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더이상 『노르웨이의 숲』을 읽지 않는다. 『데미안』을 읽지 않듯이. 그 소설이 인상적이었던 어떤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르미는 이제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푸르미와 밤비 사이에는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일본문학이니 독일문학이니, 혹은 한국문학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선은 더이상 없었다.   <p. 89>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겠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좋아하게 됐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내게 되려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번만이라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어버릴 것이다.   <p. 100>

나는 "Our destination is fixed on the perpetual motion of SEARCH. Fixed in its perpetual EXILE"을 보자마자, 그 문장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을 잘 설명해준다고 여겨 내 책상 앞 벽에다 붙여놓았다. 뭔가를 찾아 영구 운동하지 못하는 문학, 영구 망명을 꿈꾸지 못하는 문학은 결국 내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이 될 수 없었으니까.   <p. 159>

그런 까닭에 작가는 씸퍼사이저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이 되는 경우, 작가는 사상가로 바뀌면서 '국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국내란 중심을 향해 응축되는 공간이다. 진지한 문학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자아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게 만드는데, 국내용 문학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아는 세계에 맞게 자아를 만들어내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고 나면 경계선 바깥은 모두 타자가 된다. 국내용 문학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p. 169>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p. 201>

두말할 나위 없이 삶은 영원하다. 다만 우리를 스쳐갈 뿐이다.   <p. 290>

그럼 집에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영원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만간 그는 다시 공항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그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p. 290>

 

서평 : http://blog.naver.com/gilsamo/9003187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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