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지점: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2
미란 보조비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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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구해서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엉망으로 읽어낸 암흑지점은 좋은 내용이고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평소 관심이 없던 분야이기 때문인지 조금은 어렵게 읽어낸 책이었다.

 

겨우겨우 읽어냈다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무언가 넋이 빠진 채로 읽은 기분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건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써내는 끄적임이 될 것 같다.

 

슬라보예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학파는 딱히 어떤 입장으로 내세우기 보다는 (단지 슬라보예 지젝과 미란 보조비치의 책만 읽었을 뿐이지만) 기존의 관점에 새로운-신선한 해석을 더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미란 보조비치의 경우 (슬라보예 지젝도 마찬가지지만) 기존의 철학적 관점에 어떤 다른 관점으로서 바라볼 수 있을지는 검토하고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개의 논문으로 이뤄진 암흑지점의 경우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근대 초기의 시선-입장-관점들을 다시금 검토하고 있는데, 근대 이전의 신의 시선을 어떻게 근대에 와서는 인간이 그 시선으로 변형시켜 바라보려고 하는지 혹은 그런 입장으로 올라서려고 하는지를 느슨한 방식으로 근대 이전부터 근대로 거슬러 올라오며 검토하고 있다.

 

첫 번째 논문에서는 스키티아 사람들이 믿는 신에 대한 사례를 검토하며 신이 갖고 있는 혹은 신이 보여주고 있는 비일관성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어떤 감정-욕망을 담고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정상적이라면 이해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보답에 대해서 논의를 마친 다음 두 번째 논문에서는 곤충에 대한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시각들을 살펴보며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는지와 탄생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와 죽음과 탄생의 무의미한 구분을 알아가며 근대 초기의 철학자들의 입장들과 함께 다뤄내고 있다.

 

아리송하고 무슨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이런 분석들이 이뤄지는지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암흑지점인데, 세 번째 논문을 읽으면서 그 난해함은 더욱 심해진다.

 

라캉의 입장을 통해서 사랑을 말한 다음 라캉의 입장과 스피노자의 입장을 상세하게 검토하는 세 번째 논문은 사랑과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교한 분석을 다시금 되짚고 있는데, 어째서-어떤 맥락에서 이런 정교한 검토가 이뤄지는 것인지가 의문스럽고 그 검토가 혹시나 사람의 감정까지도 철저하게 뜯어보고 분석해야만 하는 근대의 시각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곤혹스러움은 네 번째와 (이어지며 읽어야하는) 다섯 번째 논문을 통해서 괴로움으로 번지게 되는데, 말브랑슈의 입장에서 신과 신체 그리고 정신과 육체에 대한 지루할 정도로 정교한 이해를 설명해주며 신과 신체가 어떻게 분리되어 있으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논의들의 이어짐 이후 마지막은 미셸 푸코를 통해서 익숙한 제러미 벤담의 논의를 통해서 조금은 혼란스러움이 줄어들게 되는데, ‘감시와 처벌을 이미 약간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에 저자가 파악하려고 하는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을 통한) 의도와 목적이 어떻게 신적인 시선으로 향하려고 하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있으며, 제러미 벤담이 생각하는 세계관 속에서 범죄와 처벌 그리고 교정과 예방이 어떤 정교한 구분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신이 인간을 바라보던 심술궂은 시선과 인간이 인간에게 향하는 불신과 지배의 시선이 어떤 긴밀한 관련성이 있을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자가 암흑지점을 통해서 말하려는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건 결국 내 능력 탓이겠지만,

부족한 이해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불평도 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일정한 부분들을 가져오며 내 생각에 끼워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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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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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천명관의 고래에 대해서는 이미 읽기 전부터 많은 사연들이 있어왔다. 그걸 어떻게 하나씩 꺼내야 할지 고민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걸 떠나서 이 작품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로 인해서 이미 고래는 쉽게 잊기 어려운 작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처음 출판된 후 많은 (여전하기도 한) 화제와 호의적인 평가 속에서 고래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은 책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작품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언급들만을 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붉은...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커다란 단풍잎과 같은 색깔의 책표지가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기억에 남게 되었는데, 우선은 재미나다는 말을 다들 꺼내놓아서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기억은 좀처럼 오래 간직하지 않기 때문인지 쉽게 잊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읽어봐야겠다는...

