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평전
김학동 지음 / 새문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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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둑에 홀로 나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소월이 흐르는 강물을 한 없이 보고 있을 생각을 하면 그가 나 일까 싶어 진다. 소월이야 말로 나의 청춘기를 가장 잘 대변하기에 좋은 시인다.

 

  오늘은 우리가 살아갈 날의 첫날이기도 하다. 재즈 가수  '말로' 가 부르는 '개여울' 을 들어 본다.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개여울' 은 1972년 수원대 교수 였던 '정미조' 씨의 학생시절 리메이크 버전이 제일 듣기 좋다. 그녀의 '비음' 이 주는 느낌은 소월을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소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싶었다. 개여울은 1925년 '개벽'지에 발표되었다.

    소월의 비루했던 삶과 위대했던 정신의 초점화에 한정되어 있다. 소월은 평안북도 정주 사람이다. '홍경래의 난' 이 일어났던 곳이며 소월(1902~1934) 이외에도 이광수(1912-?), 김억(1896-?), 백석(1912-1995) 등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소설가와 시인들의 고장이다.

   평북 정주의 지리적•공간적 특성은 혼종성있다. 봉건 지배 권력의 중심인 한양으로부터 밀려나 소외와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곳이었다. 그곳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 근대 문화와 교육시스템을 일찍 받아들여 근대 지식인과 민족지사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소월은 전통과 근대가 교차되고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혼종의 시공간(정주)에서 살았던 경계인이었다.

   소월은 1909년에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소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에 오산학교 중학부에서 스승 김억을 만났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유학을 중단, 귀국 후 4개월간 서울에 머문다. 다시 고향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다 폐업한 후 조부에게 얻은 돈을 밑천 삼아 고리대금업을 시작한다. 곧 실패한다.

 

   지병인 '저다병'(팔과 다리가 붓는 각기병)을 앓았다. 그는 '내면적 인간의 비극적 운명' 을 떠안았던 시인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촉망 받은 장손으로 가족의 관심과 기대 속에 근대 교육을 받았다. 소월은 고향 밖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끊임없이 열망했다.

 

   오늘날 소월 시의 수용이 시집 '진달래꽃'(1925, 초판이 3억원)에 편중된 것은 독서 대중의 오해가 생겨낸 또 다른 이유이다. 소월 시의 화자들은 대체로 상실감과 비애에 몰입되어 있다. 근원의 세계, 본질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무상하기 짝이 없는 현상과 감각의 세계, 그 허깨비 같은 것 현실 속에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것,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실존적 상황의 부조리함 앞에서 소월의 화자들은 눈물에 젖은 채 비통해 한다. 

   지구 상에 '한' 없는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한'은 인간의 실존의식, 즉 존재의 모순과 비극적 상황 인식에서 생겨난 역설적 감정 이다. '한'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고유한 경험에서만 생겨나지 않는다. 1950년대의 '고석규'는 소월의 '한'은 근대가 애써 망각하고 부정했던 '자연 속의 서정'을 발견한 '눈'이었다고 했다. 즉 소월의 '님'은 자연이다. 그 자연은 웅장하고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우리네 일상속에 늘 함께 있는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바다로 우리 조상이 대대로 하루 하루를 살아 왔고 후손이 살아 갈 삶의 공간이다.

 

   소월이 마주쳤던 식민지 근대의 현실과 인간 실존의 비극성은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과 그리 멀지 않다. 어쩌면 소월이 당면했던 마음의 짐들이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 삶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대결과 저항이 필요하다고 인깨워 준다. 소월은 세계의 시인으로 다시 소환되어야 한다. 그것이 소월의 진실이다.  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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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평전 - 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
최열 지음 / 돌베개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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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는 타향이지만 누구에게는 고향이다. 구정이 지나 봄이 그립다. 고향의 푸른 잔디와 봄처녀가 기다려진다. 따뜻한 남쪽에서 제비가 날아 오겠지.


  이중섭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단거리 선수, 권투, 수영, 철봉, 스케이트 등을 즐겼다. 그는 술을 마시면 가곡 '낙화암'(이광수 작사, 안기영 작곡)을 즐겨 불렀다. 그의 별명은 타잔이었다. 이중섭에게 체육은 최고의 활력소였다.


