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도 학생회 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그 해 추석즈음에 학생회 전도사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다. 당시 받자마자 가벼운 통독으로 읽긴 했지만 읽은 후 머리 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깊이 있는 내용인 만큼 읽는 이의 자세에도 깊이가 있어야 했는데 그저 문자만 주욱 훑은 것이 원인이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책장 한구석에 꼽혀 있던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고 주말을 기회삼아 재차 읽을 수 있었다.
 

 신학의 대학자가 쓰신 책 답게 평범한 여느 기독도서들과는 상당한 무게감의 차이를 느꼈다. 당시 전도사님께서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라면서 책을 건넸고, 저자인 김세윤교수님 또한 머리말에서 평신도들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전제했지만 썩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어휘나 학구적인 용어에 있어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독교의 핵심을 풀어가는 데 있어 그 깊이와 무게감이 장중했다는 뜻이다. 여하튼 내 자신의 부족한 신학적 소양은 차치하고 책의 내용을 언급해 보자.

 

 김세윤교수님은 복음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에 직면해 있음을 주지시킨 뒤 예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의 차이를 지적하며 이 두가지 차이를 시작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 데 비해 예수님 사후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면서 사도들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복음에 어떻게 연장되는 지를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깊이 있는 대학자의 접근이기 때문에 내 사견을 붙이는 것보다 책 내용을 발췌정리하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하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상속자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초대한 것이다. 또한 예수의 죽음은 그 약속을 성취하여 실제로 우리를 죄가 씻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바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의도에 있어 그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켜 그의 이러한 가르침과 주장을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관심의 초점은 당연히 예수의 약속보다 그의 죽음으로 그런 약속을 성취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부활 이후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예수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성취하신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의 선포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항상 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그의 메시아로서의 구원의 행위의 중심이고, 그러기에 사도들의 선포의 초점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복음 선포의 초점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부활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약속과 그의 죽음을 통한 그 약속의 성취,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한 그 성취의 확인. 이 세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상호간 해석을 도와준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같은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돌 구원을 향하여 가면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그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도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이미 성취된 그 구원을 되돌아보며 선포했기 때문이다. 즉 관점의 차이 또는 구원사적 시점의 차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단의 신착에 의해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고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모든 민족들 위에 군림하게 하는 메시아를 기대했다. 즉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정의와 평화, 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그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지 않았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지도 않았다.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는 그의 죽음이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드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이 되게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한 것, 즉 하나님의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한 것, 바로 그것이 예수가 가져온 구원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말론적인 유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이 이미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죽음으로 죄 문제에 대한 결정적 해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부활로 오는 세대 또는 하나님 나라의 신적 생명(영생)이 죽음을 꺾고 이 세상에 결정적으로 침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사단에 대한 결정적 승리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죽음의 현상들인 질병들을 하나님의 영(성령)의 힘으로 치유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를 시위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가 사단의 죽음의 통치를 확실히 꺾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죄와 죽음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 있는 자들이 죄와 죽음이 없는 신적 생명을 누리는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와서 그의 구원을 완성할 때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벌써 덕입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얻게 될 그 완성된 구원의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 첫 열매는 지금 하나님의 영(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들에게 치유를 가져오며 그 힘을 발휘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 열매를 얻고 체험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에 그 구원을 총체적으로 수확할 것을 바라 볼 수 있으며, 지금의 첫 열매를 그 완성된 구원에 대한 보증금으로 여기고 확신 가운데서 소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벌써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것의 완성을 받으라고 권고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로우심/은혜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안도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석에 서야 함을 늘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의 자세로 의인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이 두 측면들이 서로 논리적 긴장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창조 전부터 존재하며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하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하나님의 초월에서 이 내재(세상) 속으로 보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초월의 힘을 가지고 이 내재 속에 계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성을 보여줄(계시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실행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의 언어로 복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마 요한복음 3:16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종자(獨種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필자의 사역).

 

이 복음을 믿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생을 얻으라!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의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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