지나치다 누군가가 읽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도 또다시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

그런 이어짐만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헛된 다짐들도 이어지기가 멈춰진 다음에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딱히 떠올려지지 않았을 때, 그 막연한 막막함 속에서 어수룩하게 소녀에게 꺼낸 말은 최근에 읽은 책이 있느냐는 한심하기만 한 질문이었고, 소녀는 마치 단답형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이 고래를 읽었다고 짧게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물음도 없었고, ‘고래에 대한 소녀의 간단한 감상도 없었던... 묻고 대답하고 그걸로 끝이었던 대화였기 때문에 그건 당연히 잊게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인지 여전히 기억에 남겨지게 되는 책이 되어버렸다.

 

과연 소녀는 고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제는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이런 딱히 기억할만한 기억들이 아니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기억나고 생각되는 고래(반드시까지는 아닌... 별 수 없다는 말을 꺼낼 정도는 되는...)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순간이 되어서야 고래는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어버렸고, 그 이유가 어떤 약속의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의미심장한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무의미한 생각들은 어차피 불필요한 감수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 엇갈림 끝에 손에 쥐게 된 고래는 더더욱 빨리 읽으라는 뜻인지 그전에 읽고 있던 책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좀 더 빨리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다시 되찾기는 했다), 그런 빠른 쥐어짐과 맞물렸는지 흥미진진하고 생각 이상의 몰입을 만들어내며 그동안의 한국 소설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진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개인적인 소감으로 덧붙이자면 근자에 가장 재미나게 읽은 소설 중 하나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만큼이나 재미나면서도 이상한 감수성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요즘 자주 논의가 되고 있는 글을 통해서 영상을 접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시나리오를 소설로 만들어낸 느낌도 들게 되고, 재미를 만끽하다가도 갑작스럽게 묘한 감수성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어쨌든 이런 온갖 사연으로 가득했던 고래에 대한 얘기를 되도록 짧게 해보련다.

 

엄청난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게 되지만 막상 고래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무척 머뭇거리며 그저 재미난 책이라고 말하게 되기만 할 것 같다.

 

도무지 정리가 쉽지 않은 이야기의 펼쳐짐 때문에 이런 멈칫함을 느끼게 되는데, 온갖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뿌려지기도-뻗어나가기도 하면서 갑작스럽게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에 쉽게 정리가 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뻗어나는 과정을 그저 즐기게 될 뿐이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단지 간간히 불필요하게 뻗어나가는 경우도 느껴지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 쓸데없이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군더더기조차도 고래가 갖고 있는 묵직함을 손상시키진 못하고 있다.

 

고래를 읽으면서 느낀 기분은 막연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비슷한 분위기 혹은 정서가 느껴진다는 기분이었는데, 어떤 부분이 어떻게 그런 식의 기분을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저 이미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은 사람으로서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만 꺼내게 될 것 같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고래가 온갖 문화들의 영향 속에서 완성된 느낌을 갖게 된다는 말을 함께 꺼내게 될 것 같다. 소설과 문학, 영화나 음악 그리고 다른 수많은 것들이 하나의 작품에 뒤섞여 있다는 기분이 들게 되는데, 그건 단지 고래에서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중요성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만약 고래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거들 듯이 말을 건넨다면 단지 소설과 문학만을 즐긴 사람들은 고래가 만들어내는 재미들에 무척 부분적으로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얘기하게 될 것 같다.

 

고래의 구성은 결국 노파와 금복 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인물 속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연들과 이야기들 그리고 수다들일 것 같은데, 이야기는 언뜻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사적 경험(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독재로 얼룩진 근현대사 등등)을 비스듬하게 언급하고만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어떤 배경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그 시대적 배경을 뭉개듯이 고래에 가져와 마음껏 배치하고 구겨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일반적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이야기 흐름이나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묘하게 겹쳐져 있고 일부러 약간은 어그러져 있도록 의도한 것 같기 때문에 시간관념이나 세계관 그리고 실제 한국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조금씩 틀어지게 만들어놓고 있어서 작가의 생각에 따라 조금씩은 구불거리고 몇몇 순간들을 겹쳐놓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거기에 헐리우드의 서부영화와 기타 여러 문화적인 영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는 무국적 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되는 것 같다.

 

포스트모던을 꺼내들어 작품에 대해서 말하게 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굳이 그런 틀을 꺼내면서까지 고래(이야기로서의) 날뜀을 말하고 싶어지는 않게 된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보아서는 이야기를 위해서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하고 있다는 비난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비난을 내세우기 보다는 저자의 시각이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의 시선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에(혹은 냉소와 싸늘함 시선 속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평가를 조심스럽게 미루고 싶어지게 된다.

