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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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회사 업무로 인해 수원 영통 근처에 갔을 때였다. 그리 크지 않은 자그만 도로가 뻗어 있었는데 도로표지판에 '박지성로'로 명명되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전후 비약적인 부흥으로 최고의 축구인생을 살고 있는, 더욱이 국익과 국가 브랜드에 큰 힘을 보태고 있는 축구선수 박지성에 대한 수원시와 시민들의 기념적 배려일 것이다. 사실 '박지성로' 외에도 유명한 도로명들에 과거 위인들의 이름이 사용된 것을 우리 주변에서 쉽지 않게 볼 수 있다. 퇴계로,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원효로 등등 인물과 관계된 도로와 지역명은 수없이 많다. 국가와 지역을 빛낸 인물을 기념하고, 그 사람의 존재성과 정신과 가치를 곱씹자는 데 아마도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인물과 지역의 관계는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더욱 많이 발견된다. 대부분 정치적 위인들에 한정된 국내와는 달리 외국의 그것은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까지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유럽여행에서는 작가나 예술가의 생가를 방문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와 기념관을 목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프라하가 그렇고, 런던이 그러하며, 빈이 그렇다. 더욱이 잘츠부르크는 도시 전체가 모차르트를 기념하고 추억할 정도다. 한 인간이 태어났고, 어떻게 번영했으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산 증거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 지역에 존재하면서 수백, 아니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후세에까지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호미출판사의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이러한 지역과 사람과의 관계성을 기반으로 엮은 수필집이다. 1993년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현아는 신라 천 년의 도시 경주에서부터 시인의 마을 해남까지 다섯 도시의 여행을 그 지역과 농밀한 관련성을 갖는 '여인코드'로 풀어낸다. <그 곳>에서 과연 <그 여자>들의 삶이 어떠했고, 어떤 존재성을 지니는지를 저자는 앎과 느낌과 논설로 독자에게 소개한다. 

  경주에서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채취를 느끼고, 해남에서는 고정희 시인의 삶과 시를 사유한다. 강릉에서는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비교 천착하며, 수덕사에서는 나쁜 여자 나혜석의 삶에서 드러난 '신여성'의 의미를 해석한다. 부안에선 기생 매창의 삶과 시와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욱이 유교사회의 미덕화로 오랜 기간 동안 절제된 여성성을 고착해왔던 한국사회의 오류와 모순을 지적하며 과거 여성들의 용기와 기백을 상찬한다. 

  저자는 신라를 구한 애국충정의 대명사 박제상의 부인의 전설이 담긴 치술령곡을 전면에 배치한다. 나라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망부석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숨결과 정신을 치술령에서 읽어내는 저자의 감상은 자못 흥미롭다. 더욱이 박제상과 그 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상 차이점을 언급하며 12세기와 13세기 후반의 시대적 배경의 해석과 평가절하된 망부석 설화의 재인식은 굉장히 인상깊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강릉을 대표하는 두 여인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에 대한 비교적 고찰이었다. 한 여인은 너무 과한 비판을, 한 여인은 너무 진한 찬사를 받았다는 점. 또한 한 여자는 너무 불행했고, 한 여자는 너무 완벽했다는 점. 그 차이점 속에서 두 여인의 유사한 공통점을 추출하는 저자의 관찰력은 많은 부분에서 공감적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로서 글과 그림의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음에도 작품 자체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작금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소외된 평가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한 여자는 너무 음란하고 표절이라는 등의 시비로 비판을 받아왔고, 한 여자는 위대한 어머니로서만 부각될 뿐이었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로 재단된 두 여인의 웅숭깊은 삶과 예술의 세계를 재천착하는 저자의 문장들은 오롯이 공감되며 흥미를 발산시킨다. 

  고정희 시인에 대한 저자의 강한 사랑도 눈길을 끈다. 기존의 남성적 문체를 거부하고 시적 혁명을 이끈 한 여성 시인에 대한 저자의 상찬은 시인의 마을 해남에서 그 채취와 정신을 음미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한 시인의 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시인의 고향을 찾아가 봐야 한다고 말한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들의 명문장을 인용한다. 그리고 시인 고정희를 만들고 키운 남도의 땅과 남도의 공기와 남도의 바람을 느끼며 상념에 잠긴다. 이러한 저자의 감상은 한 예술가에 대한, 그리고 동일 여성으로서의 공감과 애정이 내재되어 있어 아름답다. 1980년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하나인 고정희의 존재감. 그것은 애초부터 해남에 있었고,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며, 저자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그녀의 활자 너머로 내게까지 온전히 전달되었다. 

  여행은 좋은 것이다. 더욱이 목적이 있는 여행은 더욱 힘있는 <좋음>을 여행자에게 선사한다. 과거 <그 곳>에 있었던 여자들의 삶과 예술과 사랑을 곱씹으며 여행이 주는 최고 수준의 <얻음>을 추출해내는 저자 김현아의 활자가 참 좋다. 한 지역과 한 여자에 대한 연관성, 그리고 아름다운 시를 통해 잔잔하고 공감가는 문장으로 엮어진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를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시공간의 간접적 일탈을 소원하는 독자들에게 살포시 추천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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