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브라운 신부 전집 2
G. K. 체스터튼 지음, 봉명화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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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전집 2권 ‘지혜’는 내용에서는 브라운 신부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빼어난 관찰력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던 혹은 해결되기 어려운 사건들이 해결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1권과 큰 차이는 없으니 브라운 신부의 팬들이라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차이를 찾아내려는 예민한 독자들이라면 1권에 비해서 브라운 신부 개인의 심리 상태나 독백 혹은 혼잣말 등을 통해서 브라운 신부의 속마음을 조금은 독자들이 알 수 있게 내용을 진행시키고 있고, 그의 동료이자 조수와 같은 플랑보가 들쭉날쭉하게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와 함께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모험을 혹은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다.

 

1권에서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었다면, 2권에서는 브라운 신부의 비평적 관찰이 여전히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감정(사랑, 복수 야망 등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독특한 범죄 혹은 범죄에 대한 브라운 신부 개인의 언급에서 벗어나 그 범죄에 참여하고(되고) 있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나 심리적 갈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고 해야 할까?

 

이로 인해서 브라운 신부는 보다 냉소적으로 작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반응하게 되기도 하고, 보다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등 차갑고 건조한 느낌의 작품에 조금은 감정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싸늘한 유머 혹은 냉소가 작품의 곳곳에 새겨져 있으며, 그 당시에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여러 쟁점(거짓말 탐지기나 드레퓌스 대위와 관련된 스캔들 등)들에 대한 (브라운 신부와 플랑보의 입을 통한) 체스터튼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1권에 비해서 보다 작품의 재미가 더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개개인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브라운 신부의 언급들로 인해서 사람들에 대한 심리의 변화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다.

 

역시나... 무기력한 기분이 들 때에는 이런 범죄 소설을 읽는 것이 조금은 활력을 찾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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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안정남 옮김 / 한길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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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한지 오래된 책이고,

레비-스트로스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접하고 더 이상 묵혀두기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이제야 읽게 될 정도로 손이 가지 않는 책이었고, 어렵사리 읽으면서도 쉽게 읽혀지는 부분이 없고 이해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난해한 내용에 힘겹기만 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다 읽기는 했어도 도대체 뭘 읽었는지 한숨만 나오기만 했고,

읽은 것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그냥 읽었다는 것만 말하고 싶어지는 내용이었다.

 

그처럼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야생의 사고’는 우리가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미개인들의 사고와 문명인들의 사고간의 확연한 차이가 생각 이상으로 모호하고 근접해 있으며 그 사고의 차이를 (언어학적으로) 뜯어보면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언어학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저작이다.

 

이런 생각에 대한 강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 그는 미개인과 문명인의 사고 구조의 유사성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근거로 무언가를 항상 ‘분류’하고 ‘구분’함으로써 ‘체계’를 갖추도록 하려는 사고 구조의 유사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위해서 ‘신화’를 그리고 ‘토테미즘’을 분석하여 문명인의 사고와의 유사성을 알리려 하고 있다.

 

야생의 사고는 그저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무언가를 구성시키려고 하는 사고일 뿐이고 문명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사고 구조는 보다 환경 자체를 구성하려고 하는 사고의 차이일 뿐이지 그 구조 자체는 엇비슷하다는 입장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고, 그 전달 방식과 내용이 지나치게 난해하고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게 전달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충 그런 입장인 것 같기는 한 것 같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미개인이 갖고 있는 ‘신화’와 ‘토테미즘’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하나의 사고 구조와 체계가 어떻게 성립하고 있고 변환되고 있는지 그리고 문명인의 사고가 얼마나 이와 유사한 사고 구조를 갖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그는 당시에 누구도 도전하기를 꺼리던 사르트르의 입장에 대해서 비판하고 반박하며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을 뛰어 넘어 야생의 사고를 다시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존의 우월한 지위를 누리던 서구의 그리고 문명인의 사고 구조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기도 하고, 보다 넓게 생각한다면 보다 발전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수 있는 ‘야생의 사고’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어렵고 난해한 그리고 모호함이 느껴지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개인 그리고 문명인의 사고 구조가 갖고 있는 분류와 구분에 대한 집착이 보여주는 방식에 대해서 보다 다양한 생각을 해보도록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인류학과 역사학 혹은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다른 방식의 읽기도 가능할 것 같은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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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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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결백’을 처음 읽었을 때에 느꼈던 기분은 밋밋함이었다. 어둡고 긴장감 넘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 구성을 갖고 있는 방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쩐지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 구성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고, 2권 ‘지혜’ 까지만 읽고 더 이상 읽기를 그만 두었던 시리즈였다.

