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 - 짧은 제국의 황혼, 이문열의 史記 이야기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초한지』 - 이문열의 史記이야기 / 이문열 / 민음사


[ 프롤로그 ]

전 10권인 이문열의 『초한지』를 완독했다. 1권부터 8권까지는 한달음에 달렸지만 9권·10권의 출간이 예상보다 늦어져 8권과 9권 사이의 연결 공백이 다소 벌어진 점을 제외하고는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삼국지』와 함께 중국사에서 가장 많이 천착한 역사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다양한 번역본으로 출간되었기에 신간이 주는 신선함의 흥분은 녹록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문열'이라는 희대의 이야기꾼의 존재감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권을 깔끔하게 완독하게 되었다.

  이문열의 『초한지』는 2002년부터 4년 동안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것을 전 10권으로 완간한 것이다. 10권에 이르는 장중한 초한楚漢의 역사 속에는 중국 대륙의 패권을 겨루는 두 영웅호걸의 이야기가 이문열 특유의 발군의 스토리텔링으로 새롭게 부활했다. 작가 이문열은 《사기》를 원전으로 하고 《자치통감》과 《한서》를 보조자료로 삼아 한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시황제 암살을 기도하는 기원전 218년부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한나라 효문제가 나라의 기틀을 세울 때까지 약 30년간의 이야기를 담담히 담아냈다.


[ 유방과 항우 ]

『초한지』를 읽는 핵심 포인트는 응당 한왕 유방과 패왕 항우의 리더십 차이일 것이다. 두 영웅의 지략과 용인술의 차이를 관조하면서 작금의 시대상에 견주어 보는 것은 매우 큰 흥미거리이다. 흔히 역사를 승자의 것이라고들 하기 때문에 유방은 많이 미화됐고 항우는 폄하됐을 것이라 추정하는 안목이 지배적이다. 사실 개인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항우가 우위에 있었음은 대부분의 평가가 일치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이 리더십의 필요충분조건을 완성시킬 수 없음을 초한의 역사는 엄중하게 교훈한다. 

  크게 세 가지 범주에서 유방의 리더십은 항우보다 빛났는데, '용인술'이 그 첫 번째며, '포용력'이 두 번째요, '넓은 시야'가 세 번째다. 정치는 장량에게, 내정은 소하에게, 군사의 일은 한신에게 전권을 위임한 유방의 용인술은 적확한 인사의 배치와 신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잘 보여준다. 반면 신하에게 항상 의심의 날을 세운 항우는 자신의 유일한 책사 범증마저도 이간계에 속아 내쫓는 우를 범하고 만다. 번쾌를 위시하여 수없이 많은 맹장과 용장을 거느렸던 유방과는 달리 이름에 꼽힐 장수로 고작 용저와 종리매뿐이었던 항우의 초라한 인재풀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에서의 두 영웅의 대극적 차이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포용력에서도 항우는 유방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항우는 절대로 항복한 군사들을 살려주지 않았다. 또한 정복한 땅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탄압하는 병사들의 잔악함을 애써 외면하곤 했다. 실례로 항복한 진군秦軍 20만을 신안에서 생매장한 사건은 항우의 비포용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승리 후 정복한 땅의 군사와 백성들을 여차없이 생매장시키는 항우의 잔인함은 훗날 중국대륙의 모든 제후국과 백성들이 자신을 외면해버리는 업보가 되기도 한다. 반면 항복한 장졸은 흔쾌히 받아 주고, 타지 백성들에 대한 약탈과 강도를 엄히 다스렸던, 그리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었던 유방의 덕은 천자가 되어 제국을 건설하는 토대가 된다.

