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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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에게 이 책을 건네준 사람은 신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경험을 했다고 말을 했고, 그 영적 체험으로 인해서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진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해주었다.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신이 있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딱히 수긍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부탁이었었다.

 

하지만 그래도 선물로 건네받은 책을 그냥 묵혀둘 수는 없어서 건성으로 읽게 되었고, 부드럽게 들려주고는 있지만 전혀 동의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은 글이었지만 그래도 읽기는 읽었다.

동의를 하지 않는다고 모든 내용이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내용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글들일 것이고, 건전한 삶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귀중한 말을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C.S.루이스는 국내에서는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판타지 소설가로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소설가를 넘어서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사람이고 흔히 말하는 ‘지성인’으로 불린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는 종교적인 성향의 글을 많이 발표했고, ‘순전한 기독교’도 그의 종교적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는 저작으로 알려졌다.

 

그의 글은 처음 접했고,

이런 성향의 글도 처음 접했기 때문에 특별한 비교를 할 수 없겠지만 읽다보면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과 쉬운 예를 들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를 떠나서 꽤 인상적인 글이었다.

 

C.S.루이스의 말대로 나와 같은 사람은 때때로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기만 할 뿐인 지극히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딱히 관심을 갖고 읽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한번쯤은 생각해볼만한 글들이 있어서 읽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었다.

물론, 재미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논의는 대체적으로 믿음은 있지만 믿음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시각을 갖고 있거나,

하나님 또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된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에 대해서 상투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매우 젊잖게 대응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논리와 대응이라는 것이 조금은 핀잔을 주고 싶은 생각도 들게 만든다. 그의 논의는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고, 그 전제에 맞게 논의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존재인 신이 존재하고 그건 이러저러한 비유를 통해서 혹은 몇 가지의 예를 들어서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존재를 증명한 다음에 신이 존재하고 있으니 어떤 삶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혹은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논의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너무 말끔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서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최대한) 보편적인 시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끔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시키고 있다.

 

각각의 종파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기독교도들이 대체로 수긍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시각의 글을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도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을 지식을 전달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그는 독려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글을 읽게 된다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보다 자신감을 갖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는...

나와 같은 사람은 그의 글을 읽어도 도통 믿음을 갖게 되지도 않고 있고,

아마도 계속 이렇게 지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은 일정부분 실패를 한 것 같다.

그가 이 글을 쓴 의도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 내부에서만 읽혀지지 않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갖도록 만들려는 것이 글을 쓴 목표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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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론 밀리터리 클래식 3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지음, 류제승 옮김 / 책세상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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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쟁은 단지 정치적 교류의 일부에 불과하며

결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즉,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상이 높아지고,

그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책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런 책은 읽기가 쉽지는 않은 책이고 흥미로움보다는 어려움이 앞서게 되기는 하지만 읽으면서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더 많은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책에 대해서 고전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있고, 그렇게 부여된 많은 책들 중에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처음 출판된 이후 책에 대한 위상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있고, 더 많은 분야에 접목되고 있다.

 

생각해 본다면 19세기의 독일은(아마도 당시의 명칭은 프로이센이었으리라) 무언가 정신적인 폭발이 이뤄진 시기였다. 클라우제비츠와 동시대를 살아간 헤겔은 철학을 통해서 시대를 넘어서 역사와 세계에 대한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고,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게 하였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는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분야인 전쟁이론을 통해서 이전 시대와 결별을 하고 있었다.

 

‘전쟁론’은 어떤 의미에서든 매우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에 갖고 있는, 그리고 지금도 갖고 있는 전쟁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우쳐주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그리고 정치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시대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통찰력도 제공하고 있다.

 

꽤나 난해한 내용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논의의 핵심은 전쟁이 단순히 국가 간의 혹은 집단 간의 대결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정치적 연장선에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그런 의미로서 전쟁의 본질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전략과 전술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근대사회로 되면서 이전 전쟁과는 확연하게 다른 국민 전체의 참여가 이뤄지며 전쟁의 양상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1장 ‘전쟁의 본질’과 8장 ‘전쟁계획’에서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군사관련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몸을 담고 있지 않다면 다른 부분은 건너뛴다고 해도 이 부분만큼은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 외의 장들에서는 실제 전투와 전쟁 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인 지식이 없다면 꽤 난해하게 다가올 것이고, 몇몇 부분들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글라우제비츠의 논의는 전쟁에 대한 그리고 정치에 대한 시각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고, 전쟁과 정치 그리고 전쟁 이전과 이후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에 대한 가정 적절한 평가는 전쟁을 단순히 전쟁으로만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전쟁 외적인 부분을 전쟁에 대한 중요한 요소로서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 깊이 있는 시각을 제공했다는 점일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내용이 매우 논리적인 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논리력을 높이려는 사람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치밀한 구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또한, 그는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면서 이론의 중요성과 그 이론이 어떤 시각을 담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꽤 의미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해서 회의적이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클라우제비츠의 통찰력 있는 시각과 그의 정치와 전쟁에 대한 풍부한 시각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지만, 19세기의 시대에 대해서도 무언가 생각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급속히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정치적인 근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적인 변화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와 글과 같이 어떠한 것에 대해서 기존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을 갖게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시각이 갖고 있었던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거나 논의에서 제외되었던 것들을 숨이 막힐 정도로 세분화 시키고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있고, 끝없이 정교하게(즉, 이론화시켜) 다듬으려고 노력하던 풍토에 대한 증거나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분야가 보다 발전하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이론화와 체계화로 생각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매우 체계적/논리적이면서도 하나의 이론을 혹은 시각을 갖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논의는 단순히 전쟁에 대한 이론만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그는 직접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서이고,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라는 시기적인 구분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보다 관심을 갖고 그가 살아가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정신적 풍경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전쟁론’을 읽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고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클라우제비츠의 시각과 논의는 큰 흥미를 끌게 만든다.