 

최근에 다시 한번 읽어볼 기회를 갖게 되어서 읽어보게 되니 이전 보다는 조금 더 매력적인 느낌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셜록 홈즈’ 시리즈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작품들에 비해서는 관심이 덜 가게 되는 기분이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브라운 신부의 매력을 보다 찾아낼 수 있기는 하겠지만 추리 소설을 건성으로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은 어딘가 허전하기만 하다는 말만 하게 되는 것 같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가 갖고 있는 장점은 그가 선함을 상징하는 ‘신부’라는 점에 있고, 그의 관찰력과 분석을 통해서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게 되는 것에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되는 과정과 결말에서 브라운 신부는 일종의 비평 혹은 재구성 과정을 통한 사건의 흐름을 설명하며 그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심리와 갈등에 대해서 애정 어린 언급을 하는 되는데, 그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체스터튼의 글을 읽은 다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 정도이다.

 

 

 

 

참고 :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장점은 아마도 아이러니 혹은 역설인 것 같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리고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선호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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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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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저서를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고 그가 가장 많은 고심을 거듭하며 써냈다고 하고 있고 그 자신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트랜스크리틱’을 읽으며 칸트와 맑스(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이 쉽지 않은 내용을 한번만 읽어서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하는 의견들이 쉽게 잊혀져서도 그리고 가볍게 다뤄져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인상적이고 기존의 칸트와 맑스에 대한 논의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들을 검토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지속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시차’를 언급하며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던 것을 깨달음으로써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고 구성되는 것에 대해서 중요성을 말하고 있고, 이런 방식을 통해서 그는 칸트를 그리고 맑스를 검토하려고 한다.

 

그는 칸트를 검토하며 맑스를 개입시고 있고, 맑스를 검토하며 칸트를 개입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들을 각자에게 개입시키는 강도는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유기적이지도 않다. 적극적인 개입이기 보다는 유사성과 함께 그들이 얼마나 이후의 연구자들의 평가와는 다르게 ‘사이’에 놓여 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 같은데, 조금은 더 그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실천성’에 대해서 보다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어째서 보다 비중 있게 서로를 언급하고 개입시키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과 관심에 대해서 기존의 해석과 입장을 비판하며 그가 ‘물자체’를 통해서 ‘이성의 한계’를 얘기하기 보다는 반대로 가능성과 함께 이전의 철학자들과 그리고 그를 오해한 이후의 학자(가라타니 고진은 지속적으로 칸트와 맑스를 통해서 헤겔을 비판한다.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헤겔 이전의 칸트와 헤겔 이후의 맑스를 통해서 헤겔을 반박하고 있다)들에 비해서 그가 얼마나 지금 현재에 필요한 성찰과 전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칸트에게 접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칸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고 있거나 부분적으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들은 이해되기 보다는 막연하게만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칸트에 대해서 보다 알고 있었다면 그의 논의들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을 것 같지만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서 그의 논의들은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다.

