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리커버리 출간이나 기념 이벤트를 준비할 것으로 예측된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살짝 편승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조만간 다시 읽으려 계획 중이다. 전에 읽은 것과 다른 번역본을 찾았다. 현재 소장 중인 민음사판(김연경 교수 역)이 문제 있어서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가 다분히 찰지고 개성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는 것도 감상의 확장을 위해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게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판이다. 절판되진 않았지만 중고를 찾았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리커버리 출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번지르르한 새 책은 그때 구입하면 된다.

 

도스토옙스키 얘기로 글 문을 열었지만 실제 내 현재 관심사는 톨스토이다. 지금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손에 들고 있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을 걸쭉한 감동으로 읽은 나에게 그의 중·단편들은 또 다른 성격의 울림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뻑 간 나머지 서평을 어떻게 쓸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지금 읽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압권이다. 이에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기로 결심했다. 톨스토이 전작에 뛰어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다. 도스토옙스키 200주기를 맞이해 톨스토이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톨스토이에 대한 관심을 문의 받았다. 총 두 사람인데 교회의 협동목사님과 친동생처럼 지내는 회사 후배이다. 이에 그들에게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78편의 전작(全作)을 소화하는 게 가장 입체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효율과 압축을 위해 보통 3대 장편(『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을 꼽는 편이다. 3개 대작 중 앞선 두 개는 문학적·예술적인 면에서 단연 걸작으로 꼽히지만 뒤의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은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 소설을 정점으로 이후 작품들이 지나친 종교적 관점과 금욕(절제)주의에 함몰되어 다소 따분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나에게도 후기작 『부활』은 한없이 밋밋했다. 이러한 톨스토이 문학의 변화를 음미하는 것도 나름 굉장한 쾌감이다.

 

톨스토이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제법 대중적인 작품으로 주변에 읽어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전쟁과 평화』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 과거 서평에서 지적한 대로 대부분 『전쟁과 평화』의 존재와 명성은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총 4권으로 2200페이지가 넘고 등장인물만 550여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소설을 읽어낸다는 건 웬만한 독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일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읽지 않은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책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 소설을 꼽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과히 신비의 소설이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 마니아나 러시아 문학 그룹 사이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중 어떤 작품이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이 간혹 화두가 될 때가 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문학적 취향과 작품의 해석은 다르기 마련이다. 문학평론가 이현우 씨(필명:로쟈)의 말대로 『전쟁과 평화』는 '소설을 초과하는 작품'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쟁과 평화』는 스케일과 구조 면에서 전무후무한 독자성(獨自性)을 가진 소설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장편소설이란 장르로서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소설이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겠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쟁과 평화』에 조금 더 애착이 간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보다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 내 컨디션이 좋았고 내 마음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과히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소설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랑하고 성장하는 젊은 남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아래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채롭게 그려졌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인상과 역동은 숨이 멎을 정도다. 안드레이의 진지함, 니콜라이의 일관성, 피에르의 자유분방함, 나타샤의 생명력 등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을 넘어 삶과 사랑에 대한 웅대한 예찬서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완독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설 말미에 도착했을 때의 농밀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100년도 채 되지 않는 한 사람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온 것이 실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조금 더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에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처럼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의미라는 걸 알려준다.

 

책 선물을 한다는 얘기에 너무 장황한 서설이 붙었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를 두 명의 지인에게 선물한다. 번역본은 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문학동네판을 골랐다. 박 교수는 해방 후 러시아 문학 1세대ㅡ1.5세대로 보는 사람도 있음ㅡ학자로서 학구열이 대단한 번역가이다. 90세의 노년임에도 그의 번역 활동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이다. 성실하고 세심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없으며 한국어 어휘 구사력이 탁월하여 통상 옛 번역의 한계로 지적되는 '투박함'이란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잘 읽히는 번역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 하여 각광을 받는 추세라 한다. 최근 몇 년간 『전쟁과 평화』도 수많은 번역본이 쏟아졌다. 그중 젊은 번역가 연진희 씨의 민음사판도 좋다. 문학동네판이 우아한 문어체의 맛을 살렸다면 민음사판은 젊은 세대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듯 문장을 잘라서 구어체를 부각시켰다. 두 번역본 모두 훌륭하다.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책 선물을 받을 두 분에게 큰 감동이 있기를 바란다. 두 분 모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내 인생 소설을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그들이 『전쟁과 평화』의 완독에 성공하여 서로 다른 리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만의 책 선물에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상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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