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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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中

 

  그렇다. 문학은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고전들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문학은 꼭 알려야 하는 현실세계를 말해왔고 그로 인해 좋은 미래를 예비해왔다. 문학의 역할이자 의무인 인간의 탐구나 시대의 반영은 결국 말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때만이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 황석영을 좋아한다. 국내 최초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고은 시인보다 그에게 더 기대하고 있을 정도다. 내가 황석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작가로서의 그의 삶을 그가 쏟아낸 텍스트에서 온전히 받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 본질적으로 문학에서 텍스트 안팍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삶과 문학은 매한가지 일 수 있다. 반추하건대 황석영의 삶은 곧 그의 문학이었다. 그의 문학사는 오욕으로 점철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압축이었다. 항상 진지하고 묵직하게,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천착하는 황석영의 모습이 나에겐 한없이 높아만 보인다.

  황석영의 신간소식은 항상 나를 즐겁게 한다. 한 소녀의 기구한 삶을 통해 '생명수'의 본질을 탐구했던 그가, 젊은 독자와 호흡하기 위해 자신의 자전적 텍스트를 쏟아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소설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황석영의 최신작 『강남몽』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온갖 긍정적 코드로 점령당한 내 호기심 안으로 오롯이 안착했다.

  소설 『강남몽』은 소위 '신화話'로 불리는 서울 강남의 형성사를 다루고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한강 남쪽 일대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 땅값의 부자동네로 발전해왔는지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흥미있게 그려냈다. 소설 각 장의 중심인물 다섯 명은 강남 형성 역사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로 룸싸롱 마담, 대기업 총수, 조직폭력배 보스, 부동산업자, 하위계층 등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한국 자본주의 형성사를 사실적이면서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룸싸롱 마담 출신이자 대기업 총수의 아내 박선녀의 현재로부터 출발한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대변되는 속도 자본주의의 참혹한 결과는 소설 전체의 현재적 시점을 지배한다. 박선녀는 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콘크리트 무더기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파란만장한 과거의 삶이 그려진다. 그녀가 어떻게 어둡고 험악한 접대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어떤 기회와 방법으로 초기 강남 부동산 세계에 발을 디뎠는지, 남자관계와 사랑은 어떠했는지 등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소설 각 장마다 이야기 흐름방식은 비슷하다. 마치 연작소설과 비슷한 구성으로 소설의 각 장은 한 인물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펼쳐지며 다른 이야기와 연결되고 종속된다. 김진은 거대 재벌 회장으로서 한국 자본주의 역사의 오욕인 정경유착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심남수는 부동산업자로서 박선녀에게 처음으로 부동산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인물이다. 홍양태는 지하암흑세계의 보스이며 박선녀가 운영하는 룸싸롱과 유착관계에 놓여있다. 임정아는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박선녀와 함께 죽음을 대비한 인물이며 그녀 부모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하위계층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각 인물들은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양한 위치에서 적절히 표상한다. 접대여성들, 밀정과 군인, 정치와 유착한 기업인, 부동산업자들, 조직폭력배들, 그리고 타락과 부도덕이 관영盈한 가운데서도 꿋꿋이 희망으로 살아가는 하위계층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들은 우리네 현대사 속 각계각층의 단면들을 적확히 담아낸다. 그간 황석영이 그려낸 모든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과히 입체적이며 실로 역동적이다.

  무엇보다 황석영은 역시 이야기꾼답다. 황석영의 필력은 한국 근현대사의 관통이라는 묵직한 무게감을 단 한권의 장편으로 요리한다. 소설 속 다섯개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곳을 비추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개별적 이야기는 소설의 거시성을 오히려 뒷받침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1900년대 초 만주항일운동에서부터 세기말 삼풍백화점 붕괴에 이르기까지 대략 한 세기의 역사를 그려냈다. 요컨대 작가 황석영은 강남 형성사라는 미시적 테마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굴곡과 오욕의 근현대사를 속도감 있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부분적이면서도 소설의 거시성과 완결성을 침해하지 않는 점은 역시 거장다운 황석영의 노련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각 인물이 그 시대의 특정계층을 잘 표상해주고 있다. 시詩가 소설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받는 것은 짧은 분량으로 깊은 의미를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것보다 짧고 굵은 것이 문학을 보다 묵직하게 한다. 압축과 표상은 소설의 힘을 극대화 한다. 강남 형성사를, 아니 한국 현대사의 오욕을 짚어내는데 굳이 몇 권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노련한 이야기꾼 황석영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작가후기>를 통해 중국 고전 『홍루몽』을 언급하며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제목을 '강남몽江南夢'이라고 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무게를 굳이 '강남 형성사'라는 지엽적 소재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황석영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 '굴곡'과 '오욕'은 아직도 우리사회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몽夢' 앞에 놓여질 단어는 '강남' 이상의 카테고리도 가능하다. 보다 크고 넓은 의미의 것도 무리없이 담아낼 수 있는 소설이다. 결국 소설 『강남몽』은 비정의와 부조리가 판치는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엄중한 지적이자 우리가 경영하고 있는 현실세계가 후세대로부터 어떻게 스케치될 지에 대한 소름끼치는 울림인 것이다. 꿈이 아닌 '현실'의 울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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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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