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좋은 부모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성일 외 옮김 / 창지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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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정신분석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정신분석을 대표하는 프로이트와 라깡에 관한 저작들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채우고 있었는데,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관심이 조금 더 넓어져서 아동의 심리에 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되어서 간단하게라도 아동들에 대해서 그리고 부모들과의 관계에 관한 책을 찾던 중 고르게 된 브루노 베텔하임의 ‘이만하면 좋은 부모’는 나름 괜찮은 책으로 알려졌다는 평가를 보고 읽어보게 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번역에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게 되는 부분이 간간히 있었고,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읽혀지지는 않음에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읽게 되었는데, 전반적으로 아동들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동들의 ‘심리’에 집중하기 보다는 부모가 아동들을 ‘양육하는 과정 / 양육을 위해 필요한 바람직한 본보기’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특정 시기의 아동기가 아닌 무척 폭넓은 기간으로서 아동기(아동기기 보다는 아동-청소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체계적으로 시기적인 구분을 하고 있지 않아 난해하다는 기분이 앞서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심리학자 혹은 전문가의 입장에서 아동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않고 아동과 관련된 여러 경험들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이기 보다는 사례집과 같은 느낌이 강하기는 했지만, 많은 내용에서 흥미를 잃지 않도록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중반부에 ‘놀이’와 관련되어 논의하는 내용에서는 큰 관심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산만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여러 주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서 쉽게 읽혀지진 않았었다.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생각이 들게 될 때마다 찾아보면서 읽어가는 것이 더 잘 읽혀지고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종의 사례집이나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이 드는 내용 구성이라는 생각이고, 정신분석과 무의식에 관한 상세한 탐구가 아닌 심리학으로서 그리고 자아형성-자아심리학과 관련된 내용으로서 내용이 구성되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와는 거리감을 갖고 있는 내용이기도 해서 크게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기회에 다시금 읽어볼 기회가 생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에도 만족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관심을 갖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을 읽어 무척 힘들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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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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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경제침체와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논의들로 인해서 다시금 맑스(마르크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었는데, 그 활발함에 레닌에 대한 재검토가 더해지면서 좀 더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변화를 요구하는-독촉하는 논의들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다시는 꺼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레닌에 대한 논의들이 다시금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한데, 이런 레닌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 중 슬라보예 지젝의 위치는 무척 특별하고 인상적일 것이다.

지젝으로부터 시작해서 레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분명 지젝으로 인해서 레닌을 다시 접하게 되고, 새롭게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지젝 본인도 최근에 발표하고 있는 저서들을 통해서 자주 그리고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레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이 다가온다’는 이런 지젝의 관심과 최근의 논의가 어떤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지젝이 레닌을 끄집어내게 된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지젝은 레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보다는 레닌과 같은 시각으로 혹은 레닌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레닌을 논의하기 보다는 그를 구실로 자신의 논의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느껴지도록 의도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레닌을 하나의 구실로서 언급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아마도 모든 이들이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을 때조차 혁명을 꿈꾸던 레닌처럼 모든 이들이 혁명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는 현재의 시대에서 여전히 혁명을 꿈꿔야 한다는 지젝의 입장을 레닌을 통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젝은 그동안의 레닌에 대한 논의와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레닌을 재검토 하고 있고, 여느 때처럼 헤겔과 맑스, 그리고 라캉과 온갖 대중문화를 연관시키며 레닌을 옹호하고 재검토하며 그의 진정한 의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 지젝은 정신없이 온갖 사례들을 뒤섞으며 자신의 논의-수다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의 주장이나 논의보다 오히려 여러 예들이 더 인상적이고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젝의 레닌에 대한 논의는 일종의 해석일 것이고, 하나의 옹호이며, 약간은 지나침이 느껴지는 정당화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젝은 여러 방식을 통해서,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헤겔과 라캉과 기타 여러 학자들의 논의들을 레닌에 적용해서 다시금 레닌을 재정립시키고, 예수를 형식화한 바울처럼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라캉처럼 그리고 맑스를 형식화했다고 평가하는 레닌처럼 지젝은 레닌을 새롭게 형식화시키고 재검토하고 있고 자신처럼 레닌을 다시 보도록 하기를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지젝은 그동안의 레닌-스탈린 시대의 여러 문제점들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그런 방식으로 그 시대를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모습들을 거두도록 시도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지젝의 논의를 통해서 그동안의 레닌에 대한 그리고 스탈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이 조금은 재평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지젝의 의도는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다. 그 이유는 재검토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그들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그리고 철저한 긍정과 부정적 평가가 우선했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시각과 시도 그리고 의도와 분석을 지금 현재에 맞추려고 하려는 지젝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할 필요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얼마나 동의할지 모르겠다.

