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서양철학사. 이 어마무시한 책을 다시 집어 들기로 했다. 철학사에 대한 개인적인 지적 열정이 이 수고로움의 본질이겠지만 과히 오랜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점이 내 선택을 부추겼다. 금번 개정판은 작아졌으나 두꺼워졌다. 직관적으로 참 이쁘게 생겼다. 철학 책 같지 않게 디자인한 을유문화사의 미적 감각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손때가 타지 않게 깔끔한 비닐로 포장해 서점에 진열해놓은 교보문고의 센스도 흐뭇하다.
러셀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사실 러셀만큼 많은 저작을 남긴 지식인은 드물다. 일평생 78권의 책을 남겼을 정도로 그의 지적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나는 과거 2008년 네이버후드 어워드 시상식에서 그의 말을 인용해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고백과 러셀의 명언을 인용한 것 사이에 큰 정신적 오류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몹시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후일 반추해보건대 멋진 수상소감이었다. 요컨대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러셀의 말이자 나 다윗의 것이었다.
평생 기독교를 조롱하고 무정부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삶이 내게 올곧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인정하는 건, 그의 케임브리지 대학 동년배들의 지적 허영, 즉 리턴 스트레이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레너드 울프 등이 뒤섞여 온갖 불필요한 담론을 쌓았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핵심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또한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증의 수준이 과거의 철학자들, 즉 포이어바흐나 니체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정갈했다는 점이다. 관념과 이성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목한 그의 지성을 나는 일견 높이 평가한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는 책이다. 하지만 재미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책이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그 유명한 힐쉬베르거나 램프레히트의 것도 재미와 박력 면에서는 러셀의 것에 못 미친다. 물론 바로 이 지점에 세간의 호불호가 존재한다. "철학사가 주관과 흥미의 영역이냐"라는 무거운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에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빠져 보겠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