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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평전 - 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
최열 지음 / 돌베개 / 2014년 9월
평점 :
누구에게는 타향이지만 누구에게는 고향이다. 구정이 지나 봄이 그립다. 고향의 푸른 잔디와 봄처녀가 기다려진다. 따뜻한 남쪽에서 제비가 날아 오겠지.
이중섭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단거리 선수, 권투, 수영, 철봉, 스케이트 등을 즐겼다. 그는 술을 마시면 가곡 '낙화암'(이광수 작사, 안기영 작곡)을 즐겨 불렀다. 그의 별명은 타잔이었다. 이중섭에게 체육은 최고의 활력소였다.
이중섭은 일본 제국미술학교 시절 불어 실력이 좋았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미술해부학에 열중하고 인체와 동물의 골격 습작을 되풀이 했다. 그는 보들레르라드니가 발레리, 릴케, 베를렌 등의 시를 암송했다. 피카소의 화집을 자주 보곤 했다. 그들을 탐욕했던 이중섭은 최후의 한국적 예술지상주의자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근대 시인들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청년을 사로 잡았다.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와는 캠퍼스커플(CC)이었다. 이중섭의 하숙방은 언제나 깨끗했고 그 한가운데 난초를 키우는 깔끔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소의 머리, 서 있는 소 등 독창적 화법과 시대에 앞서는 미의식에서 그의 지인들은 새로운 감정으로 관전의 기회를 가졌다. 1940년 7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부쩍 통제가 심했고 쌀, 잡곡은 물론 석유를 비롯한 거의 모든 물자 사용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하는 배급제도로 일상생활은 곤란해져가고 있었다. 이중섭은 시국이나 정세에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성격 그대로 활발하고 유쾌한 일상을 유지했다. 15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