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한 해
수잔 데브리 외 지음, 최광수 외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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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독실한 사람들이 많아서 여러 가지 종교와 관련된 책들을 선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선물을 받은 대부분의 책들을 건성으로 읽게 되거나 특별한 인상을 갖게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자의 일생에...’는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읽게 되었는데, 제목을 통해서 느껴지지 않던 종교적 성향이 본문에서는 간간히 풍기다가 마지막에는 거의 종교적인 요소 없이 읽기는 힘들어질 정도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꽤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었다.

 

약간은 놀랍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세상만물을 만드신 분이 부부생활에는 무관심하다는 것도 이상할 것이니 당연히 이런 책들도 쓰여질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결혼생활을 시작한 부부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상호간에 어려움이 나타날 것인지,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책이고, 꽤 의미 있는 조언들일 것이다.

 

연예기간에는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고 해도 결혼과 함께 그 좋았던 관계가 틀어지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몇 십년동안 각자 다른 환경과 사고 / 생활방식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함께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마찰일 것이고, 이런 마찰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저자는 알려주고 있다.

나름대로 좋은 내용인데, 읽다보면 신앙과 종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차지해서 조금은 귀찮은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것까지 신앙을 집어넣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힘이 있어야지 더욱 행복한 부부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차피 흥미와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읽었을 뿐이고,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은 처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여자의 일생에...’는 부부생활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 앞으로의 관계가 더 나아지는지 알려주고 있고,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종교적인 부분이 있든 말든,

결국 사람관계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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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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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 혹은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들은 아마도 그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관심사에 대해서,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할 것들이 대해서,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문제의식을 갖도록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뛰어난 지성인이고,

몇 안 되는 지식인일 것이다.

 

그는 그 시대에 중요한 관심을 끌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자료와 논의를 토대로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꽤 설득력을 갖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는 큰 통찰력을 갖고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는,

다양한 자료와 논의를 통해서 가장 정돈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엔트로피’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주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며, 그가 어떤 시각과 인식의 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저작일 것이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1과 2법칙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생활방식과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 변화의 근거들을 제시하며 논의하고 있다.

 

그는 서론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이 이전부터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고, 이러한 세계관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세계관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이고, 근대에 형성된 뉴턴적인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기계적인 세계관이라고 말하며 끝없이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헛된 믿음을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믿음은 자연을 다스릴 수 있고, 자연의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믿음은 결국 자연파괴와 환경문제 등등 다양한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의견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의 입장은 무한한 가능성에 골몰하기 보다는 어떠한 한계점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리프킨은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하는 근거로 열역학 제1과 2법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개념은

 

우주의 전체 에너지 양은 일정하고,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려고 한다.

 

라는 개념이고, 이것은 제1법칙의 경우 기존의 에너지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시키거나 기존 에너지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공장에서 원재료로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과정과 같은 예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2법칙을 통해서 그 과정(에너지가 변환되는 과정, 원재료가 하나의 제품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에너지가 손실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손실된 것이 ‘엔트로피’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 엔트로피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고,

이 엔트로피의 급증은 지금 사회를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쓰레기들을 떠올리게 된다면 어떤 소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엔트로피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것을 설득력 있게 들려주기 위해서 엔트로피라는 것이 단순히 과학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연관이 있는지 많은 예들을 통해서 들려주고 있고, 이 엔트로피로 인해서 현대 세계가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 알려주고 있다.

 

일정부분 이제 기존의 기계적인 세계관이 한계에 다가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 벗어남의 방법들을 그는 제시하고 있다.

최근의 철학 그리고 인문학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그리스 시대의 세계관과 그들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에 그도 동참을 하고 있고, 고대 시대의 인식틀과 자연에 대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동양의 불교적 세계관을 그는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변화가 이제 곧 이뤄지리라 전망하고 있는데, 그의 전망은 아쉽게도 아직까지도 이뤄지고 않고 있다.

 

그의 기독교적 그리고 기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지만 그가 예상하는 지금 이후의 시대에 대한 전망은 흐릿하고 애매한 점이 있다. 물론, 그가 미래학자도 아니고 그것을 예견하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엔트로피는 그가 어떤 시각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저작이며, 그가 이 시각으로 이후의 다양한 논의들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 육식의 종말 등)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세계관의 변화나 시대의 한계라는 부분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고,

앞으로의 세계는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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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 창조과학 A to Z 1318 시리즈
김재욱 글.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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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나?

