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다 가을하다
최상규.최종현.최훈 지음 / 나다운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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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도 인상적이지만 아버지와 두 아들이 함께 썼다는 점에서 솔깃했다. 심리학·사회학적으로 아버지와 아들만큼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는 없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에서 말을 따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명명했다. 폴 비츠는 명저 『무신론의 심리학』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신(神)에 대한 스탠스를 결정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만만치가 않다. 그렇기에 부자간 함께 글을 써 책으로 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고민하다 가을하다』는 저자가 두 아들과 함께 쓴 에세이다. 첫째 아들이 쓰기에 동참했고 둘째 아들은 그림으로 동역했다. 저자의 아내는 글을 선정하고 심사하는 것을 도왔다. 즉 네 가족이 모두 공저자인 셈이다. 책 출간의 동기가 인상적인데 사연은 이렇다. 저자ㅡ이글에선 편의상 공저자 중 아버지 최상규 씨를 '저자'로 칭하겠음ㅡ의 첫째 아들이 대학 논문 심사가 통과되지 않아 크게 낙심 중이었다. 그런 아들에게 저자는 "생각도 정리할 겸 함께 글이나 써 볼까" 건넨다. 아들이 선뜻 응했고 그렇게 해서 100일간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100일이 지난 뒤 이들은 서로 성장해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그렇게 쓰였다.

책 분류상 이 책은 명징한 에세이다. 책 곳곳에 저자의 생각과 고민이 잘 담겨 있다. 글쓰기에 대한 철학을 말하기도 하고 바퀴벌레를 묵상(?)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친구와 있었던 일을 소환되기도 하고 아버지(구순九旬이 넘은 저자의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름의 여행 철학을 주장하기도 하고 몇몇 시와 노래를 소개하며 자신을 주관을 얹기도 한다. 죽음, 증오, 사랑, 용서, 배려 등의 인간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진지하게 탐색하기도 한다. 구석구석 인용된 고전(古典)의 명문장과 철학자의 말은 평소 저자가 얼마나 폭넓은 독서를 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란 소제목의 글이다. 대중가요 두 곡의 가사를 인용하며 '다행'과 '행복' 사이의 방정식을 추출하는 저자의 시각이 흥미롭다. 이적의 <다행이다>와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 사이에서 상치된 개념으로서의 '다행'의 의미를 탐구한다. 저자의 해석으로는 이적의 곡이 죽도록 행복하다는 의미에서의 다행을 노래했다면 장기하의 곡은 '남의 고행'과 연결된 다행을 노래했다. 그러면서 '나의 다행'이 '그의 다행'이 되는 행복한 세상을 소망한다. 최종적으로 구십이 넘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런 세상은 오직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짚어낸다. 즉 저자는 사랑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유행가 가사와 아버지의 일례를 통해 궁구한 것이다. 저자의 통찰력에 고개가 주억거린다.

책 곳곳에 자주 인용된 성경 구절은 저자의 신분을 암시한다. 책에서 직접 드러냈듯이 저자의 직업은 개신교 목사다. 수년 전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저자를 잘 알고 있다. 오래전 저자가 우리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유독 책을 좋아했던 저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어느 교역자보다 차분하고 성실했던 저자가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조금 놀랐다. 기독교가 '개독'으로 불리는 작금의 시대에 교회를 개척한다는 건 그 자체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저자의 용단과 뚝심이 텍스트 곳곳에도 잘 묻어 있어 포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개척예배 때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이 서평은 그 부채감에 대한 뒤늦은 피드백이다. 저자의 목회와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책을 덮은 후 도전이 하나 생겼다. 언젠가 나도 딸과 함께 책 한 권 내보는 것이다. 지난 십수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다른 건 몰라도 책읽기와 글쓰기만은 자녀에게 흘러내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왔다. 고백하건대 천성이 빠르고 직관적인 나에게 글쓰기는 느린 속도와 신중함을 함양해 주었다. 때에 따라서는 말보다 글이 더 힘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책 서두에 언급됐듯이 글쓰기야말로 평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낯설게 보고 소중하게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올곧은 지름길이다. 그런 차원에서 두 아들과 함께 글을 쓰고 함께 생각을 정리한 저자의 시도는 두 딸을 키우는 나에게 큰 영감을 준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정확히 말해 글을 써본 사람만이 아는 게 있다. 글쓰기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글을 쓴다는 건 인간 사유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노곤한 작업이다. 무의미한 생각의 관성과 의식의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위다. 단언하건대 글쓰기는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역행한다. 흐트러진 걸 모으는 것이고 지저분한 것을 정리하는 것이다. 모든 필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자기 생각을 적확하게 담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분투한다.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끊임없이 잘라낸다.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아 애써 써 내려간 텍스트를 휴지통에 집어넣기도 한다. 깎아내고 또 깎아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인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신성하다.

서평을 정리하자. 저자 최상규의 『고민하다 가을하다』는 세 부자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한 내용을 담은 고민 회복 에세이다. 모 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 중인 저자의 현재적 고민과 생각이 잘 담겼다. 언제나 지인이 출간한 책을 읽을 때면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있다. 이 묘한 긴장감과 전술한 바 있는 저자가 준 강력한 도전이 잘 포개어진 따뜻한 독서였다. 특히 아들이 있는 분에게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http://blog.naver.com/gil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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