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 고귀한 야만인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0
프랑수아즈 카생 지음, 이희재 옮김 / 시공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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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의 첫 작업실은 자기 집 지붕 밑이었다. 고갱은 원죄를 암시하지 않으면서 이브를 그리고 싶었다. 고갱이 남태평양으로 출발하면서 꿈꾸었던 것은 목가적인 은둔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영감, 오래 전에 망각된 종교와 전통, 장대한 원시 신화의 발견이었다. 


  19세기말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구축한 프랑스가 만국박람회를 통해 '타히티'를 감미로운 낙원으로 소개하고 식민지에 정착할 사람들을 모으면서, 고갱에게도 무상체류를 가능케 해주었다. 조건은 타히티의 풍습과 풍경을 토대로 예술적 관점을 연구하며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원시 야생적 낙원을 꿈꾸고 갔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갱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존경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평화롭게 작품에 전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1885년 여름부터 '그림도 그리고 생활비도 줄이기 위해서 브르타뉴의 한적한 시골로' 은둔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가족 걱정은 여전했지만 고갱은 난생 처음으로 직장과 가정에서 벗어나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고갱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사람들이었다. 빛깔이 바랜 원색의 옷을 입은 섬의 여인들은 우아하면서도 다양한 몸놀림으로 매일매일 고갱의 영감을 자극했다. 기괴한 초목과 꽃, 엄숙한 형상들, 장엄한 석양이 있는 숲은 종교적 신비와 에덴 동산을 닮은 성스러운 풍요를 안겨 줬다.

  돌아온 고갱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1887-1888년 겨울) 처음으로 작품을 팔았으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고갱이 남태평양에 머무는 믿음직한 대리인 역할을 맡은 다니엘 드 몽프레와 반 고흐 형제였다. 고갱은 자연을 너무 곧이곧대로 베끼지 말며, 예술은 추상이라 했다. 자연 앞에서 꿈꾸듯이 자연에서 추상을 뽑아 내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결과보다는 창조행위를 많이 고민했으며 원시적인 표현 수단만이 자신의 우울한 고독을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고갱은 두 달이 넘는 항해 끝에 1891년 6월 9일 파페에테에 도착했다. 도착 후 그는 처음에는 별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 동안 새로운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인지 뭐가뭔지 몰랐다. 그림을 그리려면 좀더 시간이 흘러야 했다. 반 고흐는 예술가로서의 고갱을 높이 샀다. 고흐가 좋아했던 것은 '열대의 자연'을 그린 고갱의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은 꿈결의 몽롱함 속에서 마치 두 개의 장면을 포개 놓은 듯했다. 하나는 현실의 장면, 또  하나는 가공의 장면으로 '예술'의 장면인데, 둘은 노랑, 빨강, 파랑을 주조로 한 화려한 색채로 하나로 융합되었다. 

  1892년 7월 고갱은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요한 사실을 빼놓았다. 열세 살 난 폴리네시아의 어여쁜 소녀와 같이 살고부터 타히티인의 참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즉 현지 처(소녀)를 만든 것이다. 아름답고 조용하며 말이 없었던 소녀는 고갱이 꿈에 그리던 원시의 이브였다. 1892-1893년에 이 처를 주인공으로 '망고를 든 여자'등 작품을 그렸다.

  1892년 5월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썼다. 역마살이 도진 고갱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프랑스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에 매달렸다. 고갱을 옹호했던 비평가 알베르토 오리에가 요절했고 거래했던 미술상 테오 반 고흐도 1891년에 죽었다. 1893년 12월, 고갱은 재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렸지만 파리에서 혼자였다.

  1895년 6월 28일 파리 역 리옹 행 개찰구, 최후의 남태평양 여행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병고와 술과 절망에 찌든 고갱은, 마침내 그 어떤 객기도 허세도 음모도 퇴색시키지 못할 참다운 고결함에 이른다.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 는 고갱의 가장 유명한 대작이다. 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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