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별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 위인을 텍스트로 만나는 것은 언제나 흥분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지 않았던 실존 인물을 만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구전이며, 다른 하나는 활자이다. 두 가지의 묘미는 각기 독특하다. 하지만 엄밀성과 객관성에서 글이 말보다는 훨씬 고차원이다. 더욱이 말보다 글로 전달되는, 소위 '활자의 마력'에 가장 민감한 분야가 역사라는 점을 감지한다면 역사 인물을 활자로 만나는 것에 대한 흥분은 결코 녹록지 않다 하겠다.

  지난 몇 년간 한국문단은 역사소설의 범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역사물을 쏟아냈다. 김훈은 한국사 최대의 오욕의 역사를 특유의 강렬한 단문장의 문체로 그려냈다. 신경숙과 김탁환은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굴곡진 근대사를 관통했다. 이정명은 조선시대 두 천재 화가의 삶을 발군의 상상력으로 빚어내 흥미를 유발시켰다. 심윤경은 화려하고 독특한 신라시대의 아우라를 멋지게 현대화하여 독자를 찾았다. 

  제 1회 세계문학상 수상자 김별아는 이러한 한국 역사소설의 책더미에 한 권을 더 보태고 있다. 그녀의 신작 장편소설 『백범』은 한국 근현대사 위인 중에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존경과 선망을 받는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백범의 사랑과 가족애, 혁명가로서의 삶과 번민이 잘 담겨진 소설이다. 서사의 시종을 백범 자신의 1인칭 서술로 고백하는 문장들은 작가 자신의 목소리라 여겨질 정도로 생생하게 독자의 내면으로 잠입한다.

  이야기는 백범이 광복의 소식을 듣고 조국으로 향하는 김포행 비행기 이륙 장면으로 시작한다.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백범은 상념에 잠긴다. 오로지 조국을 위해 타국에서 갖은 고초를 견디며 기다렸던 이십육 년의 세월. 서슬퍼랜 일본 형사를 피해 도망다녔고, 각종 의거로 동지를 잃는 아픔을 감내했으며, 처자식에게 따뜻한 대접 한 번 하지 못한 지난 세월의 편린들을 반추하며 가슴을 일렁인다. 소설의 마지막, 비행기는 조국의 지면에 착륙한다. 비행기 차창 바깥으로 맑고 청량한 하늘을 쳐다보며 감상에 젖는 백범의 모습은 지난 이십육 년의 지난한 시간을 순간화하는 인상적 장면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인물 간의 대화로 주도하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화자의 독백 서술로 서사를 이뤄간다는 점이다. 1인칭 시점의 작중화자 백범은 작가 자신의 분신과 일원화된다. 다시 말해서 백범의 고백이 곧 작가의 서술이며, 작가의 의지가 곧 작품 내 백범의 형상화가 된다. 요컨대 작가 김별아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역사 안에서 발군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주관적 재창조로서의 인물 김구를 탄생시키고 있다. 

  김별아가 만들어낸 김구는 슬프다. 처연하고 구슬프다. 서사를 이끌어가는 기본 키워드는 '슬픔'이다. 소설의 모든 소제목은 공통적으로 '슬픔'이라는 단어를 포함한다. 각 장의 이야기를 주제적으로 내포하는 수식어구만 바뀔 뿐 슬픔은 계속되고 진화한다. 각 슬픔의 속성들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나라를 잃은 망국민으로서의 슬픔, 혁명가로서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적 슬픔,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슬픔 등 소설 속에서 고백되는 백범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은 처연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조국을 잃은 채 일그러진 역사를 살아가야 하는 민족의 고통이다. 김별아의 문장은 짧고 강렬하게 그 시대의 아픔을 토로한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칼날 앞에 상처입고 죽어가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처절한 현실을 읽노라면 슬픔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고 가슴은 한맺힌 야수의 발현으로 요동친다. 아.. 한민족 근대사 35년을 짓밝은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여.. 결코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상흔을 마음속 깊은 곳에 돋을새김한다. 

  나는 인간의 삶과 개성을 잘 그려낸 소설에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문학은 인간을 탐구하고 해부한다. 인간의 존재감이 결락된 문학은 논할 수 없다. 그 어떤 장르의 소설이든 문학은 종내 인간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으로 귀결되며 치환된다. 인간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엿보고, 텍스트 안에서 작가를 읽고,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을 천착하며, 인물간의 긴장과 아이러니를 관찰하는 묘미. 내가 문학을 읽는 제 일의 연원이다.

  '김구'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웅숭깊은 아이콘을 '슬픔'이라는 키워드로 그려낸 『백범』은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 김별아가 그려낸 백범과 당시의 시대상황을 읽으며 내 자신을 돌아본다. 그 시대의 분노와 슬픔은 백년의 시간을 넘어 동일한 공간 위에 서 있는 내 가슴으로 안착된다. 그리고 곱씹는다. 청년이여, 세상을 포용하되 담대하라!, 는 백범 선생의 일갈을.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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