  전쟁을 보는 시야에 있어서도 유방과 항우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기실 전투력에 있어서 유방은 항우를 당해내지 못했다. 굳센 강동병 8,000명을 주축으로 한 항우의 초군은 초한전쟁의 최후인 '해하垓下전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무적불패의 군사들이었다. 거록에서 유민군軍 5만으로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대군 20만을 오래된 기왓장 부수듯 쳐부수었고, 수수가에서는 정병 3만으로 유방이 이끄는 다섯 제후의 56만 대군을 깨뜨려 그 시체로 강물을 막은 게 항우였다. '집중'과 '속도'로 갈음되는 항우의 고도의 전투력은 오강烏江에서 자신의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 매번 유방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지적 의미의 '전투'에 한했을 뿐이다.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길고 넓게 시야를 고도화하는 안목에는 유방이 한 수 위였다. 중원의 지도를 넓게 훑으면서 도읍지 역양轢陽을 소하에게 맡긴 것은 물론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을 넓게 분포시켜 항우의 근거지를 조이며 뒷날의 싹을 자른 것은 넓은 시야로 초한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유방의 높은 안목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 패왕 항우.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물론 유방의 단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방 또한 적잖은 실수와 소인배와 같은 행동으로 어려움에 빠질 때가 많았다. 오강에서 항우를 죽이고 초나라를 평정, 중국대륙을 통일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의 유방에 대한 아쉬움은 차치하자. 승리한 자의 승리하기까지의 역사적 기록은 이미 승리 그 자체로 용서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제위에 오른 뒤 유방이 보인 신하에 대한 지나친 의심과 핍박, 소위 '공신억멸책功臣抑滅策'으로 불리는 무자비한 그의 뒷모습이다. 더욱이 황후 여태후의 조작에 의해 자행된 한신의 죽임과 유방 사후 전개되는 피비린내 나는 외척의 살육전은 유방이 외척관리에 얼마나 미천했는지를 그대로 입증하는 사건들이다. 3대 황제 효문제孝文帝의 제위를 전후 외척인 여씨 일족이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기까지 제국의 아침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 다른 사람들 ]

나는 『초한지』 전권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한신韓信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초한전쟁은 유방과 항우의 대결 이전에 한신과 항우의 전투였다. 한왕 유방을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른 한신은 팽성에서의 어의없는 패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 진적이 없는 최고의 장군이었다. 사실 한신이 없었더라면 유방은 결코 항우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유방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최고의 일등공신은 단연 한신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신의 존재감을 유방은 위험하게 생각했고, 소소한 역모의 혐의로 그를 탄핵한다. 끝내 여태후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살해당한 한신의 종국은 그의 공과 능력과 충심을 감안하면 매우 서글프다. 큰 위인을 담을 수 있는 자라면 더 큰 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담아내지 못한 채 토사구팽兎死狗烹한 유방의 그릇이 작게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애수일까. 만약 유방이 한신을 내치지 않고 끝까지 믿고 자신의 사후를 맡겼더라면 여태후를 위시한 외척세력에 의해 자행된 피비린내 나는 제국 초기의 혼란상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신 외에도 유방 주변에는 불세출의 영웅들이 많았다. 내정과 보급을 담당하며 한군의 든든한 뒷심이 되어준 소하蕭何, 유방의 꾀주머니로 매 위기마다 좋은 계책으로 한군을 도운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패현시절 때부터 따랐던 번쾌樊快와 노관盧튷, 한군 최초의 기마대장 관영灌嬰, 그 외 조참曹參, 주발周勃, 왕릉王陵 등 많은 영웅들이 유방을 도와 한제국을 건설했다. 유방은 소하를 매우 신임했다. 비록 전쟁터에서의 눈에 보이는 활약은 없었지만 소하가 뒤에서 도읍지 역양을 잘 관리하고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제때에 받쳐 주었기 때문에 유방은 마음 편히 항우와의 혈전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유방은 제국을 세우자마자 공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하를 상국으로 삼는다. 장량 또한 유방의 총애를 많이 받았는데 유방은 매사에 장량에게 물어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물었고, 모든 것을 따랐다. 장량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비해 항우의 사람으로 거론할 만한 이는 딱히 범증范增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항우의 지나친 의심병으로 인해 내쫓겨 죽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항우의 삼촌인 무신군 항량을 주군으로 섬길 때부터 범증은 초한지 내 최고의 책략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장계취계將計就計(적의 계책을 미리 알아채고 그 계책을 역이용하는 전술)'의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범증은 초나라의 초중반 역사에서 찬란한 활약을 보여준다. 항량은 범증의 말을 잘 따라서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는 무패를 이어간다. 항우도 처음에는 범증을 '아부'라 부르며 그의 계책과 조언을 잘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군왕으로서의 자신감과 교만이 뒤섞여 점차 범증의 책략을 귀기울이지 않는다. 한신을 아끼라는 범증의 말을 무시해서 유방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홍문의 잔치에서도 범증의 조언을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보내 훗날 천추의 한이 되기도 한다. 결국 진평의 이간계에 속아 범증을 내치고 죽게끔 만드는 항우. 만약 범증이 끝까지 살아서 항우를 보필했더라면 초한의 주인을 결정지었던 해하전투의 향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
이문열 ]

