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차 영풍문고에 왔는데 세 분의 노인이 인문 코너에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인데 대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인문학을 주제로 양질의 지식을 주고받는다. 핵심 키워드는 최근 한국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유태계의 젊은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다. 그들의 대화는 하라리의 전작, 즉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를 위시하여 최근에 출간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얼추 일흔이 넘어 보이고 외모는 포근한 동네 어르신 인상인데 쏟아내는 말들에는 여러 인문학적 지력이 디테일하게 묻어 있다. 호기심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책과 지식과 배움에 어찌 나이가 있겠냐 마는 세 분 노인의 열띤 대화를 보면서 나는 강한 도전을 받았다. OECD 국가 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독서율이 떨어지는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체 독서율은 OECD 국가 중 평균에 속한다. 하지만 5-60세 이상의 중장년층 독서율은 최하위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에서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독서율도 따라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나라만 나이와 독서율이 반비례한다. 45세부터 꺾이기 시작해서 5-60대 이상은 만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과거 「무식한 어른과 오만한 꼰대 문화」라는 제목의 싸늘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칼럼에서 나는 생물학적 나이는 인간의 천부적 권력이 아님을 지적하고 경험주의의 맹신을 주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감각의 맹신이 축적된 교조화된 경험론은 모든 '꼰대주의'의 근간이다. 공부하지 않고 어른 흉내 내는 시대는 지났다. 오직 나이라는 권력만으로 훈계하고 잔소리하는 세상은 종말했다. 어른일수록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어른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단언한다.

   대형서점의 인문학 코너 한복판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수수한 옷차림의 노인 몇 분이 최신 역사학계의 뜨거운 감자를 논하는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이 진지하게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의 숭고함을 느낀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나이) 만으로 머리를 채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통찰대로,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편견과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혜로운 노인'과 '꼰대'를 가르는 기준이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어른들의 책 읽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육십 대 이상의 노년의 책 읽기는 선술한 바 있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매우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유교-주자학적 잔재가 일소되지 않은 한국적 현상을 하나 더 보탠다면 한국의 어른들은 더 많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 외람된 말일 테지만 어른이 무식하면 젊은이가 피곤하다. 무지(無知)도 유산이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으로 젊은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나도 그 흐름을 지지한다. 나이 듦의 궁극을 외면하자는 건 아니다. 노년의 지혜는 꼭 필요하다. 젊은 리더십이 요구될수록 역설적으로 어른의 지혜는 더 긴요하다. 그 위대한 키케로 말대로 "위대한 나라에서는 젊은이가 망친 나라를 노인들이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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