 

특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온갖 문장들이 옛말과 현대어 그리고 비속어와 외래어가 난무하고 함께 겹쳐져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읽기를 경험하게 되었고, 변화무쌍한 이야기의 진행 덕분에 흥겨움을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어떤 슬픔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비극의 가득함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면(‘고래에서 찾아낸다면) 계속해서 어떤 법칙들을 나열하고 알려주는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기도 한데, 온갖 운명들과 숙명들로 가득하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알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에 내몰려지는 모습들과 함께 장난스럽고 퉁명스럽게 던져지는 법칙의 나열이 각각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슬픔-운명과 숙명을 축약해서 알려주는 의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노파와 금복 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진행이기는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도 금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노파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고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있고, 춘희의 경우도 중심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되고(이야기가 부족해서 이야기를 쥐어짜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고난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걸 중심으로 놓기에는 부족함을 느끼기에(어쩌면 길고 긴 후일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금복이라는 존재가 중심을 잡으면서 나머지 인물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이어지는 느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노파와 춘희는 세상과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고립된-고독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금복은 세상과 싸우고 이겨낸 존재로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결말은 셋 모두 비극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고래가 어떤 특정한 개인-등장인물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 같다. 이 작품은 특정 개인이 중심이 아닌 온갖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고, 각각의 이야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펼쳐지고 접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뻗어나감과 모여짐을 즐겨야만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등장하고 사라지는지를 그리고 다시금 나타나는지를 이해해야만 할 것 같다.

 

한편의 복수극이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면 여러 편의 우화들을 합쳐놓은 것 같은 고래는 어떤 법칙들로 가득하지만 그 법칙들의 비극성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그리고 다시금 일어서는 더러운 팔자()에 대한 이야기들이겠지만 그 이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삶에 대한 끈질김을 보여주는 모습들로 인해서 더욱 강렬하게 기억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이야기는 계속되고... 삶도 계속된다.

 

거대함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혹은 행복을 꿈꾸지만 그 행복과는 멀어지기만 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고래는 단연 최고라고 말하게 되지만 이 능청스러운 수다에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가능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저 감탄하며 이 놀라운 작품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참고 : 1.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금복이 아닌 이 될 것 같다.

2. 쓸데없고 정리되지 않는 생각 한 가지. 근데, 과연 고래를 한국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고래는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한국의 역사적 경 험을 비스듬하게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한국 소설이기 보 다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보아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국제소설과 아시아소설과 한국소설 중에서 어떤 식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바보스러운 구분을 하게 되지는 않지만 단지 무언가 좀 더 요란스럽게 고래가 펼쳐놓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평가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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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세트 - 전3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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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0424535

 

 

언제부터인지 사회학과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만이 아닌 그림과 건축 그리고 그밖의 것들에 관해서 많은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관심은 커져가고 늘어날 수 있기는 하지만 과연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정답이 없으니... 그냥 마구잡이로 손에 잡히는 책들을 읽어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딱히 알게 된 것도 없고, 궁금증만 커지게 된 것 같다.

 

미학-그림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겨나긴 했지만 딱히 어떤 것부터 읽어야-알아야 할지가 난감했고, 미학-그림이라는 것이 이름부터 무언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서 겁먹은 아이처럼 무언가를 읽어내기 보다는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었는데(인터넷을 통해서 온갖 그림들을 찾아볼 뿐이었다), 그러던 중 손에 잡은 미학 오디세이는 그림도 많거니와 여러모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안도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읽어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시사평론가의 입장과 미학자의 입장이라는 2개의 입장에서 한국사회를 줄타기하는 저자인 진중권이라는 인물은 그 본인으로서도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가 써내는 미학과 사회평론 둘 다 사회와 미학에 대한 통찰력과 생각할만한 여러 고민들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본인이 이런 평가에 대해서 어떤 받아들임을 보여줄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움과 유쾌함 그리고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구성된...

게다가 많은 그림들 덕분에 좀 더 쉽게 알아먹기 쉽다는 장점이 많은...

