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한지』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가장 기대하며 읽고 싶은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은 유방이 천하를 손에 넣는 순간도 아니었고, 번쾌가 여러 적들을 단칼에 무너뜨리는 모습도 아니었다. 훌륭한 그릇 유방과 탁월한 참모 장량과의 첫만남이 내가 강렬하게 원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주종主從'의 조화를 보여준 그들의 만남은 과연 어떤 장면으로 활자에 반영되었을까. 내심 기대하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 명장면은 바로 2권의 말미에 소개되고 있다. 작가 이문열은 유방과 장량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그를 보는 순간 패공은 묘한 충격과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그는 책상물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나약한 주제에 턱없이 까다롭고 말만 반드르르한 유자(儒者)들은 특히 싫어해, 어쩌다 그들을 만나면 그냥 보내 주지 않았다. 비웃거나 빈정거려 약을 올리기도 하고, 힘으로 눌러 골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저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별나게 쓸 일이 있어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유방은 그런 눈길로 그 사람을 쳐다 보다가 다시 불쑥 떠오른 엉뚱한 망상에 가슴 설레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쓰임은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늘은 나를 위해 저 사람을 내고 키워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를 도우러 보냈다.....'
<p. 297-298>
뒷날을 두고 보면 유방과 장량은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석의 극처럼 서로 다른 것이 오히려 끌어당기는 힘을 가졌는지 그날 까닭 모르게 끌림을 느끼기는 장량도 유방과 마찬가지였던 듯싶다.
처음 장량에게 유방은 무엇이든 그저 크고 높고 넓기만 한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다. 멀쑥한 키와 살집이 좋은 몸, 넓고 훤한 이마와 높고 콧방울이 넉넉한 코, 그리고 풍성한 수염과 머리칼. 목소리까지도 넓은 동굴에서 우렁우렁 울려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다부진 맺힘이나 단단하게 들어찬 속을 느끼게 해 주지는 않았다.
유방의 첫인상이 준 그와 같은 느낌은 먼저 장량에게 무름이나 모자람, 허약 같은 것으로 읽혔다. 이 사람은 뭔가가 실제보다 턱없이 부풀어 올라 있다. 용케 버티고 있지만 곧 파탄이 드러나고 허물어져 내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쉽게 남을 방심하게 만드는 인물, 그래서 장량은 잠시 유방을 만만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유방과 마주 보고 선 그 별로 길지 못한 시간에 이상한 변화가 왔다. 무르고 모자라고 허약해 보이던 것들은 차츰 묘한 기대를 주는 비어 있음으로 다가오고, 다시 희미하지만 자신이 그 빈 데를 제대로 채워 넣고 싶은 욕망으로 자랐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참으로 큰 그릇이다. 공을 들여 키우면 천하도 담을 만하다.....
<p. 299-300>
어쩌면 그날 밤 장량이 그 술자리에서 본 것은 바로 그들 패현 건달들에게 격려가 되고 마침내는 비상한 분발을 이끌어 낸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말없이 빙글거리며 술잔만 비우고 있는 유방이 그러했다. 그 무르고 모자라고 허약해 뵈는 인품이, 그저 크고 넓고 높기만 한 텅 비어 있음이, 단순하고 순박한 시골 건달들을 분발해 마침내는 천하를 통째로 담게 만든 것이었으며, 장량은 어렴풋하게나마 그걸 알아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거기서 받은 감동은 천하의 대세를 읽는 장량의 안목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p. 30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