지젝의 결론은 간단히 말해서 레닌과 같이 지금의 이것과 저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자-선택하는 것이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지젝의 논의에서는 일종의 선언처럼 그리고 하나의 제시나 제안처럼 들려지고 있을 뿐 뭔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무엇은 없다.

하나의 전망이기 보다는 어떠한 외침처럼 느껴진다.

지젝은 레닌과 같이 혁명이 다가오게 만들기 보다는 끌어와야 하고 당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적 혁명 계급을 발견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지젝의 논의는 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존재를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결국 지젝은 새로운 레닌을 그리고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주장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와 상관없이 과언 무슨 방법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어지도록 만들지 궁금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 지젝이 무척 관심을 갖고 있는 레닌에 대한 논의는 조금은 파격적인 점이 있고 그의 전복에 대한 열망으로 써낸 무척 흥미로운 논의들로 가득하다. 물론, 그 흥미로움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은데, 과연 어디까지 그의 논의가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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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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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좋은 그리고 좋지 않은 평가가 뒤따르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지금과 같은 평가를 얻게 되는 첫 걸음과도 같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그의 거대한 야심의 시작임과 동시에 그의 현란하고 정신사나운 글쓰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젝의 글쓰기의 특징은 영화, 농담, 소설 등 다양한 예들을 통해서 자신의 논의를 이해시키고자 혹은 정당화시키려고 하는데, 일반적인 인문학자들의 예들이 보여주고 있는 막연함과 어려움과는 달리 조금은 익숙한 예들을 통해서 설명되기 때문에 무척 인상적이기도 하고 능수능란하게 인용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하나의 주제를 갖고 논의를 진행시키기 보다는 쉽게 정리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단순히 라캉에 대해서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학과 정치, 사회학에 대한 온갖 논쟁거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현란하고 흥미진진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글을 읽다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제대로 논의를 정리시키고 있기나 한 것인지 헷갈리게 되는 기분도 들게 된다.

 

지젝의 글이 종잡을 수 없다는 단점에 대해서는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젝과 같은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척 명확하게 자신의 논의를 정리하는 것도 아니니 사람들에 따라서 그의 글쓰기의 특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옹호자가 되기보다는 그의 팬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다. 즉, 그의 논의를 진지하게 검토하게 되기보다는 그의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높을 것 같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그의 논의는 분명 흥미로운 부분이 그리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고, 그의 생각을 이어받아 여러 생각들을 연이어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지젝의 논의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무척 다양한 주제와 논의들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여러 새로운 방식의 해석과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지젝은 우선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분석과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해석이 갖고 있는 유사성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자본주의의 물신주의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증상과 유사 /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의 논의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마르크스의 논의 중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를 재검토하며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의 논의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와 환상에 대해서 분석하려고 하고 있다.

 

지젝의 논의의 핵심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르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냉소적인 실천에 대해서 / 모순된 행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분석을 하려고 하고 있고, 그 냉소적인 행동의 극단적인 형태의 하나로 파악하는 전체주의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지젝은 그동안 활발히 논의되다 갑작스럽게 더 이상의 논의가 중단되었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다시금 논의를 이어지게 하려고 하고 있고, 마르크스를 재검토하고 라캉을 통해서 / 경유해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진행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지젝은 라캉과 헤겔 그리고 온갖 대중문화(영화, 문학 기타 등등)를 뒤섞으며 다양한 현대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어째서 우리들이 그저 그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지젝은 그렇게 행하는 이유를 이데올로기로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 이데올로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라캉을 통해서 / 경유해서 정교하게 분석하려고 하고 있다. 지젝은 그렇기 때문에 라캉의 논의들을 검토하고 있고, 라캉의 주체의 형성과정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어떻게 사회적인 주체들이 기존 사회의 질서에 혹은 호명에 동일시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지젝은 이런 분석을 상세하고 정교하게 이어가기 보다는 곳곳에서 다른 논의들과 함께 현란하게 혹은 산만하게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는 진행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고, 그 논의들이 무척 설득력이 있게 그리고 반대로 무척 설득력이 없도록 만들게도 하고 있다.

