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이야기'는 인류의 문화 역량을 몇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매개체다.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정을 추슬러왔다. 또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와 타자를 연결시켰다. 개인과 세계를 확대시켰다. 여기에 인간이 직접 흉내 내는 액션이 더해질 때면 더욱 다채로운 조화요 무대요 세계가 되었다. 인류 문화사는 말에서 글로, 글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음악이 입혀짐으로, 영화 외 다양한 영상문화로 진보해왔다. 이 진보 선상에 뮤지컬(musical)이란 매혹적인 장르가 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조예가 부족하다. 대개 책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의 일부분과 가스펠(gospel) 정도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도 소설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내 기호는 그대로 우리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른 집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뮤지컬과 공연을 즐겨 관람한 것에 무감했다. 뮤지컬에 무지한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채감을 안고 금번 설 연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아이들과 뮤지컬 무대를 찾았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순전히 아이들과 함께 보기 위해 선택한 공연이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아야 했고 어렵거나 자극적이지 않았야 했다. 그렇다고 유치해서는 안 됐다. 지루한 것은 절대 불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이러한 내 입맛에 완벽히 부합한 뮤지컬이다. 쉽고 재미있고 가족적이며 감동까지 갖추었다. 뮤지컬이란 장르가 갖추어야 할 기술적·구조적·음악적 수준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화로 잘 알려진 내용을 뮤지컬은 더욱 단순하게 축약시켰다. 러시아 대표 가족 뮤지컬을 국내 제작진이 재창작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어떻게 장화를 신게 됐는지, 왜 주인을 돕게 됐는지, 동화 이면의 이야기를 담았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가난한 제분소의 아들로 태어난 장 피에르는 착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인물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빚독촉에 시달리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유산)은 고양이 샤샤밖에 없다. 샤샤는 주인 장 피에르에게 장화를 선물로 주면 자신이 호강시켜주겠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말이지만 장 피에르는 결국 고양이에게 장화를 내어준다. 그런데 믿기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된다. 장 피에르는 고양이 샤샤 덕분에 부귀영화와 사랑을 얻는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뻔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이 감동적인 건 쉴 새 없는 빠른 전개와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대부분 고양이들이다. 주인공 샤샤를 위시하여 출연하는 고양이는 전부 의인화되어 있는데 고양이의 세계와 인간 세상이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다. 왕과 영주를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리석고 탐심이 많은 것으로 묘사된 데 비해 고양이들은 지혜롭고 리더십 있는 군상으로 표현된다. 장 피에르와 에텐셀 공주를 이어주는 것도 고양이들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내면의 모습을 가진 고양이의 세계는 '동물-인간' 대비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사유하게 한다. 선함, 희생, 용기, 정직, 인내. 이런 것들 말이다.

음악적·기술적 역량 또한 이 뮤지컬이 가진 강점이다. 초대형 무대에서 펼쳐진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무대와 객석을 꽉 채우고도 남는 파워가 있다. 객석으로 수월하게 전달되는 대사와 음악은 집중력을 높인다. 출연진 19명의 합창도 많은 연습을 증명하듯 퀄리티 있는 하모니를 들려준다. 특히 고양이 샤샤 역을 맡은 배우 신선우의 가창은 인상적이다. 대사 전달력이 월등히 뛰어나고 쉴 새 없이 춤추며 연기하면서도 목이 잠기거나 음정이 불안하지 않다. 특히 초고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은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뮤지컬 말미 15분간 진행되는 스페셜 커튼콜은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가 가족 뮤지컬을 지향한다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사진 찍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출연진 대부분 객석으로 내려와 친절하게 응대한다. 관객의 다양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프로다움을 느낀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년간 공연업계 종사자들의 활력 있는 활동이 요원했다. 하루속히 실력 있고 프로다운 배우들이 무대에서 가감 없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생애 처음으로 아빠, 엄마와 뮤지컬을 관람한 초등학생 두 딸도 즐겁게 관람한 듯 보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극장이라면 치를 떠는 둘째 녀석도 정말 재미있었다며 호들갑이다. 두 아이의 눈빛에서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만끽한 여유와 기쁨을 발견한다. 벌써부터 다음 뮤지컬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 됐다. 문제는 오직 지갑뿐이다. 즐거운 고민이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서울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절찬 공연 중이다. 공연시간은 총 70분이며 인터미션은 없다. 주차는 무료(설 연휴 당시, 평일은 2,000원)다. 예매할 때 되도록 좌석을 2층보다 1층으로, 안쪽보다 통로 쪽으로 아이들을 배치하기를 추천한다. 15분 스페셜 커튼콜을 더욱 풍성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가족 뮤지컬로서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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