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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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영상문화가 문자문화의 결락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조각났다. 영양가 없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로 매주 반복되는 연속극이나 시청자의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기 분주한 쇼·오락프로그램의 부박한 수준은 심히 넌덜머리가 날 정도다. 그럼에도 즐겨보는 TV프로가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금년에 신설된 M본부의 <명랑 히어로>를 매우 즐겨본다. 소위 '막말'로 대변되는 리얼리티 쇼프로의 골격을 답습하곤 있지만, 방송의 구성과 취지가 마음에 들어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편이다. 점차 희망과 행복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명랑'한 사회를 꿈꾸며 수다를 떠는 그들네의 '막말'이 내게는 그닥 밉게 다가오지 않는다.

  정이현의 산문을 연이어 만나고 있다. 『작별』과 함께 한 세트로 구성된 산문집 『풍선』의 부제 또한 인상적이다.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라는 부제는 '명랑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책의 첫장을 넘기게 한다. 하지만 부제를 통해 예견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라는 부제의 『작별』보다는 한결 '명랑한'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는 것을.

  『작별』이 타인의 문학을 통해 정이현이 관조한 삶과 사랑과 문학의 네러티브를 얘기한 산문이라면, 『풍선』은 영화와 음악, 드라마 등의 문화 미디어를 통해 사유하고 또 사유한 정이현의 외침이다. 정이현표 아포리즘은 영화와 드라마 속 주제와 인물을 통해 '사랑'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선 동시대 코드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재들로 우리사회의 모순된 문화와 습속을 꼬집는다. 역시나 톡톡 튀는 새콤발랄한 그녀의 활자는 가벼움이 아닌 '가벼움'으로 독자의 부담을 희석시킨다.

  같은 리뷰라도, 동일한 주제의 칼럼이라도, 소설가가 쓰면 다르다. 단언컨대, 분명히 다르다. 필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소설이 아닌 글에서 빛나는 소설가의 특별함은 바로 '관찰력'이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특별한 관찰력을 갖고 있다. 정이현이 리뷰한 영화의 대부분은 특출날 것 없는 평범한 대중영화들이다. 별 것 없이 보였던 영화 속 인물과 대사로부터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것들을 콕 찝어서 활자화의 재료로 삼는 세심한 관찰력은 그녀가 왜 소설가로 존재하는지를 은근하게 표상한다. <섹스 & 더 시티>에서 뉴요커의 멋진 삶이라는 피상성보다 '관계'라는 핵심 키워드를, 영화시상식에서 배우가 아닌 한 인간의 맨 얼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작'과 '각색'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일 수밖에 없음을 관찰해내는 그녀는, 역시나 '소설가'다.

  정이현의 글은 소위 '공감'이라는 코드로 독자와 쉽게 호흡한다. 책 속에서 가장 공감이 된 부분은 「별, 별, 별」이라는 제목의 텍스트다. 그녀는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은 언제부터인가 지상에 내려와 '점수'가 되었다며 한탄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글로써 세상의 수많은 프로·아마추어 비평가들을 일침한다.

제발 쉽게 가치판단하지 마시라. 당신의 판단 기준은 당신 눈에만 옳을지도 모른다. 계몽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으니, 부디 남을 함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 마시라. 텍스트 생산자는 당신의 '권위 있는' 한마디에 제 모자람을 깨닫고 회개하는 어린 양이 아니다. 문화 텍스트에는 정답과 중심이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어차피 오독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취향을 이념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비평이 아니라 '내 오독의 가능성'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비평, 텍스트의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비평을 기다린다.   <p. 203>

  이런 글을 쓰는 소설가를 내 어찌 멀리할 수 있단 말인가. '싫다'와 '나쁘다'의 정의를 정확하게 가름하고 다양성 침범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우리사회의 건전한 비평문화를 기대하는 소설가 정이현의 목소리에 나는 오롯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조차도 하나의 문장으로 읽어내고 음미하면서 타자의 창조된 텍스트에 대한 겸손한 의무를 전제할 줄 아는 독자. 바로 이러한 책읽기와 비평의 고차원적 기준을 소설가 정이현을 통해 새삼 학습한다.

  정이현의 첫 산문집 『작별』과 『풍선』은 소설가 이전의 인간 정이현의 맨얼굴이 많이 배어 있다. 무겁지 않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무엇보다 부담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다. 소설 쓰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쓰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라고 고백하는 소설가 정이현. 그녀의 '외로움'과 '명랑'은 산문의 활자 속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녀의 문장을 조금 수정하면 두 권의 산문집을 읽은 내 느낌이 잘 정리된다. 소설 읽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읽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진심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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