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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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시민의 책을 즐겨 읽는다. 잘 알다시피 나는 그의 정견 대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을 탐독하는 건 그의 말과 글이 논리와 재미 면에서 대중을 압도하는 그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유시민만큼 지식을 언어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대중과 잘 호흡하고 전달 능력이 탁월한 지식인이 흔한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지식은 더 단단하고 입체적으로 확장된다. 반대자의 탄탄한 논설은 미처 생각지 못한 내 견해 너머에 있는 곳을 바라보게 해준다. 내가 유물론자이자 진보주의자이며 진화론자인 유시민을 '어색하게' 좋아하는 이유다.

유시민의 신간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흥미로운 책이다. 제목 그대로 문과 출신인 저자가 자신의 비전문 분야인 과학을 다루었다. 여태까지 많은 책을 집필해왔지만 과학 관련 책은 단 한 권도 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과학 이야기를 들고나온 건 순전히 아내 한경혜 박사 덕분이다. 자신의 유튜브 도서 비평 방송 '알릴레오 북스'를 소재로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수학사를 전공한 아내가 중간에 조정하여 기획하게 된 것이라고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서문부터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에 불과하다고 안전장치를 깔아두는 저자의 너스레가 요란하다.

이 책은 크게 여섯 장으로 나누어 과학을 얘기한다. 첫 번째 장에서는 인문학과 과학의 차이를 설명하고 이후 각 장마다 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을 순서대로 소개한다. 각 파트별 과학 분야의 개념이 설명될 때는 지루함과 난해함이 교차되는 것 같다가도 저자의 언어로 해석과 리뷰가 가미될 때는 흥미롭게 읽힌다. 과거 『청춘의 독서』에서 여러 고전을 소개했던 것처럼 여러 과학의 법칙과 뒷이야기를 저자의 시각으로 리뷰했다. 저자 특유의 입담이 글에도 잘 녹아 있어 독자를 과학의 세계로 촉촉이 견인한다.

초반부터 흥미롭다. 2장 '나는 무엇인가'에서 뇌과학을 다루며 칸트를 소개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나에게도 칸트 철학은 도저히 범접하기 힘들었던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명저라고 불리는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려다가 몇 장 넘기다 책장을 덮은 기억이 수도 없다. 저자도 그랬던 듯하다. 저자는 칸트의 난해성에 대해 문장은 철학적인데 내용은 과학적이라는 데서 찾는다. 『순수이성비판』 서론부터 물리학·기하학·대수학·생물학 용어가 출몰하고 본론 '선험적 원리론'에서 감성·직관·개념·감각 등의 개념이 과학적 용어와 뒤섞여 독자를 곤욕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칸트의 인식론을 양자역학에 대입해 풀이하기도 한다. 결국 (과학적이진 않았지만) 칸트가 옳았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화학을 다룬 4장이다. 최근 환경과 기후 문제로 이슈가 된 탄소에 대해 저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탄소의 변호인(?)을 자처한다. 다들 탄소를 비난하고 미디어에서 탄소 때문에 인류가 망할 것처럼 얘기하는데 실제로 이는 탄소에 대한 지나친 혹평이라고 탄소를 대변한다. 탄소야말로 화학적으로 유능한 '중도(中道)'라는 것이다. 탄소에 대한 저자의 변론을 정리하면 이렇다. 탄소가 중도라는 건 원자번호 6번으로 주기율표 왼쪽 오른쪽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전자를 공유할 기회가 오면 거부하지 않지만 남의 전자를 함부로 탐하지 않는다. 원자핵과 전자가 비교적 가까이 있어서 잘 깨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지도 않다. 모든 면에서 어중간하다. 바로 이런 성격(성질) 때문에 탄소는 생명 탄생의 주역이 된 것이다.

저자의 강력한 변호가 기후 위기의 주요 원인이 탄소라는 사실 자체를 전복하지는 못한다. 다만 저자가 서술했듯이 탄소가 새로 생겨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지구에 존재했었으나 다른 곳에 다른 형태로 있던 게 풀려나 산소·수소와 결합한 탓에 기후 위기가 생긴 것이다. 전 세계적인 탄소 규제 및 동결 정책의 핵심은 탄소가 산소와 수소와 결합하지 않도록 최대한 줄이고 주의하자는 메커니즘이다. 지구에 석유가 남아도는데도 전기 자동차로 인간의 이동 수단이 바뀌어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기 배터리와 자율주행을 위한 AI, 반도체 기술의 도약적인 발전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 패권의 구조적 변화 등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탄소의 중용의 도(道)를 알고 난 후 숯불에 고기를 굽다가 손과 얼굴에 검댕이 묻어도 예전처럼 닦아내지 않고, 어두운 자기 피부색에 대한 불만도 줄었다고 하는 저자의 너스레는 흥미를 넘어 코믹하기까지 하다.

뒷부분에는 물리학과 수학을 다룬다. 물리학을 다룬 5장에서는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엔트로피 법칙, 빅뱅 등을 일반 독자의 수준에서 쉽게 정리했다. 양자역학을 불교와의 유사점으로 풀이하고 과거 청년 때 열심히 공부했던 유물변증법에 대입한 대목은 무척 흥미롭다. 거대하고 복잡한 과학 이론을 대하는 저자의 지적 겸양이 이번 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저자의 겸손함은 "모르는 것에는 침묵하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을 상기시킨다. 마지막 6장에서는 몹시 아름답지만 오직 천재들의 영역일 수밖에 없는 수학에 대해 할애했다.

서평을 마무리하면 이 책은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읽기에는 적절치 않을 듯하다. 저자 스스로 '바보를 겨우 면한 자의 무모한 도전'이라 표현할 정도로 겸양을 떨기는 했으나 실제로 과학의 각 분야에 대해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과학 전공자나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독자에게는 심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부담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저자의 강점인 인문학 잡담이 가미된 건 덤이다.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독서, 여행에 이어 과학에까지 글쓰기의 외연을 넓혀가는 작가 유시민의 '확장'을 지지한다. 그의 말과 글은 언제나 여전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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