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와 같이 작은 생명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그 광대함을 견뎌낼 수 있다."     - 칼 세이건

  
인간은 지극히 하찮은 종족이면서 더없이 위대한 종족이다. 작지만 크고, 악하지만 선하며, 무지하지만 지혜로운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완전히 개별적이다. 존재적 진폭이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에 인간은 그 가능성으로 하여금 항시 거대한 긴장상태에 놓인다. 결국 이를 가늠하는(규정하는) 건 사랑이다. 사랑은 이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사랑이 인간을 인간 이상으로 만든다. 

   신(神)이 우주를 압도적으로 크게 만든 건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했기 때문이다. 먼 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과학적 역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우주적 시공간을 고차원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인간에게 특별히 부여됐다는 뜻이다. 잡지 못해도 가질 수 있고 가지 못해도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발현한다.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했)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작고 작은 인간 주제에 감히 세상의 광대한 현존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오소희가 사랑을 말한다. 그의 신간 <내 눈앞의 한 사람>은 사랑에 관한 에세이다. 그가 지난 십수년간 오대양 육대주를 여행하면서 겪고 관찰한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이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응집되었다.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울림있는 문장은 책 속에 담긴 여러 에피소드와 잘 호흡한다. 시와 산문이 지그재그로 배열되어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언어의 운용적인 면에서 과함도 없고 족함도 없다. 여러 여행을 통해 추출된 가지각색의 글감들은 깊은 사유와 촉촉한 언어를 관통하며 단단한 네러티브가 되어 독자의 가슴속으로 침잠한다. 독자는 피로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작가가 준비한 푸른 초장에서 잠시 가슴을 적신다.

   책 속에는 여러 사랑이야기가 소개된다. 작가는 다채로운 모습의 이성간 사랑에서부터 자기애와 모성애, 그리고 동성애까지 여러 사랑의 테마를 들려준다. 요르단에서는 억제하고 발산하는 양극단의 대조적 사랑을 하는 남녀를 만났다. 필리핀에서는 자기애를 향해 첫발을 내딘 여인과 조우했다. 파리에서는 여행가방의 절반을 초콜릿으로 채운 젊은 여인을 통해 자기자신을 좀 더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끊임없이 표현하고 발산하는 중년 연인의 뜨거운 열정을 보았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에이즈에 걸렸음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인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탐구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게이 커플의 순수한 사랑을 목도하며 "여행의 목적지는 장소가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임을 반추했다. 발리에서는 열일곱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각기 다른 포인트를 가진 스물세 편의 이야기는 총론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뻗어 나간다.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 책은 저자가 7년 전에 출간한 <사랑바보>의 개정판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초판의 첫 원고를 서른다섯에 썼다고 고백한다. 작가의 현재 나이에서 뺄셈을 하면 13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순수 텍스트적 관점에서만 보면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제목과 출판사가 바뀌었고 이야기 몇 편이 대체(추가-삭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초판을 읽을 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읽는 근육과 감상하는 온도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른 탓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에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서 내가 아빠가 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첫째 딸의 출산을 앞두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하며 초판을 읽어내려간 7년 전의 봄날을.

   갓 결혼해 신혼부부의 감정으로 읽을 때와 두 아이를 낳고 학부모가 된 현존으로 읽을 때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람과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사랑에 대한 내 천착은 어느덧 애매한 천상에서 구체적 실재의 세계로 내려왔다. 이제는 크고 대단한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사랑의 디테일은 작고 낮고 가난한 곳에 더욱 숭고한 형태로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천국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사랑은 천상에 있는 게 아니라 지상의 영역, 즉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이를 명징히 깨달았다. 

   책으로 돌아가자. 책의 제목을 주목한다. 책 제목 '내 눈앞의 한 사람'은 더없이 훌륭하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랑은 삶이고 현실이며 실재이다. 사랑을 애매하고 신비한 형태로 저 멀리 가두어 놓으려 하는 자들에 의해 세계는 피곤하고 끔찍해진다. 사랑을 판타지라는 모호함으로 각색하지 말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성실히 사랑하는 게 사랑의 본질이자 전부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유일한 죄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곧 사랑이다. 그래서 자신있게 추천하겠다. 오소희의 사랑 예찬론 <내 눈앞의 한 사람>을 이 세상 모든 사랑바보들에게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