 

이에 관한 답은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창조론’과 신의 존재로서 답을 찾기 보다는 생물학적인 방식으로 답을 찾는 ‘진화론’이 있을 것이고, 이 두 가지의 시각 중 어느 한 가지의 시각을 선택하거나 두 가지의 시각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윈으로부터 시작한 ‘진화론’의 시각을 받아들이고 있고, 일부 종교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인해서 ‘창조론’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는데, 신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창조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진화론’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동안 단순히 ‘신이 세상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성경에 적힌 글자 이상의 논의를 들려주지 못하고 있던 ‘창조론’의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최근 들어서 진화론의 이론적 난점들과 취약한 부분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영향력과 보다 과학적인(것 같은) 논리성을 갖고 있는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라는 시각으로 창조론의 입장에 무게를 두려고 하고 있다.

 

이런 의도로 출판된 ‘1318 창조과학 a to z’는 최근의 ‘창조론’이 갖고 있는 시각이 어떤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일 것 같다. 아직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최근의 진화론의 입장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이런 책부터 읽게 되었다는 점이 읽어야 하는 순서가 많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금방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는 뭔가 그럴 듯한 인상을 전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이 인간을 그리고 모든 것들을 말 그대로 관장하고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입장과 크게 색다를 것은 없다. 조금은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랄까?

보다 ‘창조론’의 시각에 논리력을 부여하고 있고, ‘진화론’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신의 존재와 그 전능함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도록 만들려고 하고 있다.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자연과 인간 등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혹은 자연발생으로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신을 부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과학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성경의 글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나 성경이 갖고 있는 부족한 설명을 보다 과학적인 논리를 갖도록 하고 있는 이런 입장이 미국의 보수적인 지역에서도 크게 호응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시각이 한국에서도 보여진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의외인 기분이었다.

 

‘창조과학’의 입장이 자신들의 시각이 옳다는 신념을 넘어서 ‘진화론’과 그리고 그와 같은 ‘과학적인 입장’을 혹은 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또는 신의 전지전능함에 의문할 수 있는 입장을 마귀와 악마의 간교로 말하고 있고 그들은 죽음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면 이들의 시각이 어느 정도인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과학적이라고 하지만 신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고 있는 과학만이 과학이라고 말하고 있고 나머지는 마귀들의 수작질로 바라보고 있다.

진화론의 몇몇 이론적 문제점을 파고들고 있지만, 최근의 진화론의 입장에는 관심이 없고 다윈의 그리고 당시 시대의 관점만을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엉뚱한 느낌도 갖게 된다.

 

창조과학도 기본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갖고 모든 것을 풀어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과학은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기독교가 얼마나 폐쇄적인 시각을 갖게 될 때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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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이 소중하다 - 한 뉴요커의 일기
대니 그레고리 지음, 서동수 옮김 / 세미콜론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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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항상 뒤늦기 마련이다.

그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는지를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지나간 뒤에야 얼마나 감미로운 순간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렇게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해서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욱 그 순간의 잔향은 남겨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잃게 된 다음에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진정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나는 무언가를 잊고 있을 것이고,

그 잊고 있음으로 인해서 잃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무언가를 잃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서야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날이 소중하다’의 저자 대니 그레고리에게 닥친, 그리고 그의 아내 패티에게 닥친 불행은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 속에서 함께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만드는 사건이었고, 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때까지와는 조금은 달라진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다시금 일상에서의 행복을 찾아가게 된다.

 

그들에게 놓여진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서

불행은 고민을 만들고,

고민은 좌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좌절은 깊은 번민에 빠지게 하지만

결국 그 번민을 받아들이게 되고,

익숙해지고,

그것은 일상이 된다.

그리고... 그건 그저 그런 일이 되어버린다.

 

저자 대니 그레고리는 이런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그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통찰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게 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고, 그 시선으로 본 자신의 삶과 주변만이 아니라 뉴욕에 대한 풍경까지 담아내고 있다.