 

참고 : 전쟁론에 대해서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책을 읽지도 않았거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문장만 관심을 갖고 논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논의를 그렇게 엉성하게 자신의 논의에 연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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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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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권에서 이어지고 있는 2권의 내용은 점점 결말로 향하면서 보다 추리적인 요소에서 벗어나서 주요 등장 인물인 카라와 세큐레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중심 줄거리인 ‘누가 살인을 저질렀나?’에 대해서 관심을 잃고 있지는 않지만 오르한 파묵은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은 누가 살인을 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들에 더욱 집중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전적으로 선하지도 그렇다고 악인들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각자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로 다뤄지고 있고,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누가 옳다고 말하기 보다는 등장인물 모두의 사연에 공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단순히 사람들만이 자신들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과 그림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보다 내용은 복잡하고 다양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주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간간히 돌출되어 있고, 다양한 인물들이 사건과 관계가 되었거나 혹은 전혀 관계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본다면 산만하게 느껴지겠지만 좋은 방식으로 본다면 하나의 사건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말미에 가서는 그림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무언가를 남기는 것과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 논쟁하는 부분은 1권에서도 다뤘던 동일한 문제에 대한 논쟁을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마지막 장에서 세큐레를 통해서 사건이 어떻게 종결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 각자가 삶을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삶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인 인생인지에 대해서 씁쓸하게 들려주고 있다.

 

속 시원하고 달콤한 결말이 아니라 그저 흘러갈 뿐인 삶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이 유기적이고 치밀한 짜임새를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그리고 인물들의 개성에 대해서, 이야기 구성의 매력에 대해서도 쉽게 만족감을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고, 색다른 이야기 구성으로 인해서 글쓰기의 매력을 그리고 글을 읽는 것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되어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과정과 의도에 의해서 선택하게 되는지를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고, 사랑의 감정과 삶에 대한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매우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였다.

이야기의 재미나 캐릭터들의 매력보다도 더 흥미를 끄는 글쓰기라 한번쯤은 흉내내보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글쓰기와 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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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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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에 대해서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하게 아는 것은 없었다. 어떤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지도 몰랐었고,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있는 지금도 그가 어떤 성향의 작가인지 잘 파악되지 않는다.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알 것 같기는 한데,

그것 말고는 잘 파악하지를 못하겠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내 이름은 빨강’은 16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과 그림 그리고 살인과 약간의 음모를 담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이고, 단순히 재미난 줄거리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조금은 독특한 진행 방식을 보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자이크와 같은

혹은 여러 사진들을 모아 놓은 액자와 같은 구성을 보이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혹은 사물들이 각각의 장에서 자신들의 시각으로 얘기를 들려주고 있고, 때로는 독백처럼, 때로는 독자들에게 얘기를(대화를) 하듯이(나누듯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또한, 각각의 캐릭터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과 생각 그리고 세밀한 묘사를 통해서 당시의 시대를 담아내고 있으면서 ‘그림’을 통해서 오르한 파묵은 오스만 제국으로 대표되는 동양과 베네치아로 대표되는 서양의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함께 ‘스타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를 하고 있다.

