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서재' 운영자 다윗입니다. 블로그에서 정치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 블로거로서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곳은 책과 작가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 토론하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웃들에게 꼭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몇 자 적고자 합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시민의 책임과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내일은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각 당의 공천과정에서 국민들은 우리정치의 온갖 추함과 후진성을 목도했습니다. 제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를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됩니다. 대개 극한 분노는 비아냥으로 치환됩니다. 투표를 안 한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소중한 권리이며 의무인 투표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도 않으면서 '헬조선'이라 외치고 위정자를 비판하며 국가권력을 조소하는 것은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유와 책임이 하나의 셋트이듯이 권리와 의무도 한 셋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거를 하지 않는 행위도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일견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옹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어두운 현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투표율은 상당히 낮습니다. 낮아도 너무 낮습니다. 대한민국은 투표 안 하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선진국이 투표율이 낮다구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은 5세 때부터 실전에 가깝게 투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각자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합니다. 1인당 GDP 5만 불의 북유럽 복지국가 스웨덴의 지난 국회의원 투표율은 85,8%였습니다. 스웨덴은 의무투표제를 시행하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평균 투표율은 71.4%였습니다. 2010년 5월 유엔 공인 ‘민주주의·선거 지원 국제기구’(IDEA)가 발표한 수치입니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56.9%의 투표율로 최하위권인 26위에 머물렀습니다. 한국보다 투표율이 낮은 나라는 멕시코(56.1%), 슬로바키아(55.0%), 폴란드(50.5%), 스위스(46.8%) 뿐입니다. 투표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94.8%), 벨기에(91.4%), 덴마크(86.1%) 등입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68.9%와 62.6%도 한국보다 높았습니다. 요컨대 선진국일수록 투표율은 높습니다. 투표 안 하는 게 자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함을 선택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각 개인으로부터 발현된 개별성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지향하며 찾아가는 제도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수를 주목하고 패자를 위로하는 제도입니다. 인간사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불완전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와 시스템은 오류와 한계를 갖습니다. 그렇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차선이 아니면 차악을 선택하고자 하는 실시간적 고민이 유권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재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뽑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투표하기 전에 한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기'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1번을 찍거나 자동반사적으로 2번을 찍거나 하는 등의 관습적·수구적·비사유적 투표행위는 올바른 주권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과 결정을 할 때 반드시 '생각하기'라는 인간 유일의 숭고한 차원을 관통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경험, 양심, 신앙, 비전, 사상, 이념, 철학 등을 총동원하여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며 자기만의 최고의 선택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된 선택이라면 1번이든 2번이든 몇 번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건 죄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거짓 등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철학적 기제로 비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을 주도했던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 그는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습니다. 이러한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봅니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비속화하는지를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아렌트의 선언은 20세기 가장 시원하고 냉철하고 위대한 고발로 인류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자들의 '악의 비속성'으로 인해 어두웠고 암울한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사유'는 권리가 아닌 의무입니다. 인간의 도리입니다. '생각하기'는 인간 품격의 바로미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난 존귀한 존재입니다. 보다 행복한 개인, 보다 화목한 가정, 보다 나은 사회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용단하는 개인의 책임있는 선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투표하십시오. 그리고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십시오. 그리고 또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그 다음입니다. 이 끊임없는 개인의 사유과정 속에 우리 정치의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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