 

지젝은 반복과, 오해, 그리고 우연성을 강조하고 있고, 지금까지의 혁명에 대한 시도가 실패했다는 이유로 인해서 느끼게 되는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 인한 / 그 혁명으로 인한 지금까지에 대한 재평가에 대해서 보다 중요성을 말하고 지적하고 있다.

 

지젝은 라캉의 언어에 대한 논의에서 강조되는 메타언어는 없다는 명제를 강조하며 어떠한 외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고, 그 논의와 함께 라캉의 상상계 - 상징계 - 실재에 대한 설명과 그 논의를 다시금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와 연결시켜 이미 알면서도 알지 못하면서 /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는지를 반복하며 논의하고 있고, 그 논의를 진행한 후 숭고함에 대해서 칸트와 헤겔의 논의를 라캉을 통해서 / 경유해서 이데올로기와 숭고함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혼란스러운 논의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라캉이 주체가 자신의 결여를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하듯이, 지젝도 현실의 불가능성을 환상이 갖고 있는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과 함께 그 환상이 갖고 있는 불가피한 필요성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모순을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음에 대해서 여러 생각들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이처럼 여러 다양한 주제를 갖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그의 수많은 논의들로 이어지는 하나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끝맺음이기보다 이어짐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그가 어떤 주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펼침으로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들이 펼쳐져서 난장판이라는 생각도 들 때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 그의 관심들은 충분히 검토해야 할 필요들이 있는 주제들이고 내용들이다.

 

참고 : 지젝의 이후의 논의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의 논의들과는 많이 다른 결론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다른 저서들을 많이 읽지 못해서 자세히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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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ustry and Empire: The Birth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Paperback, Rev and Updated)
Hobsbawm, E. J. / New Pr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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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의 ‘산업과 제국’은 그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서 조금은 작은-한정된 규모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혁명 - 자본 - 제국 - 극단의 시대’와 같은 저서들에서는 거의 전세계적인 규모로 시대의 흐름에 따른 구조와 변동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했다면, ‘산업과 제국’은 영국이라는 단일 국가(물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조금은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발전과 몰락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가볍게 느껴질 수 있을 법한 기분도 들기도 하겠지만 역시나 에릭 홉스봄의 무척이나 상세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 정교한 논의의 진행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읽는데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그의 다른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짜임새 있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영국의 역사에 대한 흐름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사전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서 읽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되는 기분도 들었다.

홉스봄은 1750년대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통해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런 입장을 토대로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그는 1750년대의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 시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고, 그런 분위기와 환경과 배경 속에서 어째서 영국이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어째서 하필이면 영국이었고, 어째서 하필이면 그 시대에 일어났는지를) 지금까지의 여러 논의들을 종합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이런 방식의 홉스봄의 정리와 주장은 홉스봄의 다른 저서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자본주의의 팽창으로 인해 지금의 자본주의 환경이 형성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당시의 영국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홉스봄의 논의의 특징은 우선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환경에 대해서 종합적-전체적으로 파악-이해하려고 하고 있으며,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변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영국에서 최초의)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상세한 논의 후 산업혁명을 통한 급격한 변화-발전과 함께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다양한 경제적인 변화 이외의 변화들이 함께 이뤄졌는지를 논의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 속에서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상 및 사회-인간-계급관계와 생각-관념-습속 등의 수많은-다양한 변화들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직접적으로 변화가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농업에 대해서 검토를 하며 이전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사회구조를 다시금 확인시켜주고 있고, 1840년대 이후로 구분하는 2차 산업화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가며 ‘철도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교통의 발달’로 인해서 과거와 어떻게 근본적인 갈라짐을 보여주고 있는지 추가하여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로 인한 노동계급-급진주의-좌파들의 등장(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등장)과 함께 그와 정반대인 제국주의-보수주의로의 진행(사회구조를 공고화 시키려는 입장)을 다루면서 그 당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영국의 위치와 위상이 어떠한지를 함께 다루며 어떻게 영국이 그 당시에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는지를 인접 국가들과 비교하며 재검토하고 있다.

이런 영국(만)의 급성장과 누구도 비교대상이 될 수 없는 성공에 대한 논의 후 영국의 몰락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시키면서 홉스봄은 몰락의 여러 원인들 중 가장 특징적으로 생각되는 원인을 너무나 가파른 성공과 최초의 성공으로 인해서 그 이후의 성공의 진행과 이어짐 그리고 유지에는 오히려 (그 급격한 성공이) 단점이 되어버렸다는 점과 그 과도한 성공으로 이해서 오히려 앞으로의 성공을 등한시하게 되었다고 진단내리고 있다.

