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페의 필름통
곽효정 글.그림 / 섬앤섬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은 IT 강국이다. 더욱이 인터넷 부문에서는 최고 중에 최고라 평가받고 있다. 세계 제일의 인터넷 보급율과 광랜으로 대변되는 회선의 초고속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인터넷 기반 시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있다. 하지만 우수한 IT 하드웨어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콘덴츠의 수준은 심히 조악하여 과연 인터넷 강국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한국 네티즌들의 질적 수준이 과연 IT 강국이라는 외연적인 이름값에 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곱씹음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터넷 예절과 콘덴츠 수준을 목도할 때면 민망함을 가질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콘덴츠에 있어서는 빛의 속도로 은유되는 인터넷 속도에 비해 초라하기만 하다. 한국 네티즌들이 양산하는 콘덴츠는 대부분 1인칭과 3인칭의 '정보'의 전달이 아닌, 1인칭과 2인칭의 '교류'의 수준에 머물러있는 경향이 강하다. 미국 블로거들의 콘덴츠가 깊이있고 풍성한 정보의 바다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외연과 내면의 차이에서 확인되는 한국 인터넷 수준의 불균형은 아쉽기만 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생산하는 양질의 좋은 정보로 블로거들에게 앎과 지혜와 도전을 주는 네티즌도 많이 있다. 그들은 책, 영화, 음식, 여행 등의 다양한 취미와 분류에서 자신의 논설과 경험과 노하우를 포스팅하여 한국 인터넷 콘덴츠 문화를 주도한다. '[페페] 시간을 움직이는 마을'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곽효정 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녀의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오롯한 사랑과 깊이있는 탐구가 담겨있다. 최근 출간된 신간 『페페의 필름통』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잡지 《사과나무》에 그녀가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영화 에세이집이다.  

  영화 에세이지만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 속에서 저자 자신이 관찰했던 '삶'과 '사랑'에 대한 사유들이 가득 담겨있다. 저자는 영화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상들의 다양한 삶과 번민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더욱이 저자 자신의 삶과 사랑에 대한 경험적 네러티브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 독자로 하여금 훈훈하고 흥미롭게 몰입되게 만든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영화 중 나는 세 편의 영화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산골 마을의 독특한 가족 이야기를 담은 《녹차의 맛》, '무엇인가를 기다리지만 보채지 않고 자신의 일에 소홀하지 않는 것!'이라는 기다림의 기본 자세를 이끌어내고 있는 《애프터 미드나잇》,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이 세 편의 영화에 호감을 느낀다. 특히 "한 명이 행복하면 다른 한 명은 슬프다. 그것이 감정의 공식이다."라는 멋진 아포리즘으로 소개한 《애프터 미드나잇》은 조만간 DVD 타이틀로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필연적 충동을 발산케 한 작품이다. 

  영화감독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 공감된다. 영화라는 장르에서는 '감독'이라는 존재를 되도록 믿는다는 것이 저자의 철학이다. 영화는 연극과는 다른 메커니즘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감독의 예술이다. 조악한 시나리오가 감독을 잘 만나서 빛났던 경우와 허접 배우가 좋은 감독을 만나서 연기의 달인이 된 경우를 나는 수없이 목도했다. 한 작품에 대한 절대적 전권을 휘두르는 감독이라는 존재가 영화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좋은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명제에 나는 온전히 동의한다. 

  왕가위 감독에 대한 농밀한 견해를 밝힌 부분도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저자는 왕가위 감독의 매니아임을 언급한 뒤, 그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전 작품을 관통하면서 설명한다. 나 또한 왕가위를 좋아하기에 왕가위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순차적 영화 관람 순서는 솔깃했다. 〈중경상림〉 -> 〈타락천사〉 -> 〈아비정전〉 -> 〈화양연화〉 -> 〈2046〉 -> 〈열혈남아〉 -> 〈동사서독〉 -> 〈해피 투게더〉의 순으로 볼 것을 권장하고 있다. 돌아오는 주말 시간을 이용하여 저자가 제시한 순서대로의 왕가위의 작품 세계를 재천착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발동되기도 한다. 

  만약 이 한 권의 영화 에세이가 영화 이론이나 영화평 등의 영화에 대한 사실적 설명에 국한된 내용으로만 일관했다면 그리 좋은 느낌으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깊이있는 삶의 통찰을 이끌어내는 관찰력, 자신의 고백적 이야기의 투영, 사랑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적절한 참고 설명 등이 잘 조합된 균형있는 에세이기에 마지막까지 호의 감정으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저자가 직접 기록하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 메모장은 이 책의 조리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와 예술의 주제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로 귀결된다. 책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며, 영화 속에서 인간을 성찰하고, 여행 가운데 인간을 천착하는 작업이 내게는 카타르시스이자 페이소스로 해석된다. 앞으로도 페페의 필름통 속의 필름에는 다양한 인간 스펙트럼이 끊임없이 투영되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도 꾸준히 활자화되어 나같이 우매한 이들에게 앎과 지혜와 도전을 제공해주기를 고대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