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가라타니 고진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저서를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고 그가 가장 많은 고심을 거듭하며 써냈다고 하고 있고 그 자신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트랜스크리틱’을 읽으며 칸트와 맑스(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이 쉽지 않은 내용을 한번만 읽어서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하는 의견들이 쉽게 잊혀져서도 그리고 가볍게 다뤄져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인상적이고 기존의 칸트와 맑스에 대한 논의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들을 검토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지속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시차’를 언급하며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던 것을 깨달음으로써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고 구성되는 것에 대해서 중요성을 말하고 있고, 이런 방식을 통해서 그는 칸트를 그리고 맑스를 검토하려고 한다.

 

그는 칸트를 검토하며 맑스를 개입시고 있고, 맑스를 검토하며 칸트를 개입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들을 각자에게 개입시키는 강도는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유기적이지도 않다. 적극적인 개입이기 보다는 유사성과 함께 그들이 얼마나 이후의 연구자들의 평가와는 다르게 ‘사이’에 놓여 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 같은데, 조금은 더 그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실천성’에 대해서 보다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어째서 보다 비중 있게 서로를 언급하고 개입시키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과 관심에 대해서 기존의 해석과 입장을 비판하며 그가 ‘물자체’를 통해서 ‘이성의 한계’를 얘기하기 보다는 반대로 가능성과 함께 이전의 철학자들과 그리고 그를 오해한 이후의 학자(가라타니 고진은 지속적으로 칸트와 맑스를 통해서 헤겔을 비판한다.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헤겔 이전의 칸트와 헤겔 이후의 맑스를 통해서 헤겔을 반박하고 있다)들에 비해서 그가 얼마나 지금 현재에 필요한 성찰과 전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칸트에게 접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칸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고 있거나 부분적으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들은 이해되기 보다는 막연하게만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칸트에 대해서 보다 알고 있었다면 그의 논의들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을 것 같지만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서 그의 논의들은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다.

그렇게 칸트를 논의한 다음에 가라타니 고진은 맑스를 논의하고 있고, 그는 기존의 맑스에 대한 연구자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그의 초기작들이 아닌 ‘자본론’을 중심으로 맑스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

 

한동안 맑스에 대한 해석과 논의가 경직적이거나 문화적 혹은 철학적인 논의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서 가라타니 고진은 보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분에 많은 집중을 보이고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이 갖고 있는 맑스에 대한 의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보다 실천적 그리고 개개인의 주체적인 것에 중요성을 두고 있음으로 인해서 기존의 맑스주의자들의 접근과는 다르게 생산과정 보다는 유통과정과 생산과정에서의 계급투쟁이 아닌 소비행위에서의 비폭력적 투쟁과 변화에 대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논의에 항상 ‘화폐’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맑스의 ‘프랑스혁명 3부작’과 ‘독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학위 논문까지 언급하고 검토하며 맑스가 갖고 있는 다른 자본주의에 포섭된 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시각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의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입장과 시각이 갖고 있는 풍부한 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이후의 연구자들(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알튀세르, 그람시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연구자들)이 얼마나 맑스에 대해서 게으른 해석과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는지를 지적하며 그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맑스를 통해서 맑스의 연구가 갖고 있는 진면목과 함께 여전히 지금 현재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라보는데 탁월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최근의 맑스에 대한 그리고 그와 더불어 레닌에 대한 논의들에 대한 일종의 특징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실질적인 실천에 대해서 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 같은데, 가라타니 고진도 변화를 위한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는 기존의 다양한 운동(여성, 동성애와 같은 개별적이고 비주류 운동들과 소비자운동과 같은 체제 내 운동까지)들이 어떻게 ‘어소시에이션(연대, 연합, 연맹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해야 하는지와 이를 통해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요소에 대항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입장은 보다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그의 논의는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논의와는 별개로 그의 입장과 해석이 갖고 있는 열린 가능성은 충분히 흥미롭고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통해서 칸트와 맑스에 좀 더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연구자들이 보다 폭넓고 다양하게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고 인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이미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맑스와 레닌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굉장히 많은 생각들을 그리고 맑스와 칸트에 접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만든 저작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도 자주 떠올려야 할 것 같고, 그들을 읽을 때 자주 챙겨봐야 할 것 같다.

 

 

참고 : 가라타니 고진의 인용들을 살펴보니 그동안의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내 연구자들은 반성 좀 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번역도 좀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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