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못하는 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그래서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으니 대충 넘어가자 싶기도 하지만 손익계산서로 따지자면 손해가 막급하다. 심중에 담아 둔 억울함까지 곁들이면 어디 소송이라도 해야지 싶다. 그래도 나홀로 소송에 이길 자신도 없고, 알아 줄 사람도 없으니 또 그렇게 진하게 한 번 눈흘기고 말 것을 괜시리 혼자 투덜거린다.
어찌어찌 결혼을 앞둔 친구 때문에 또 저찌저찌 그간 연락이 소원했던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매우 피곤한 상황에서 축의금 선이자라 생각하고 밥값이나 던져주고 자리를 떳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뭔 예우랍시고 두 시간이나 그 자리를 지켰는지 모를 일이다. 이럴 때 보면 가끔 나는 미친 것 같다. 이하 생략하고.. 기운 빠진 선배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이제야 저 마음이 올곧이 이해가 되는구나 싶어 입 다물고 그냥 밥이나 먹어주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이명박보다 더 막나가는 후배가 까불어 주신다. 보이는 것이 없나? 아니면 나도 저랬나? 불편하다 못해 울화가 치밀어 뭐라 한 마디 쏘아줄까 싶어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데, 이심전심인지 친한 K선배는 나랑 눈만 맞으면 웃어주신다. 뭐래? 나도 저랬다는 거래? 아니면 냅두라는 거래? 아니면 죽이라는 거래? 찬찬히 보니 냅두라는 싸인이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들어나 주자는 마음으로 나는 집중의 집중, 완전 수험생 모드로 후배의 토크쇼를 경청하였다. 다 듣고 나니, 아~ 이럴 때 나의 명민하고 사랑스런 조카, 귀연이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우리 귀연이가 한 방 날려줬을텐데. 귀연이의 천역덕스러운 너스레를 상상하니 미친년 밥 많이 먹고 배부를 때 처럼 웃음이 나왔다. 캬캬캬캬캬~ 그래, 알겠다. 이야기를 다 듣고 즐거운 상상까지 마친 나는 이제 어쩌나 싶어 K선배를 쳐다보았더니 입만 뻥긋거린다. "차나 마시러 가자"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K선배에게 물었다."왜 말리신대요?" 선배가 말한다. "안말렸으면 네가 훈계라도 하게? 내가 봐서는 너는 상대가 안되겠더라."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나는 상대가 안된다. 우선 나는 그 후배처럼 잘나지 못했으니 내가 뭐라하면 다 열등감이고, 또 후배가 보기에 어느 날 부터 나는 삽질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일 터이니 장외인간으로 몰릴 것이다. 변방에서 북이나 치는 내가 아무리 핏대를 올린 들 한물간 선배의 신파극이라 치부할 것이고, 그러면 돌아올 것은 냉소뿐일 터. 잘했다. 나는 후배 일은 다 잊어버리기로 하고 K선배에게 다시 물었다. "사는 건 좀 어때요?" K선배는 대답 대신 웃었다. 이런! 웃지 말지..... 선배가 웃으니까 내가 할 말이 없잖수. 나도 겁나는 게 뭔지 이제 알아가고 있는데 선배가 웃으니까 진짜 사는 일이 겁나잖수. 뭐래? 이렇게 하는 거 공정하지 않잖수. 예전처럼 큰소리라도 좀 치지.
음.. 여튼 이번 만큼은 선배의 눈빛을 거절하지 않고 후배에게 싫은 소리 안하기를 참 잘했다 싶다. 그래,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자.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난데 새삼 뭘 고쳐서 얼마나 배부르게 살겠다고. 뭐래? 다 선배 때문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