 

미학 오디세이는 나와 같은 미학-그림에 대한 관심만 많고 아는 것은 신통치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안내서와 같은 책이었고, 여전히 그런 평가를 받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벌써 20주년이 되었나?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오랜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어쩌면 그만큼 세월의 흐름을 넘어선 보편성과 흥미를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뜻일지도 모르니 출판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는 평가는 (썩 훌륭한 방식의) 정당한 평가일지도 모르고 호의적인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접하게 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솔직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지만 이렇게 2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출판한 작가 노트를 읽어보니 조금은 기억들이 되살려지기도 하고 몇몇 개성들을 어렴풋하게 떠올려지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좋은 책이었고,

좋은 내용이었다.

그것을 부정할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대중성을 고려하면서도 다양한 이론적인 토대 속에서 나름대로의 고민들을 합쳐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미학 오디세이에 관한 좀 더 솔직한 후일담이자 여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 노트는 저자 본인이 어떤 관점과 문제의식 속에서 글을 써냈는지를 알려주고 있고,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던 저자의 의도를 좀 더 드러내놓고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내용도 고민했지만 형식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저자의 말에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미학 오디세이를 떠올리게 되기도 하고, 이미 책에서 논의되었던 부분을 되풀이해서 말해주고 있는 부분에서는 그 부분이 무척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읽었었는지를 되새겨보게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에둘러서 말하기 보다는 시원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 저자의 글쓰기가 여전히 부럽기만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수많은 것들을 멋지게 정리-배치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돈해내는 저자의 능력에 항상 감탄하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다시금 미학 오디세이를 읽게 될 것 같고 조금은 시들어진 미학에 대한 관심이 또다시 커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찾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기념하고 자축하는 작가 노트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미학 오디세이를 즐겁게 읽어낸 사람들을 위한 이르기도 하고 늦기도 한 저자의 (그답지 않은, 혹은 그답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한 소감문이 될 것 같다.

 

 

 

 

참고 : 새롭게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을 출판하게 된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블로그에 작성된 미학 오디세이 3’에 관한 서평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와서 흔쾌히[라고 쓰고... 저야말로 (넙죽)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사용해주기를 부탁했지만, 아쉽게도 편집 과정에서 서평이 누락되게 된 것 같다. 섭섭하지만... 워낙 다른 사람들이 더 좋은 글들을 썼다는 뜻 아니겠나? 좀 더 열심히 읽어보고 많은 것을 써보며 글재주를 키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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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더리스 브루클린 밀리언셀러 클럽 72
조나단 레덤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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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는 그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로 그득했다.

내가 직접 탐정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잠시 시간이 남게 되어서 별 수 없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들어가게 된 책방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펼쳐보다가 눈길을 끌어 구입하게 된 머더리스 브루클린은 언제나 애정을 갖고 있음을 말하게 되는 범죄소설 장르에 충실한 작품이면서, 성장소설의 특징도 일정부분 이끌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범죄조직의 하수인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 주인공 라이어넬이 갑작스럽게 살해를 당한 그(와 그와 함께하는 친구들)(마피아의 중간책인) 우두머리인 프랭크의 죽음에 관한 내용들을 밝혀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조금은 흔한 이야기이고 이미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식상한 기분도 들 수 있을 것 같지만 틱장애의 일종인 투렛 증후군이 있는 주인공 라이어넬의 독특한 독백과 대사가 인상적이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고아원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나면서 겪었던 경험들을 하나씩 꺼내놓으면서 단순한 범죄소설이 아닌 흥미로운 성장소설의 모양새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인지 과거의 기억들을 언급한 이후의 범인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은 특별한 인상을 남게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고아원에서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과 프랭크의 죽음으로 인해서 조금씩 균열이 생겨가고, 그렇게 생겨나는 갈등과 다툼 속에서 라이어넬은 무언가 의문스러운 점들을 찾아내게 된다는 진행은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만큼의 매력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좌충우돌하며 결국 사건의 실마리를 찾게 되고 숨겨졌던 진실을 밝혀지는 과정에서의 긴장감과 모든 진실들을 알려주는 내용에서 느껴지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은 다행히 몰입을 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중반 이후의 지루함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데, 거기에 더해서 투렛 증후군으로 인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던 라이어넬이 마지막에 가서 누구보다도 냉소적이면서도 씁쓸하고 허무한 기분 속에서 후일담을 얘기해주는 대목은 무척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도 전체적으로는 이렇다 할 인상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촘촘히 구성된 작품이기 보다는 조금은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 같다. 아울러 라이어넬의 투렛 증후군이 대사로서의 매력은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무언가 놀라움을 안겨주는 작품 속 장치로 활용되진 못하고 있다는 점도 꼽아야 할 것 같다.