  이중섭은 일본 제국미술학교 시절 불어 실력이 좋았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미술해부학에 열중하고 인체와 동물의 골격 습작을 되풀이 했다. 그는 보들레르라드니가 발레리, 릴케, 베를렌 등의 시를 암송했다. 피카소의 화집을 자주 보곤 했다. 그들을 탐욕했던 이중섭은 최후의 한국적 예술지상주의자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근대 시인들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청년을 사로 잡았다.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와는 캠퍼스커플(CC)이었다. 이중섭의 하숙방은 언제나 깨끗했고 그 한가운데 난초를 키우는 깔끔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소의 머리, 서 있는 소 등 독창적 화법과 시대에 앞서는 미의식에서 그의 지인들은 새로운 감정으로 관전의 기회를 가졌다. 1940년 7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부쩍 통제가 심했고 쌀, 잡곡은 물론 석유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물자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하는 배급제도로 일상생활은 곤란해져가고 있었다. 이중섭은 시국이나 정세에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성격 그대로 활발하고 유쾌한 일상을 유지했다. 1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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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평전
고은 지음 / 향연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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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한 봉지와 물 한 보시기가 남아 있습니다. 어느 날이고 밤 깊이 너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망하리라 그 생각이 하나 적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는 고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께는 전화 걸지 않고 기아하듯이 망하렵니다. - '슬픈이야기' 중에서 -


  점심 후 졸여 깜박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밖은 어둡고 봄비가 쏜살같이 내린다. 곧 밤이 올듯 사방은 어둡다. 가방을 챙겨 들고 버스를 기다린다. 바람은 불고 사람들은 옷깃을 여민다. 떨어진 벚꽃잎이 도로위를 구르다 이내 젖어 바닥에 붙는다. 지난 눈싸리기와 낙엽은 봄의 기억속에 살아 있다. 양림동에 가자. 근대의 시간이 머문 거리로. 유년의 젖냄새와 지금도 살아 있을 '해경'을 만나겠지.

  세상의 수 많은 일 또는 스토리 중, 그 일부를 크로즈업 시켜보면 단순하면서도 어리석다. 한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무심히 그의 곁을 지나다 맞은 편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분명히 들어나게 했다. 혹시 XX고 졸업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대답하려고 머뭇거리는 순간을 앞질러, XX이 아니냐? 그는 당황했다. 내 몸을 그의 곁으로 돌리면서, 나도 XX고 졸업했는데, 반갑다. 그의 얼굴은 면도를 몇 일 않은 듯 덥수룩 했다.

  그는 35년전 '해경'이었다. 술은 그의 몸속에서 향수같이 피여났다. 그는 항상 현실과 상식으로부터 유리되어 살았다. "해경"은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을 비하시키며 그곳으로부터 무책임하게 의식의 상위에 떨어진 자신의 사고 테크닉에 몰입되어 있었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 폐쇄되었다. - '권태' 중에서 -  15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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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 평전
신한균.박영봉 지음 / 아우라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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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양이 다르면 맛과 기분도 다르다. 가끔 살균 탁주를 와인 잔에 따라 마셔 보면 프랑스 와인과 같다. 노란색 양은 잔의 그 맛과는 다르다. 어떤 일이나 공간 그리고 개인의 상황에 따라 효과 또는 느낌이 다르다. 곧  다름은 공존의 이유이기도 하다.


 막걸리 잔으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흰 보세기다(보세기는 보시기의 전라도 방언). 땅에 묻어 둔 독안의 막걸리를 표주박으로 휘저어 흰 보세기 잔에 나눠 마셨다. 둘러 앉아 마시는 마을 어른들의 옆모습은 내 유년의 다정한 기억이다.  마을 어른들은 그 기운으로 가을걷이 볏짐을 지게에 지고 나르듯 논과 마당을 부산나게 오고 갔었다.


  한국사람이 일본인에 대한 평전을 썼다하니, 번역을 하였다면 납득이 가겠지만. 그것은 '로산진'이라는 인물이 한국의 옛그릇을 통해 도예철학을 터득했다는 인연 때문이다. ‘로산진’은 조선의 옛 도자기에 대한 공부를 통해 일본 요리에 어울리는 그릇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사기장(도공)은 ‘도자기를 판다’고 하지 않고 ‘작품을 시집 보낸다’고 한다. 도자기는 사기장에게는  딸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잘 만들어진 도자 그릇을 ‘맛난 그릇’이라고 했다. 좋은 그릇은 음식을 더욱 맛나게 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일본의 음식과 그릇의 어울림이었다. 그 어울림은 기억을 끄집어 내는 라벨같은 것이다. 가끔 점심 때나 출장 중에 자주 갔던 식당의 특징은 찬과 그릇의 어울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한 참 후에 알았다.


