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산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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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정통 기독교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다. 십수 년 전 블로그를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이 하나 있었다. 종교와 정치 색채를 최대한 배제할 것을 다짐했다. 건전한 토론을 넘어선 지나친 비방과 무의미한 논쟁을 조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철저히 내 소양 부족이었다. 오히려 몇몇 글에서 종교적 색채를 지나치게 드러냄으로써 비기독교인 이웃들에게 거부감을 준 적도 적지 않았다. 서두에 반성스럽게 고백하곤 있으나 여하튼 나는 분명한 기독교인이다. 글이란 필자의 생각과 이념, 철학과 신념을 뼈대로 하기 때문에 글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성을 완벽히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자 한다.

기도의 용사를 어머니로 둔 덕분에 어려서부터 찬양 부르고 성경 읽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즐겨 부른 찬송가 중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는 곡이 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찬송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곡의 2절에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라는 가사가 있다. 성경을 잘 모르던 어렸을 적에는 '엘리야는 어떤 사람이길래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나'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봤지만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위대한 선지자란다"라는 난해한 답변뿐이었다. 훗날 성경을 읽고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한 이후에서야 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았다. 그때까지 엘리야는 항시 나에게 찬송가 가사로 귀에 맴돌던 인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외 작가 중 하나인 파울로 코엘료의 신간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다섯번째 산』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다룬 코엘료의 장편소설이다. 이미 오래전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영어판 중역의 어색함과 번역 오류 탓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이에 문학동네 출판사를 통해 포르투갈 원전으로 재번역된 것이다. 최근 구약사를 머릿속에 재정리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열심히 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선지자로 꼽히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난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자 짜릿한 흥분이었다. 이에 단번에 책을 주문했고 한달음에 완독했다.

전술한 대로 소설의 주인공은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다. 성경의 이야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했다. 구약 《열왕기상》 17~18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했다. '모세오경'과 신약 《마태복음》의 몇몇 구절이 곳곳에 인용됐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가적 상상력이 주를 이루고 있어 조심스럽게 읽히기도 하지만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와 한계를 코엘료 특유의 아름다운 묘사로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작가적 상상력이 인간 엘리야를 보다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성경의 중요한 맥락을 훼손하지 않기에 중심만 잡고 읽으면 은혜롭기까지 하다.

소설의 시점은 BC 9세기 초 이스라엘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시돈 땅 사렙타(사르밧) 지역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는데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아합 왕이 다스린 시대였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국제결혼을 해서 유일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라는 페니키아의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신(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이스라엘에 오랜 기간의 가뭄을 예고했다. 이에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려 수배 중이었다. 가뭄 기간 동안 크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건네주는 먹이를 먹으며 삶을 연명하던 엘리야에게 신의 음성이 도착한다.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집으로 이동할 것을. 바로 거기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교회를 다닌 사람 중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르밧에 살고 있던 과부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근의 때를 이기고 자신의 아들까지 죽음에서 살아나는 복을 받은 이야기는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었다. 작가 코엘료는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 바깥에서 꾸며낸 인간 엘리야의 모습을 보태고 만들었다. 훗날 850명의 이방신 예언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인 그도 신을 의심하고 한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작가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꾸며내고 그려냈다. 

소설 속 엘리야의 고민은 극한 시련에 관한 인간적 사유다. 소설은 종교적 색채가 최대한 배제되었다. 시련을 통과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엘리야의 존재론적 번민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 있다. 작가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관, 신념,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상에 주목했다. 시련 자체는 인간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시련은 언젠가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다. 시련을 겪어낸 인간은 스스로를 일으키는 법을 배운다. 위기의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보편적이고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다. 이를 깨달을 때쯤 주의 천사가 다시 나타나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소설은 그다음에 있을 일, 즉 선지자로서 엘리야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극적이며 강력한 사건 직전에 이야기를 끝맺는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엘리야가 얼마나 고독하고 거대한 싸움을 했는지.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인 숭배자들과 맞짱을 떠 승리하는 기적과 그 일이 끝난 후 빗속을 질주하여 왕의 마차를 추월하는 모습은 과히 압권이다. 어떻게 기도하면 엘리야처럼 장대비 속을 달리는 감격을 누릴 수 있을까. 여름철 장마가 쏟아질 때마다 밖에 나가 전력 질주를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엘리야다. 그런 엘리야조차 영적 침체기가 있었고 로뎀나무 밑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신세가 된다. 시내산 동굴에서 신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까지 엘리야의 엘리야스럽지 않은 모습은 갈멜산 대결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선지자조차도 한낱 보통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소설 『다섯번째 산』은 엘리야의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신의 은총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끌어낸다. 작가의 연금술이 놀랍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 각 시대적 배경에서 신의 뜻에 따라 신에게 소명 받은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은혜롭고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 인간으로서 신의 소명 앞에 얼마나 거대한 고독과 번민이 있을지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가나안 땅 코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고 생을 마감한 모세, 자식의 쿠데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 왕, 죽으면 죽으리라는 뚝심으로 목숨 걸고 왕 앞에 나아간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본 베드로 등등 성경에는 신의 역사를 이루는 과정에서 귀중히 쓰임을 받은 위대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기적의 클라이맥스와 막전 막후의 고비 때마다 그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들의 외모는 어떠했고 성격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들의 MBTI는. 엉뚱하지만 궁금하다.

소설이 전하는 위로의 결을 생각할 때 재번역(재출간)의 타이밍은 시의적절하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다. 21세기 근래에는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전염병 탓으로 먹지 못했고 가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고 자영업자들은 팔지 못했다. 심지어 6.25 전쟁 때도 닫지 않았던 교회 문을 닫기도 했다. 이제 좀 빠져나오는가 했더니 바이러스는 여전히 생동하여 우리 삶의 반경을 옥죄고 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련이나 아픔은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견디어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눈부시다. 견디어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견디기 위해 이기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기에 가는 것이다. 소설 『다섯번째 산』은 이 웅숭깊은 메시지를 신의 대리자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라는 픽션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 준다.

서평을 정리하자. 코엘료의 장편소설 『다섯번째 산』은 인간적이되 신성하고 지엽적이되 국제적인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실감나게 관통하고 있다. 종이의 발명, 알파벳의 기원, 무역로 등 당시의 역사와 종교, 정치,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선지자의 전형' 엘리야의 강렬한 인간적 고뇌는 3천 년이란 시간을 넘어 우리의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감동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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