 

독창성과 보편성에 대한 그의 의견에 조금은 관심을 갖게 만드는데, 아직은 1권만 읽었기 때문에 오르한 파묵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2권까지 읽은 다음에 알 수 있겠지만 꽤나 흥미로운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담백하면서도 단순하지만은 않은,

꽤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림과 사랑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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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소년 2010-03-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꽤 매력 덩어리 책인데......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배군 2010-03-29 23:44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합니다.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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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경제학상 수상 때문에 가뜩이나 높은 명성을 더 높이고 있는 폴 크루그먼은 현재 생존해 있는 경제학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중 한명일 것이고, 학문적으로만 활동하지 않고 정치적인 발언과 행동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저한 케인스주의자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그는 경제학자로서의 명성도 쌓았지만 그보다는 조지 W. 부시 정권이 하는 일들마다 집요하게 비판을 하며(말 그대로 물고 늘어져서) 부시 정권의 그리고 부시 정권으로 대변되는 ‘신 보수주의자들’의 정책과 숨겨진 의도에 대해서 밝혀내는 것에 더 열심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입장에 공감하고 있고,

정치/사회적인 그의 견해에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발표한 몇 개의 저서들을 읽었었고,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는 내용에 따라서 두 가지 방식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경제학자로서 철저히 학문적으로 써내려간 글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작게는 미국 내 문제들과 넓게는 국제경제에 관한 정치/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글들이다.

 

전자는 경제학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글들이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후자인 부분은 시사평론가로서의 글들이기 때문에 조금은 읽기가 수월한 부분이 많다.

물론, 두 가지의 글 모두 경제학자답게 적절한 근거와 지표를 갖고 자신의 생각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단단한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못하든 한번쯤은 그의 의견을 고려하게(혹은 할 수 밖에) 되는 것 같다.

 

그의 최신작 중 하나인 ‘미래를 말하다’는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글이기 보다는 시사평론가로서의 글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논의하는 부분이 ‘신 보수주의’가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미국의 경제를 지금처럼 망가지게 만들었는지(물론 ‘신 보수주의자들’은 지금의 경제상황이 망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논의하고 있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략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적절한 근거를 갖고 그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주제를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폴 크루그먼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경제가 망가지게 된 원인이 기존의 온건 보수주의에서 극렬 보수주의자들로 보수주의의 흐름이 변화하였기 때문이고, 그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대변하기 보다는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고, 종교적인 면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며 인종차별에 대해서 우호적인 성향인 그들이 공화당의 주도권을 갖게 됨으로써 소수이기는 하지만 막강한 영향력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벌여놓았다고 진단하고 있다.

 

미국의 ‘신 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과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폴 크루그먼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분석을 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의 다른 의견들에서는 꽤나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경제학자로서 다른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경제문제를 자연발생적 또는 경제적 행위와 변수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기 보다는 정치적인 변화로 인해서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과감히 하고 있으며(주류 경제학자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발언일 것이다), 이런 폴 크루그먼의 논의는 그가 철저한 케인스주의자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고, 결국 경제와 정치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맑스(마르크스)주의의 정치경제학도 떠올리게 되기도 했다.

 

폴 크루그먼의 ‘신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철학과 신념 그리고 적절한 이론적 토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그저 감정과 원한만을 갖고 있는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들의 정책과 발언들을 보면 그런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입장에서만 모든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고, 남부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백인들의 인종주의를 암시하고 있으며, (테러에 및 기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을 키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아가게 되면서 풍요로운 시대 이전의 ‘도금 시대’라고 불렸던 대공황과 빈곤의 시대로 역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그 당시의 시대와 얼마나 유사한지 여러 지표들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를 토대로 소득의 불균형과 다양한 기본권과 관련된 부분에서 극히 사회적인 문제점들이 불거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점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으로 폴 크루그먼은 새로운 ‘뉴딜 정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고, 과거의 ‘뉴딜 정책’을 본받아서 지금 시대에 맞는 적절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를 위한 최우선적인 정책으로 그는 ‘의료보험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루뭉술한 정책이나 말뿐인 입장만을 보이는 여타의 경제학자들과는 다르게 폴 크루그먼은 시급한 해결책과 어떤 것으로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 자신만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신 보수주의’의 기원과 함께 민주당이 그리고 진보주의가 어째서 1970년대 이후 분열을 맞게 되었는지 논의를 하며 앞으로 어떤 방향과 정치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통해서 ‘미래를 말하다’는 한명의 학자가 쓴 학문적인 글이 아니라 자신만의 입장을 토대로 사회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점들이 있으며 어떤 해결방안을 갖고 행동을 해야 할지를 논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팸플릿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폴 크루그먼 본인도 그런 성격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는 미국의 중산층이 다시금 두터워지고 ‘뉴딜 정책’과 같은 정부의 적절한 정책 개입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라고 있고, 정치인들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모습이 아닌 적절한 정책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완벽한 세상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회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글을 읽어가면서 폴 크루그먼이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들이 한국에서는 점점 더 표면화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문제이면서도 심란한 기분으로 글을 읽게 되었었고, 그가 미국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의료보험의 민영화와 노조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지금 한국에서는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큰 우려를 갖게 된다.

 

그리고 철학과 행동을 촉구하는 그의 마지막 논의는

적절한 철학도,

필요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은 두고 두고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참고 : 오바마는 결국 집권 후 의료보험을 개혁하게 되었고, 향후 미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크루그먼도 그리고 이책을 읽은 사람으로서도 꽤나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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