  기타오지 로산진(1883-1959)는 천재 예술가였다. 서예에서 시작해 전각과 건축 등으로 영역을 넓혀으며, 식도락과 도자기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이상향을 구현했다. 그는 절대미각의 소유자였으며 1920년대에 미식으로 일본의 정재계를 좌지우지했던 인물이었다. 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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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평전 - 권위와 신화의 옷을 벗은 인간 공자를 찾아서
안핑 친 지음, 김기협 옮김, 이광호 감수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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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활동의 고비에 이르렀을 때 공자는 갑자기 관직에서 물러나 여행길에 올랐다. 기원전 497년의 일이다. 54세의 공자는 조국 노나라에서 법무를 담당하는 대사구자리에 있었다. 대사구 자리는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바로 윗사람은 재상이었다.


 노나라 임금은 정공이었고, 재상은 계환자였다. 공자는 계환자 가문의 창고 담당과 가축관리인으로서 시작했다. 지방관인 중도재와 토목 담당인 사공을 거쳐 대사구의 자리에 이른 것이다. 


 중국사의 이단계에서는 봉급을 받는 관직도 꽤 만들어져 있었지만, 중요한 자리는 세습 녹봉을 가진 귀족층의 차지였다. 공자는 귀족의 자격을 겨우 걸친 신분으로, 특권층의 범주에 들 만한 출신은 못되었다.


 공자의 조상들은 송나라에서 대신 여럿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 중엽에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은 후로 행세하지 못햇다. 그래서 집안 몇 사람이 노나라로 옮겨 왔는데 그 중 증조부가 있었다. 공자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안 전체가 노나라가 백성이 되었다. 몰락한 양반이 되어 평민을 겨우 면한 사 계층에 속했다.

 

 사마천의 시대에 중국이 오랜 끝에 통일되어 있었고 공자의 가르침이 새 질서의 수호자와 관리자들에게 메우 쓸모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마천은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유교식 관점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같은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자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뒤져 자기가 바라는 바를 공자 전기에 적었던 것이다. '15.6.27.


 2,5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공자의 사상에 배울 점이 있는 게 분명하다. 동아시아 사유의 한 축인 '유학'을 연 위대한 스승, 공자(기원전 551~479)는 성이 공이고 이름이 구이며 자가 중니다. 17세기 이후 '공 선생님'이란 뜻의 '공부자'란 호칭이 서양에 알려져 'Confucius'라 적히게 되었다. 맹자의 고향인 노나라 추성은 공자의 곡부에서 남쪽으로 20km밖에 안되는 곳이다.

 

 공자는 굳건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역사, 시, 예법, 음악 등 모든 지식을 알뜰하게 갈고 닦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본질적이고 항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이해함으로써 '큰 허물 없이' 살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20세기 중엽까지 중국은 공자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사회제도, 자아와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 문화와 역사의 구조 등 중국의 모든 현상이 공자의 생각으로부터 자라나온 것처럼 보였다. 저자는 공자에 대한 판단 기준을 '논어'에 둔다.

 

 공자는 인간답게 사는 길은 오직 문명의 원칙과 질서를 지키는 길뿐으로 질서는 사람들의 외적인 법이 아닌 마음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예'를 강조했다. 공자는 스스로 반성하고 올바름을 향해 실천하는 내적인 힘을 믿었다. 이 내적인 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이다. 공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사회 운영이나 국가 정치의 핵심적인 가치로 생각했다. 마음에서 비롯된 올바른 원칙과 준칙에 따라 행동하는 도덕적인 힘이 사회를 안정시킨다고 믿었다. 공자가 생각하는 문명을 이끄는 진정한 힘은 '도덕성'이다. 

 

 정치적 안정은 공자가 평생 매달리는 문제였다. 공자는 '어떻게 해야 정치를 잘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즉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만이 정치를 할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신분이 아닌  도덕적 능력이 위정자의 자격이라 믿었다. 

 

 공자나 공자를 대표하는 '유학'을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사상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공자의 문제라기보다는 공자의 권위를 정치에 이용하려 한 사람들의 문제였다. 공자는 '개인을 발견한 철학자'이다. 봉건적인 고대 중국에서 현대적 의미인 '개인'을 발견했으나 현대에서 말하는 '법적, 경제적으로 자율적인 주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밝히고 닦아야 할 '내면'이 있음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밝힌, 최초의 철학자이다. 개인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철학자로 이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도덕적 주체를 '군자'라고 일컬었다. 공자는 자기반성 능력을 갖추고 타인과의 공존을 도모하는 '진정한 개인'을 주체 세력으로 한 '군자'의 출현을 바랬다. 1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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