그렇게 칸트를 논의한 다음에 가라타니 고진은 맑스를 논의하고 있고, 그는 기존의 맑스에 대한 연구자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그의 초기작들이 아닌 ‘자본론’을 중심으로 맑스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

 

한동안 맑스에 대한 해석과 논의가 경직적이거나 문화적 혹은 철학적인 논의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서 가라타니 고진은 보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분에 많은 집중을 보이고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이 갖고 있는 맑스에 대한 의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보다 실천적 그리고 개개인의 주체적인 것에 중요성을 두고 있음으로 인해서 기존의 맑스주의자들의 접근과는 다르게 생산과정 보다는 유통과정과 생산과정에서의 계급투쟁이 아닌 소비행위에서의 비폭력적 투쟁과 변화에 대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논의에 항상 ‘화폐’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맑스의 ‘프랑스혁명 3부작’과 ‘독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학위 논문까지 언급하고 검토하며 맑스가 갖고 있는 다른 자본주의에 포섭된 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시각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의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입장과 시각이 갖고 있는 풍부한 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이후의 연구자들(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알튀세르, 그람시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연구자들)이 얼마나 맑스에 대해서 게으른 해석과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는지를 지적하며 그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맑스를 통해서 맑스의 연구가 갖고 있는 진면목과 함께 여전히 지금 현재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라보는데 탁월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최근의 맑스에 대한 그리고 그와 더불어 레닌에 대한 논의들에 대한 일종의 특징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실질적인 실천에 대해서 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 같은데, 가라타니 고진도 변화를 위한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는 기존의 다양한 운동(여성, 동성애와 같은 개별적이고 비주류 운동들과 소비자운동과 같은 체제 내 운동까지)들이 어떻게 ‘어소시에이션(연대, 연합, 연맹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해야 하는지와 이를 통해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요소에 대항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입장은 보다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그의 논의는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논의와는 별개로 그의 입장과 해석이 갖고 있는 열린 가능성은 충분히 흥미롭고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통해서 칸트와 맑스에 좀 더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연구자들이 보다 폭넓고 다양하게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고 인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이미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맑스와 레닌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굉장히 많은 생각들을 그리고 맑스와 칸트에 접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만든 저작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도 자주 떠올려야 할 것 같고, 그들을 읽을 때 자주 챙겨봐야 할 것 같다.

 

 

참고 : 가라타니 고진의 인용들을 살펴보니 그동안의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내 연구자들은 반성 좀 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번역도 좀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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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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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87984593

 

 

 

영화 ‘더 리더’의 원작인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서 국내에 많이 알려진 베른하르트 슐링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인 여섯 개의 단편을 모은 ‘다른 남자’는 관심을 만족시켜주면서도 조금은 아쉬움도 느껴지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독일 출신의 작가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은 기본적으로 (남성의) 외로움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저에 깔고 있고, 그 감정을 풀어내는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통해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표현하는 과정 속에 자주 과거의 기억과 망각 혹은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꿈이나 현실적인 선택 등의 방식을 통해서 감춰진 감정과 기억을 들춰내면서 다시금 그것을 덮어버리거나 좌절감에 쌓이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우울함과 피로감 그리고 고독일 것이다.

 

그런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성격에 딱 맞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는 아주 만족스러운 소재였고, 이야기였으며 거기에 그 이야기 속에 독일이 갖고 있는 유대인과 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함께 엮어내면서 보다 인상적인 작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남녀(소년과 여성)간의 사랑이라는 점에 설득력이 없다는 불만을 말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불만 보다는 만족스러움이 더 컸을 것이니 그의 글이 갖고 있는 매력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에 큰 이견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남자’의 경우도 표현하기 어려운 혹은 잘 표현하지 않는 소년에서부터 노년까지의 남성(만)의 외로움과 사랑 그리고 그리움과 후회 등의 다양한 감정을 짧은 이야기들 속에 표현해내고 있고, 그가 보여주었던 이야기와 표현력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하고 조금은 관심을 잃게 되기도 하고 있다.

 

일관된 이야기 구성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자신에 맞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남자’와 ‘주유소의 여인’이 인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었고,

‘청완두’는 같이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이야기 진행을 통해 신선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뒤늦은 후회라는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끼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좋기도 했지만, 그래서 밋밋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와 감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에 대한 기억 그리고 독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집어넣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이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와 같은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편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남성이 갖고 있는 성적인 환상 혹은 어두운 감정에 관해서만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그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감정들을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가도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만족감을 느끼게 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좋아할 것이고,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좋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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