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변증
김기호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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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질문을 두려워하는 교회

청년부 부장을 맡은 지 몇 해가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여러 이유를 지켜봐 왔다. 학업과 취업, 관계의 피로, 신앙의 권태 등 원인은 다양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유독 눈에 밟히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질문하는 것을 싫어하는 교회 문화'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익숙한 세대다. 근거를 묻고 논증을 요구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체화된 세대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오래된 권위와 질서의 문법은 이 질문 자체를 불경하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은 순종이지 논쟁이 아니다"라는 익숙한 문장으로 질문을 서둘러 봉합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불편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교회에게 세상과 단절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도 바울은 아덴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이방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그는 그들의 시인을 인용했고 그들의 논리 위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다. 그리고 소통이란 예의와 실력을 함께 요구하는 행위다. 예의만 있고 실력이 없으면 답변은 공허해지고, 실력만 있고 예의가 없으면 소통은 폭력이 된다. 나는 이 균형 잡힌 소통의 실력을 '변증(辨證, Apologetics)'이라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웠다.

물론 변증이 정답은 아니다. 인간의 논증으로 사람을 회심시킬 수 있다는 오만은 개혁주의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하지만 변증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서 무용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변증은 회심의 원인이 아니라 회심의 장애물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세상 친구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려면 성경과 교리라는 뼈대 위에 과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살로 붙어야 한다. 이 균형 잡힌 실력을 갖춘 책을 최근 만났다. 김기호의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변증』이다.

⑴ 변증이라는 이름의 성실함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다루는 이슈의 폭에 있다.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기적, 부활, 칼람 우주론, 유신진화론까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논쟁적 전선을 한 권 안에 촘촘히 배치했다. 저자는 단순히 성경 구절을 나열하며 정답을 선포하지 않는다. 각 이슈마다 상식과 이성의 층위를 먼저 통과시킨 뒤 성경의 진리를 겹쳐 놓는 방식을 택한다. 이 이중 구조가 이 책을 설득력 있게 만드는 동시에 은혜롭게 만든다. 논증은 차갑지 않고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다.

변증학에는 오랜 계보가 있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적 전통도 있고, C. S. 루이스의 문학적 변증도 있고,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도 있다. 이 책은 그 어느 한 학파에 온전히 투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슈마다 유연하게 무기를 바꿔 든다. 과학의 영토에서는 과학의 언어로, 철학의 영토에서는 철학의 언어로 응수한다. 이런 유연함은 자칫 산만함으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저자는 매 챕터를 성경적 진리로 다시 수렴시키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⑵ 유신진화론이라는 뇌관 — 존 스토트, 톰 라이트, 팀 켈러를 넘어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문 챕터는 유신진화론이었다. 나는 최근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존 스토트, 톰 라이트, 팀 켈러와 같이 내가 좋아했던 저명한 신학자들이 어째서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궁금증의 절반은 풀렸고 나머지 절반은 오히려 경계심으로 바뀌었다.

유신진화론은 흔히 "하나님이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온건한 문장으로 소개된다. 이 정도라면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신앙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이 정확히 짚어내듯 문제의 핵심은 창조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 아담'의 존재 여부에 있다. 진화의 점진적 과정 안에서는 단 한 사람에게서 인류 전체가 유전적으로 발원했다는 명제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담은 역사적 개인이 아니라 문학적 상징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창세기를 넘어선다.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그리스도)을 언약적 대표성의 구조로 정확히 병치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이 역사적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라면, 이 병치 구조는 절반이 무너진다. 그리고 절반이 무너진 구조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곧 둘째 아담의 언약적 순종이라는 복음의 심장부까지 흔들게 된다. 유신진화론은 그러므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구원받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훨씬 더 무서운 논리다.

존 스토트와 톰 라이트와 팀 켈러가 이 위험을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은 과학적 정직성과 성경적 권위 사이에서 자신들 나름의 균형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학문적 정직함을 존중한다. 하지만 존중과 동의는 다른 문제다. 이 책이 제시하는 대로 역사적 아담을 견고히 붙드는 것은 단순한 창조과학적 고집이 아니라 복음의 언약적 구조를 지키는 최전선의 문제다. 이 챕터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값을 한다.

⑶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물러설 수 없는 배타성

종교다원주의를 다룬 챕터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각 종교의 기본 로직, 즉 구원론의 내적 구조를 하나씩 해부한다. 불교의 자력적 해탈, 이슬람의 율법적 순종, 힌두교의 윤회적 업보. 이들은 저마다 정교한 체계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구원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한계와 모순을 이 책은 정확히 짚어낸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궤도 위에 있다.

이 챕터를 읽으며 나는 이 이슈가 결코 신학교 세미나실에나 어울리는 관념적 사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국내 장로교 교단 하나가 갈라질 만큼 무겁고 실제적인 문제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명제, 곧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를 붙드는 일은 편협함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정체성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관용이 미덕인 시대에 배타성을 말하는 일은 불편하다. 그러나 진리는 애초에 다수결이나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이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정직함이 고맙다.

⑷ 도킨스의 시대, 그리고 응답하는 신앙

지금 세계는 유물론자와 무신론자의 사상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시대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유발 하라리. 이들은 저마다의 달변과 베스트셀러를 무기로 기독교를 조롱해왔다. 그들의 저작은 서점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대중의 지성을 대변하는 목소리처럼 행세한다. 반면 교회는 그 조롱 앞에서 침묵하거나, 침묵할 수 없을 때는 감정적으로 격앙되곤 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방어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적 태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진짜 필요한 것은 탄탄한 변증력이다. 도킨스의 논증이 왜 허술한지, 하라리의 역사 해석이 어디서 전제를 슬쩍 바꿔치는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실력 말이다. 신앙은 겁먹을 필요가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의 저 유명한 권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준비'를 위한 실용적 병기고다.

에필로그 : 깊이보다 폭이 필요한 시대

솔직히 말하겠다. 이 책이 다루는 각 이슈의 깊이는 전문 신학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칼람 우주론 하나만 해도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의 저작들이 훨씬 정교하고, 유신진화론 논쟁도 각 잡고 파고들면 수백 페이지의 전문서가 따로 필요한 주제다. 이 책의 정직한 한계다. 나는 이 한계를 굳이 숨기고 싶지 않다. 깊이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편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 이슈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정도의 균형 잡힌 지도(地圖)다. 이 책이 다루는 정도의 지형만 익혀도 청년은 대학 강의실에서, 직장 동료 앞에서, 그리고 스스로의 회의(懷疑)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최소한의 근력을 갖추게 된다. 넓은 지도가 있어야 비로소 깊이 파고들 지점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입문서라기보다 나침반에 가깝다.

청년부를 맡으며 나는 매번 확인한다. 청년들은 순진한 확신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직한 답변을 원한다. 질문을 억누르는 교회에는 남지 않지만,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는 교회에는 남는다. 나는 이 책을 청년들의 손에 쥐여주고 싶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 책이 열어놓은 문 하나하나를 더 깊이 걸어 들어가려 한다. 질문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이미 죽은 신앙이다. 질문에 응답하는 신앙만이 다음 세대에게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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