 늪에 빠진 것을 보자, 비치는 입고 있는 차림 그대로, 그러니까 스웨터에 파자마에 양말에 부츠를 신은 채로 집을 나가 아랫길로 걸어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네.(p.375)  
   

아길라르와 소피 이모의 대화를 통해 아구스티나의 뒤틀린 가족사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막내 아들 비치가 까발린 진실은 아버지와 소피 이모의 은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엄단해야 할 어머니는 도리어 아버지의 외도를 부정한다. 남편의 패륜을 부정함으로써 폭로 이후에 몰아닥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폭로 이전으로 돌려놓아 자신이 포기해야 할 욕망을 지킨다. 또한 아버지의 외도를 이미 알고 있던 오빠 호아코도,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구스티나도 거짓이 지탱해 주는 달콤한 현실, 즉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을 붙든다. 이 추악한 현실에서 막내 동생 비치는 현실을 도피함으로써 자신이 꿈 꾸는 자유를 얻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이 은폐하고 도주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짓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 현실은 한 번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으로 돌아온다.  

욕망은 거짓을,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처녀생식한다. 생식의 속도와 양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막대하다. 이렇게 점점 불어난 개체(거짓)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주체(인간)는 고통에 처한다. 고통은 슬픔과 두려움을 배양하고, 잘 자란 슬픔과 두려움은 분노로 성숙한다. 이렇게 뭉뚱그려진 분노 덩어리가 어느 날 삶 전체를 짓눌러 더 이상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삶의 달콤함을 스스로 거세할 수 없는 인간은 무언가 새롭게 대응 할 의지 조차 갖을 수 없게 되고, 고통 너머의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 숨고 싶어한다. 이 때 인간의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낯익은 고요함이 바로 광기다. 허니 부조리한 현실에 처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죽거나 미치거나. 

마지막으로 이 소설 [광기]에서 작가 라우라 레스트레포의 불편한 글쓰기 방식은 단지 형식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을 보게 하고 불편하게 질문하는 방식, 내키지 않는 질문을 받고 불편해 질 수 밖에 없는 독자, 그것이 라우라 레스트레포 소설 [광기]의 본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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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11-0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제가 1대1 선물용은 쫌 잘골라요 그죠? ㅋㅋㅋㅋㅋ
책 선물한 덕분에 언니 리뷰도 읽고, 좋네요. 흐흣.

굿바이 2009-11-05 14:53   좋아요 0 | URL
그대의 탁월함을 인정하오!!!!!!
고맙고 또 고마워요^^

후니마미 2009-11-05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려운 책인 것 같아요
이 책을 웬디 양이 선물한 것이라는 눈치를 좀 보면서 ㅎㅎ
웬디양(님을 붙이기가어색해서)은 요기서 만나는데
요새 마니마니 바빴어요?

독후감이 안 보여요 ㅎㅎ

눈나라에선 만날 수 있지요?

굿바이 2009-11-05 14:55   좋아요 0 | URL
형식이 독특한 책이고, 인간의 욕망에 대해 작가가 오래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라틴 아메리카 작품에 빠져있답니다. 신비롭고 날카롭고...

2009-11-05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5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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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5 1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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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9 1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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