 

간혹 멋진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놀라움으로 가득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모양새는 무언가 엉성한 기분을 갖게 만든다. 긴장감의 고조나 유지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진실 찾기의 과정도 어쩐지 라이어넬 홀로 강박 속에서 이뤄지는 헛된 노력처럼 읽혀졌을 뿐이었다.

 

다행히 그 헛되다고 생각되던 노력이 사건 해결을 위한 가장 큰 실마리를 찾아내는 노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그걸 알게 되었음에도) 그 지난한 과정이 매력적이진 못하게 느껴졌다.

 

프랭크의 아내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솔직하게 언급하는 내용과 그녀에 대한 애정과 함께 결국 함께할 수 없음과 기억으로만 간직해야 함을 이해하려는 내용에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사랑과 다른 여러 감정에 대한) 어떤 교훈을 얻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는 좋은 평가를 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작품이었지만 나름대로 혹은 부분적으로는 인상적인 진행과 내용-문장을 담아내고 있기에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큰 기대 없이 즐길 수 읽을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이것 저것 읽어볼 것들을 실컷 읽어본 사람들에게는) ‘머더리스 브루클린은 적당한 읽을거리가 될 것 된다.

 

 

 

 

참고 :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비정한 세상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감수성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이거나 도시를 떠나지 못함과 그 숙명과 운명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정신적 떠돌이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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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최주현 옮김 / 새만화책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페르세폴리스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48222599

페르세폴리스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51797498

 



그림 소설 페르세폴리스’ 2권은 1권의 마지막에서 가족과 헤어져 홀로 오스트리아로 향한 마르잔이 겪게 되는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힘겨움과 함께 여성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여러 육체적-정신적 변화들을 중심으로 2권의 전반부를 이끌어가고 있다.

 

여전히 야만으로 가득하고 종교적인 믿음만을 앞세우고 있는 지역 출신이라는 편견으로 가득한 시각을 접하며 많은 상처를 받게 되기도 하고, 마르잔의 여린-순진한 감수성을 이용하거나 혹은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되는 등 여러 힘겨운 시간들 덕분에 마르잔은 한층 강인해 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많은 슬픔과 혼란 그리고 방황을 하게 되기도 한다.

 

다행히 마르잔은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무언가를 알기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악으로 향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항상 어떤 교훈들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정신적-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결국 여러 도움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정 덕분에 다시금 좌절에서 벗어나 이란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된다.

 

간신히 건강을 회복하고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아 이란으로 향하게 되지만 도착하게 된 이란의 모습은 마르잔이 떠나기 전의 이란과는 너무나 달라진 풍경으로 가득함을 금세 깨닫게 된다.

 

지나칠 정도로 경직된 종교적인 관점과 남성우월적인 시선과 함께 차이를 용납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기만 한 사회를 경험하며 마르잔은 또다시 좌절하고 어디에도 마음을 놓을 곳 없이 그저 가족에게 위안을 찾을 뿐이고 뚜렷하지 않은 목적과 목표 속에서 자유를 찾게 될 뿐이다.

 

그런 정신적 방황과 혼란을 잠재우는 새로운 사랑은 마르잔으로 하여금 새로운 안식을 찾게 되지만 짧은 안식은 더 큰 고통과 후회만을 만들게 되고, 그 고통이 마르잔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되고 좀 더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마르잔은 다시금 이란을 떠나 자유를 찾아 새로운 각오로 유럽을 향하도록 만든다.

 

단순히 이란이라는 특수성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삶을 살아간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서만이 아닌 여성에 대한 보편적인 시선으로 사회구조가가 여성을 어떤 불합리함에 내몰리게 만들고 있는지를, 그런 위선과 편견 그리고 남성중심의 시각을 견뎌내고 이겨나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기울여야만 할지를, 특수한 경험들을 통해서 보편성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서구의 왜곡된 시선과 편견으로 가득한 시선이 아닌 이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이란의 역사적 혼란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좀 더 이란의 모습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여성으로서만이 아닌 한명의 인간이고 인격체로서 자신을 소중히 대하고 아울러 다른 이들도 자신을 대하듯 존중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이 놀라운 작품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마르잔이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얻게 된 소중한 깨달음들을 잘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여성주의 관점으로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으로서도

그리고 편향되고 왜곡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서도

무척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은은하면서도 통찰력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또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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