언제부터인가 내 문학을 조여 오던 묵살(默殺)의 카르텔은 1990년대 말에 이르러 일방적인 단죄의 선고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판 홍위병들이 그 선고의 어설픈 집행자로서 내 문학의 장례식을 되풀이 거행하자 나도 격렬하게 응전하였다. 그러나 득세하는 인터넷 대자보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며 나날이 괴물이 되어 가던 나는 갈수록 더 흉흉해지는 전의(戰意)만큼이나 주체 못할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 들었다.   <p. 21, 글머리에> 

  1권 '글머리에'에 소개된 이문열 자신의 고백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피로와 무력감을 느낀 작가 이문열. 그는 이를 극복키 위해 중국 고전문학으로의 도피를 실행했다. 이미 『삼국지』와 『수호지』의 평역을 통해 문학적 긴장으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했던 그는 동일한 의미의 연장으로 『초한지』를 손에 잡았다. 요컨대 고단한 한 세월을 넘겨 보려는 자신의 의지를 중국 최고의 고전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작업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가로서의 기백과 강단은 한 소설가의 지독한 고독과 번민, 문학적 긴장과의 싸움, 이에 대한 회복과 열정에 대한 의지가 충만히 담겨 있다.

  현재 이문열은 다음 작품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초한지』 이후 한국의 역사물을 쓰고 싶다는 작가 이문열. 
  "1980년대 이야기는 예전부터 구상했었지만 아직 쓰지 못했는데 이 이야기가 지금도 유효할지 의문이 드네요. 그 밖에 새롭게 생긴 쓰고 싶은 이야기도 있구요.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할 지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그의 고민이 빨리 끝나 좋은 작품으로 독자를 찾아가길 바란다. 더욱이 문학 외적의 공간에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로서의 문학적 존재감으로 승부하여 자신의 피로와 무력감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갈구한다.


[ 에필로그 ]

나라가 시끄럽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리더십의 부재에 시달려 오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와 국회는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대통령', '일 못하는 정부', '싸움쟁이 국회'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현주소는 많은 국민들을 힘들고 답답하게 한다. 어떤 나라는 대통령을 화폐에 인쇄하여 기념하고, 또 어떤 나라는 국회를 가장 신뢰하는 집단으로 국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외계에서 일어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때에 위기에 봉착한 국가적 리더십을 점검하고, 민심에 경청하며, 국민을 통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리라.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새것과 함께 옛것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과거의 실패와 성공을 반추하며 현재를 냉철히 분석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하며, 꿈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는 힘이 필요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등장하여 서로 상반된 리더십으로 역사의 인과성을 결정지은 두 영웅의 이야기는 2000여 년이 지난 작금의 시대에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결국 무엇이 승리하고, 무엇이 강국을 건설하며, 무엇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장엄하고도 장중한 초한의 역사를 담은 중국 불멸의 고전 『초한지』의 존재성을 곱씹으며 리더십과 소통의 부재에 시달리며 번민하는 21세기 대한민국 현주소의 희망을 읽는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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