대공황과 1차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보다 몰락과 성장의 둔화는 확연하게 되어가고, 이로 인해서 계급들 사이의 그리고 사회-경제-정치적인 갈등들은 좀 더 깊어져만 가게 되었다고 주장한 후 1960년대의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의 성장과 몰락을 다룬 내용이기는 하지만 온갖 다양한 자료들과 통계들을 통해서 그동안의 논의들을 정리하며 자신의 논의와 입장을 정리하고 있고, 단순히 자료들을 토대로 한 내용 정리가 아닌 그런 분석에서만 머물지 않고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던 다양한 계급과 계층들의 여러 이해관계로 인한 발전과정에서의 삶의 모습까지 논의하며 단순히 경제-정치-사회적인 변화만이 아닌 하나의 구조와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모습까지 종합적인 방식으로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인상적이고 상세한 논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영국에 대해서 그리고 산업혁명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부분에서는 생각보다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었다.

홉스봄의 접근방식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무척 생소한 느낌은 들지 않았겠지만, 그의 접근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논의를 따라가다 길을 잃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다양한 내용들을 검토하고 있다.

힘든 독서이기는 했지만 최초의 산업혁명이 이뤄진 그리고 자본주의가 완성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국가였던 영국의 변화와 발전 과정은 분명 어렵다고 해도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내용일 것이며, 인접한 그리고 관련된 수많은 국가들이 어떻게 영국을 따르게 되었고 넘어서게 되었는지도 알아가야 할 것 같다.

읽고서 기억나는 부분은 무척 적었지만,

분명 언젠가는 홉스봄의 논의들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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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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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책들을 가끔씩은 읽어보지만 일부러 그런 책들을 찾기 보다는 선물을 받게 되어서 혹은 그냥 넘겨받게 되어서 읽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기 때문에(가족과 주변 사람들 중 기독교도들이 무척 많다) 읽게 되는 책들의 내용의 좋고 나쁨의 차이가 무척 큰 것 같다.

 

어떤 책들은 그럭 저럭 읽는 재미라도 있지만 / 어거지로 읽어내게 만들기라도 하지만,

어떤 책들은 읽어내는 것 자체가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엉망진창인 경우도 많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하는 윌리엄 폴 영의 (장편소설을 가장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담고 있는) ‘오두막’은 그 내용에 대한 동의와는 상관없이 충분히 읽게 만들게는 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오두막’은 기본적인 모양새는 소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그리고 수많은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담고 있을 뿐인 종교 서적이지만 기존의 종교 서적들과는 다른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무척 흥미롭게 생각되게 만든다.

 

우선 (범죄) 소설적 구성을 갖도록 해서 읽는 이들이 좀 더 이야기로서 이해되도록 만들고 쉽게 접근하고 설득될 수 있도록 (흥미를 갖을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상황(딸의 죽음)에 빠지도록 만들어 그가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한 회의와 물음들에 보다 공감하고 그가 설득되어가는 것에 함께 설득이 될 수 있도록 (다시 말해서 강한 설득력을 갖도록) 내용을 꾸미고 있다.

 

또한, 일반적인 유명 목사나 종교인, 권위자를 통해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신과 만남으로써 (그들을 통해서가 아닌 신이 직접 일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고 설득한다) 과거에 비해서 더욱 더 복잡해지게 되었을 뿐인 세상에서 어떻게 신을 이해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과거의 절대자의 모습과는 달리 친근하고 ‘우리들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의도하고 있고, 권위적이고 복종을 요구하는 모습이 아닌 유연함을 갖고 있고, 자신에게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되돌아와야 하는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예전과는 달리 직접 자신에게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구걸하는 모습처럼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동안과는 달리 조금 더 밀접하고 가깝게 느껴지게 만들고 있고, 신과 나 사이의 중간에 있는 종교적 권위자 혹은 중간자를 배제하며 다가오고 다가갈 수 있도록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오해로(만) 가득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독선과 광기 그리고 선동에 물든 최근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에 대한 반응이기도 할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대중적인 / 현대적인 방식의 종교개혁과도 같은 의미로서 ‘오두막’을 이해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일종의 소박함으로 채워진 믿음과 신앙), 그렇게 거창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반복되는 종교적 물음과 대답의 21세기 적인 방식 혹은 유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든 거대함과 선동 그리고 독선으로 가득한 최근의 흐름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분명 인상적이고 의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관심을 갖게는 만든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함으로 가득한 작품일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는 별의별 방법을 다 써먹는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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