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 박물관 부산 전시회를 다녀와서(1)  

                          -고대 근동관-

                                    

  10월 9일까지 부산 시립 미술관에서 대영 박물관 부산전이 열린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추석 연휴 첫날 오전 아니고는 시간이 날 것 같이 않아서 다녀오기로 했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부산전 100배 즐기기 안내 자료를 대충 훑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영 박물관 역사관을 지나 고대 근동관, 여기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찬란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전시되고 있는 유물 중 꼭 보기를 권하는 ‘유물 베스트 10’에 소개 되었던 ‘푸아비 여왕의 수금’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순장제 풍습에 따라 왕비와 함께 순장되었던 여인 중 한명의 손이 이 ‘수금’의 줄 위에 놓여져 있었다고 하니 죽어서도 여왕을 위해 수금을 타려고 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 곳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 중에 기원전 2,600년경에 유물이라는 우르왕족묘지 매장물들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600여년 전부터 왕족들은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장신구 사용을 즐겼던 모양이다. 홍옥수(붉은색),라피스라즐리(푸른색을 띠고 있는데 홍옥수와 더불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지 않는 보석이란다. 홍옥수는 인도 등지에서 라피스라즐리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수입을 해 와서 장신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금을 재료로 만든 팔찌, 반지, 목걸이, 머리 장식물은 요즘 사람들이 착용해도 될 만큼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왕족들의 장신구를 만들던 장인들의 감각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모양이다.

 

 그리고 바빌론의 마르독 사원에서 출토되었다는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비(기원전 900년~800년경)에 새겨진 설형문자, 이 문자를 보면 루이브라유가 만든 점자와 많이 닮았다. 점의 개수, 위치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점 6개로 이루어진 브라유 점자. 설형문자도 대문자 와이 같은 작대기 몇 개가 방향과 길이, 개수를 달리하며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되던 글자가 언제부터 왜 지금처럼 복잡하고 난해한 모양으로 바뀌었을까? 아마도 어휘가 늘어나면서 단순한 설형문자로 모든 어휘를 다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페르시아 제국의 유물 중에는 장례용 가면이 눈에 띄었다. 왜 유체 위에 가면을 만들어 씌웠을까? 영혼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나? 우리 나라는 사냥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면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는데, 더불어 가면극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데 아무튼 이 곳에 전시된 유물들은 수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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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동요’라는 글감으로 글을 써야 될 일이 생겼다. ‘내가 만난 동요’라는 글감을 보는 순간 불현듯 잊혀지지 않는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제법 오래 전의 일이다. 어느 가을 날, 전라북도 쪽에 있는 백제 유적지들을 답사하러 간 적이 있다. 우리 나라 유적지 답사로 꽤 유명한 단체에서 주관했던 만큼 흡족한 마음으로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답사 리더 인듯한 분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더니 느닷없이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하고 동요 한 곡씩을 부르라고 했다. 이 당시만 해도 관광차를 타면 의례이 가요 한 곡 쯤은 부르게 하는 게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는데 가요도 아니고,  동요라니? 이 단체에서 주관하는 답사 여행에 처음 참가했던 나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답사에 참여 하신 분들 중에도 손자손녀를 두어도 몇은 두었을 것 같은 분들도 제법 계셨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분들의 반응이었다. 동요를 안 부른 지 몇 십년이 되었을 텐데 사회자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주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아가며 동요를 불렀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

  “아빠하고 나 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

  “......~♩~♪♬”

  아마도 답사 때 마다 그래왔던 모양이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드신 분들 대로 젊은 분들은 젊은 분들대로 자신들이 어릴적 즐겨 부르던 동요를 불렀다. 그러자 생경하던 분위기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때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감동적이었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부족한 그 느낌.  동요를 부르며 뛰놀았던 그 시절 동무들과 함께 놀던 타작마당이며, 멱을 감던 바닷가며, 우리 집 화단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당국화(과꽃을 우리 고향에서는 이렇게 불렀다)와 다일리아 맨드라미,금잔화, 키다리 같은 꽃들과 그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던 큰댁 언니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나도 어느 새 동심으로 돌아가 십수년동안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동요를 깨워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동요는 그렇게, 어린시절 애틋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내 가슴 속으로 스며 들었다. 이 날 이후 동요는 내가 맑고 순순한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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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고니 위버의 '진실'을 보고

  

감독: 로만 폴란스키 

출연: 벤 킹슬리 , 시고니 위버 , 스튜어트 윌슨 


   이 영화의 원작은 아르헨티나 작가 아리엘 도프만이 쓴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의 희곡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폴리나가 미란다의 차를 끌고가서 절벽에 밀어버리는 장면과  미란다를 죽이기 위해 절벽으로 끌고가는 장면 외는 집안에서 거의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세 사람밖에 되지 않는 다는 점,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연극 같은 느낌이 강하다. 공간 설정이 자유로운 영화에서 공간 변화가 거의 없고, 등장인물 세명이 극을 이끌어 가다보니 솔직히 중간중간 졸음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다.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끝까지 봤던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미란다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장면이다. 폴리나가 미란다부터 자백을 받아낸 후 그 어떠한 행위도(하다 못해 발길질 한 번 안하고)하지 않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뚜벅뚜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장면.

