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의 걸음은 세 가지다. 미래는 머뭇거리며 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의 말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속도가 각기 다름을 알려주는 명언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정지해 있는 과거에 얽매여서 화살처럼 날아가는 현재를 낭비하고 있는가?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삶의 초점을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시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그렇다치더라도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급변하는 인류의 변화가운데 미래를 가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 희망 또한 있다. 적어도 나의 미래만큼은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있다. 머뭇거리면서 오는 미래를 최대한 현재로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은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미래는 상상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놀라운 상상력으로 독자들에게 흥미와 즐거움을 주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파피용』을 읽었다. 이미 출간 전에 거대한 우주선을 만들어 태양계 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라는 것을 가볍게 접했던 터라 평소 SF공상과학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기다림의 인내가 발동되기도 했다. 출간 후 일찍 읽은 이들의 서평을 보면 여러가지 다양한 목소리로 평가되고 있는 듯 하다. '베르베르의 놀라운 상상력과 인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라며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추락하는 베르베르에게 과연 날개는 없는 것인가?'라며 조소 섞인 강렬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작에 대한 평가는 춘추전국이다. 

  2광년의 여행 거리, 500m 직경과 32Km 길이의 우주선, 네온광선으로 만들어진 120개의 인공태양, 14만4천명의 탑승객, 1251년의 여행기간 등의 거대한 스케일로 중무장한 소설 『파피용』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심한 이기주의와 양극화 현상, 전쟁과 테러의 연속, 환경오염으로 멍들어 회복 불가능 상태로 황폐화된 지구에 희망이 없음을 인식하여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하지만 너무나도 먼 또 다른 태양계로 우주여행을 떠난다는 줄거리다. 항공 우주국 팀장인 이브 크라메르, 요트 일주 세계 챔피언 엘리자베트 말로리, 억 만 장자 가브리엘 맥 나마라, 그리고 생태 심리학자 아드리앵 바이스는 20조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14만4천명의 탑승객을 태워 1,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여행하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최인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지구를 출발하여 목적지인 행성을 향해 여행하면서 우주선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과 인간상들에 대한 묘사,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베르베르표 브랜드의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소설의 이야기 흐름 속도는 처음에는 느릿느릿하다가 중반에서 어느 정도 속도가 붙고 후반에 펼쳐지는 여행 2세대들의 이야기부터는 급속도로 질주한기 시작한다. 1세대들이 전부 죽고 2세대들의 삶에서부터 1,200여년이 지나 여행의 목적지이자 소설의 종착역인 다른 태양계의 어느 행성에 도착하기까지 엄청난 시간의 속도로 독자들을 밀어부치고 있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성경 속에서 소설의 재료를 많이 찾은 것으로 보인다. 14만4천이라는 숫자, 아담과 이브의 명칭, 갈비뼈를 취함, 뱀의 공격, 파피용호의 방주적 성격 등은 곧바로 성경과 연계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더이상 신선하거나 흥미롭지 못하다. 오히려 소설 뒷 부분에서의 어설픈 성경냄새의 표현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 잘 나가다가 초를 친 격이 아닌가 할 정도의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기독교도인 내 자신의 개인적 민감성의 발동일 수 있으니 이 부분은 각설키로 하자.

  베르베르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을 통찰하고 있다.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이성적이며 이타심이 많은 사람들을 고르고 골라서 뽑은 14만4천명도 인간 본성의 악한 경향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파피용호에서 일어나는 권력 암투와 살인, 집단적 광기와 무질서 등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만큼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존재도 없는 듯 싶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함이나 부모형제간의 이익 다툼, 온갖 거짓과 이기심, 그리고 그 잔인성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발전과 동시에 법과 제도도 발전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태생적 악함과 무질서함에 대한 인간의 자기통제의 산물이었음을 입증한다. 

  1251년의 시간을 지나 도착한 또 다른 공간은 어떤 곳일까? 읽는 내내 마지막 장면에 대한 호기심이 적지 않았기에 파피용호의 비행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거대한 여행의 목적이자 이 소설의 종지부인 마지막 행성의 존재와 파피용호에서 살아 남은 최후 2인의 모습은 허탈함 그 자체였다. 파피용호의 부제가 무엇이었던가? '마지막 희망'이 아니었던가? '종교적 광신, 원자폭탄, 인구 포화, 전쟁과 기아, 환경오염, 전쟁과 테러, 자본주의의 폐해, 이기주의의 팽배' 등의 고장난 지구를 철저하게 버리고 '마지막 희망'을 찾아 1200여년간 수십세대의 교체를 이뤄가면서 도착한 그 곳.. 그리고 최후 2인의 그 곳에서의 삶의 또 다른 시작.. 허무함이 밀려 온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외면하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고장난 지구를 극복하여 영원히 평화롭고 행복한 고장나지 않는 지구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예전 지구에서의 암울한 황폐화가 또 다시 재현되지는 않을까? 꿈과 희망을 찾아 나서는 『파피용』호가 계속해서 수없이 발사된다 하더라도 새롭게 건설될 행복한 지구의 영원함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비단 나만이 갖는 걸까?

  시선을 1251년 전의 현재의 지구로 다시 돌려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생각만큼 나쁜 행성이 아니다. 태양계 안에서 철저히 계산된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이 자그만 행성은 66억의 인류가 행복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 즉 인간이다. 태초에 나쁠 것이 전혀 없던 지구가 점점 오염되고 살기 힘들어지며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그 중심선상에 바로 인간이 있다. 그렇기에 '마지막 희망'은 다른 태양계로의 도피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굳이 32Km의 우주선을 만들거나 1251년의 여행을 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변화될 수 있다. 인류 하나하나가 이기심과 거짓, 권력욕과 질투심을 버리고 자연에 대한 겸손, 사랑과 관용, 믿음과 이타심을 충만하게 가지고 살아갈 때에 더 이상 다른 태양계로 떠날 이유와 명분이 없어질 것이다.  『파피용』은 바로 그러한 인류의 위치와 숙제를 역설적으로나마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꿈을 꾸고 상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현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바른 인식이 건전하고 올바른 꿈과 상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나쁘지 않으며 굳이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업보 뿐이다. 인류가 변할 때, 즉 내 자신이 변할 때에 지구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할 때, 더 나아가 바로 지금 이 시간을 인식하고 있다면 더욱 희망이 있다. 미래는 머뭇거리면서 다가오지만 현재는 화살같이 날라가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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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hw0221 2007-08-23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친구가 추천해서 보긴했지만 현실도피적인 발상이 맘에 안들었습니다.
현실을 지구상의 모습을 너무 과장해서 악하고 추하게 표현한것은 아닌지..
내용전개에 있어서 억지스러운 면도 많이 보이고요..
어쨌든 상상만으로 이런 책을 냈다는 것이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