 

잘 그렸다고 말하기 보다는 개성 있게 그렸다고 말하게 되는 그림들과

가볍게 읽히지만 때로는 책장을 덮고 잠시 고개를 들어 생각에 잠기게 되는 글들은 순식간에 읽혀지는 책이지만 좋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여운 속에서

난 내가 잃게 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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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재탄생
김상환.홍준기 엮음 / 창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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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라깡, 무의식의 시대를 열다

 

[제1부]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

[제1부]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 : 프로이트 · 라깡 정신분석학 : 이론과 임상

 

 

 

인문학 혹은 정신분석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끄 라깡 / 자크 라캉’에 대해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뿐이지 그의 이론과 논의에 접근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의 글도 어렵지만 그에 대한 글들도 지나칠 정도로 난해하게 설명을 하고 있고, 때로는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로 라깡과 관련된 글들은 ‘난해함과 어려움’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게다가 각각의 연구자와 소개자들이 용어도 제대로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의 연구를 적절하게 소개하고 깊이 있게 가져가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논의를 확장하고 있을 뿐인 것 같아서 더욱 어렵게 느껴지고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화려한 느낌이 들고, 흥미롭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읽고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머뭇거리게 되고, 정신분석인데도 실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 적용되기 보다는 지나치게 이론적으로만 혹은 정신분석 외적으로만 논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는데, 어쩐지 ‘멋지기만 할 뿐인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고 아마도 이런 기분은 그동안 ‘라깡의 논의’를 접하기 보다는 ‘라깡의 논의에 대한 논의’만 읽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오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라깡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최소한 어떤 순서로 혹은 어떤 방식으로 그의 논의를 파악해야 수월한지를 알려줄만한 연구자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관심을 말 그대로 관심으로 끝냈어야 했고, 한동안 관심을 갖다가 쉽게 잊혀지게 되었다.

 

이것은 국내에 라깡에 대한 각종 참고서들은 많이 출판되었지만 그가 써낸 글이 번역된 것은 단 두 권뿐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한국의 인문학계가 얼마나 엉망인지 혹은 폐쇄적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학자들과 각종 문화평론가들이 라깡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들게 되는 생각은 ‘이렇게 라깡에 대한 글들이 많은데 어째서 단 한권도 제대로 번역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생각뿐이라면 이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라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라깡의 재탄생’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쓸데없는 불평을 먼저 하게 되는 이유는 그만큼 라깡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지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이고, 라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국내 연구자들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자신감을 갖고 펴냈다는 ‘라깡의 재탄생’을 읽으며 들게 되는 생각이 기쁨 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는 뜻이다. 그의 저서를 한국어로 접하지도 못하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그의 이름을 내건 학회까지 있으면서 말이다.

 

최근 들어서 수많은 분야에서 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혹은 유사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비교하거나 연결하여 연구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으면서도 그의 주저라고 볼 수 있는 ‘에크리’조차 여전히 번역 중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조금은 우회하는 방법으로 라깡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누구도 제대로 라깡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라깡과 관련된 몇몇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개론서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의 가장 뛰어난 해석가라고 볼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도 많이 출판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게 되는 것 같다.

 

라깡의 전반적인 논의를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라깡의 재탄생’에 수록된 홍준기의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초 -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반가운 내용일 것이고, 라깡을 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놓치기 아쉬운 글이 될 것 같다. 라깡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라깡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가 어떤 논의를 하고 있는지 (그나마) 알기 쉽게 이해시켜주고 있고, 라깡에 대한 글들을(혹은 책들을) 접했던 사람들도 라깡의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을 (다시 한번) 이해할(재검토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어렵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라깡이 어떤 의도를 갖고 프로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딛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라깡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순서대로 알려주고 있고, 그가 어째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했는지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면서 그의 이론적 핵심인 ‘상상계, 상징계, 실재’와 ‘언어학(기표와 기의)’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이론에 도입했는지 그리고 항상 강조하던 ‘욕망과 향유’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그동안 국내에서 지나치게 이론적인 부분에만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간과되었던 임상적인 부분까지 라깡의 논의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한때는 들뢰즈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고, 온 사방에서 들뢰즈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최근에는 그에 대한 논의가 쑥 들어가고 대신에 요즘에는 슬라보예 지젝과 (덩달아) 라깡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라깡의 ‘세미나’가 번역되기도 해서 라깡에 대해서 그리고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보다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고 라깡거리고 지젝거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 조금이라도 라깡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혹은 관심을 갖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보다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좋은 연구서들이 그리고 번역서들이 출판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건 부탁이며, 요청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기 때문에 책의 제목인 ‘라깡의 재탄생’은 지극히 불만스러운 느낌을 갖게 만든다. 라깡은 한국에서는 탄생조차, 제대로 시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 : 1. 아직은 이해의 폭이 좁아서 2부와 3부에 대해서는 읽지 못했고, 아마도 한동안은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는 2부의 내용들과 같은 ‘라깡과 관련된 깊이 있는 논의들을’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래도 미정일 것 같다.

2.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라깡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글들을 읽은 다음에 그의 논의들을 접하는 방법이 가장 쉬운 방식일 것 같다.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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