  폴리나는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던 동료의 이름을 대지 않는 다는 이유로 심문을 하던 미린다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후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대인 공포증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자신의 남편에게 스페어 타이어를 갖다 주러 온 친절한 이웃집 남자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 남자가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집을 나가는 것 처럼 위장하고 집 앞에 세워 놓은 미란다의 차를 끌고 나가 언덕 아래 굴러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술에 취해 헤매는 미란다를 자신이 만든 법정에 세우고 심문한다. 그런데  미란다는 자신의 죄를 부정한다. 마란다의 차 속에 그가 폴리나를 폭행할 때마다 들려 주었던 '죽음과 소녀'라는 음악 테이프가 있었음에도. 미란다가 그냥 부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알리바이마저 완벽하게 갖추고 시종일관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할 때 나는 폴리나가 극심한 공포에 시달린 나머니 생 사람 잡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미란다는 폴리나를 성폭행한 진짜 범인이었다. 위선을 떨던 미란다가 진실을 고백했을 때 나는 미란다의 얼굴을 짓밟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폴리나는 미린다에게 어떠한 폭력도 가하지 않았다. 다만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란다를 언덕위에 앉혀두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묘한 여운을 남기고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보니 폴리나가 남편과 함께 음악 연주회장에서 자신이 성폭행을 당할 때 항상 듣던 음악 ‘죽음과 소녀’라는 음악을 듣고 있다. ‘죽음과 소녀’라는 음악만 들어도 몸서리 치던 폴리나가 음악회 장에서 괴로운 얼굴빛을 하지 않은 채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은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87년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귄인숙 성고문 사건. 민주화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대지 않자 형사가 무자비한 성폭력을 가했다는 그 사건. 그런데 권인숙은 폴리나처럼 혼자 상처를 부둥켜 안고 살기보다 언론과 여성단체에 성폭력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가해자가 끝내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성폭력은 한 사람의 삶을 황페화 시킨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를 했던, 자백을 받아내든 ,가해자를 처벌하든 성폭력을 당한 본인은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지구상에 이런 반인륜적인 행위들이 다시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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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무얼 스마일즈가 쓴 ‘인격론’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단다.

‘사람이 지치는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이다.’

맞는 말이다. 지인의 말로는 힘이 빠질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나라는데 늘 에너지가 넘치는(?) 나를 보고 있으면 힘이 생긴다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때 힘들지만 부지런히 일할 때 행복했다. 행복‘하다’가 아니라 ‘행복했다’

  그런데 요즘 일이 겁난다. 학교 수업 끝나자 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가 학생들 수업하고, 수업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새 다음 날 아이들과 수업할 활동지 만드랴, 과제물 하랴(읽어야 할 책도 너무 많고 봐야할 공연도 많다)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 모르겠다.

  평창에는 메밀꽃 축제도 열리고 각 지역마다 가보고 싶은 축제가 줄줄이 열리고 있것만 그림의 떡이다. 요즘 같으면 인격론에 있는 저 구절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지치겠지만 부지런히 움직일 때도 사람은 지친다’로 바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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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태풍 온 날 하루

                                           3학년 김채영


  9월 5일날 밤에 텔레비전을 보았다. 내일 태풍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 미리 장화 우비도 찾아놓았다.

  어제 태풍이 온다고 해서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갈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래서 좀 늦게 일어났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그래야 힘센 태풍을 헤쳐나갈 수 있으니까.

  일단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그 위에 우비를 입었다. 또 장화를 신고 혹시 몰라서 우산도 챙기고 집을 나섰다. 학교 올라가는 길에 비가 오면 많이 보이던 지렁이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대신 나뭇잎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우산이 날아가기도 하고, 우산이 부딪혀 지나가기가 힘들자 학년이 높은 5,6학년 오빠들이 제일 먼저 화를 냈다.나는 우비를 입어 우산을 접고 사람들 사이사이로 지나갔다. 평상시에는 몸집이 작다고 내 자신에게 화를 냈지만 이럴 때는 참 편리하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사과를 했다

  ‘정말 미안해. 이럴 때는 참 편하네.’

  서둘러 교실에 도착하니 모두 양말을 다 벗고 있었다. 나도 양말을 벗어 가방에 넣어 두었다. 비가 한참 오다 2,3교시 쯤 되니까 좀 그쳐 창문을 열었다. 창문이 닫혀 있어 답답했는데 좀 나았다. 몇 분되니까 비바람이 몰아쳤다. 1분단은 창문 옆에 있어 제일 많이 젖었는데도 열심히 문제만 풀고 있었다. 참다 못한 우리 분단 남학생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 야, 문 닫아 비들어 오잖아.”

  그제서야 문을 닫고 공부를 했다. 나중에 뭐가 떨어지니 다른 애들이 막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들이 시끄럽게 하니 선생님이 화를 내셨다. 우리는 조용히 했다. 천둥 소리가 우르르쾅쾅하고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때마다 여자 애들은 꺅꺅 소리를 질렀다. 나하고 남자애들만 신나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80%는 남자 같다. 수업을 다 끝내고 다른 애들은 집으로 갔지만 나는 컴퓨터 특활 수업을  하러 갔다. 겨우 5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 중에 내가 타자를 제일 잘 쳐서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집으로 올 때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비가 앞을 가리고 바람 때문에 날아갈까봐 나무를 붙잡고 천천히 갔다. 집에 오니 우리 집이 천국 같았다. 태풍은 좀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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