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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사실 천명관의 ‘고래’에 대해서는 이미 읽기 전부터 많은 사연들이 있어왔다. 그걸 어떻게 하나씩 꺼내야 할지 고민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걸 떠나서 이 작품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로 인해서 이미 ‘고래’는 쉽게 잊기 어려운 작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처음 출판된 후 많은 (여전하기도 한) 화제와 호의적인 평가 속에서 ‘고래’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은 책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 작품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언급들만을 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붉은...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커다란 단풍잎과 같은 색깔의 책표지가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유난히 기억에 남게 되었는데, 우선은 재미나다는 말을 다들 꺼내놓아서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기억은 좀처럼 오래 간직하지 않기 때문인지 쉽게 잊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읽어봐야겠다는...
지나치다 누군가가 읽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도 또다시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
그런 이어짐만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헛된 다짐들도 이어지기가 멈춰진 다음에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딱히 떠올려지지 않았을 때, 그 막연한 막막함 속에서 어수룩하게 소녀에게 꺼낸 말은 최근에 읽은 책이 있느냐는 한심하기만 한 질문이었고, 소녀는 마치 단답형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이 ‘고래’를 읽었다고 짧게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물음도 없었고, ‘고래’에 대한 소녀의 간단한 감상도 없었던... 묻고 대답하고 그걸로 끝이었던 대화였기 때문에 그건 당연히 잊게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인지 여전히 기억에 남겨지게 되는 책이 되어버렸다.
과연 소녀는 ‘고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제는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이런 딱히 기억할만한 기억들이 아니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되풀이해서 기억나고 생각되는 ‘고래’를 (반드시까지는 아닌... 별 수 없다는 말을 꺼낼 정도는 되는...) 읽어(내)야만 하는 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순간이 되어서야 ‘고래’는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어버렸고, 그 이유가 어떤 약속의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의미심장한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무의미한 생각들은 어차피 불필요한 감수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 엇갈림 끝에 손에 쥐게 된 ‘고래’는 더더욱 빨리 읽으라는 뜻인지 그전에 읽고 있던 책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좀 더 빨리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다시 되찾기는 했다), 그런 빠른 쥐어짐과 맞물렸는지 흥미진진하고 생각 이상의 몰입을 만들어내며 그동안의 한국 소설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진귀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개인적인 소감으로 덧붙이자면 근자에 가장 재미나게 읽은 소설 중 하나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만큼이나 재미나면서도 이상한 감수성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요즘 자주 논의가 되고 있는 글을 통해서 영상을 접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시나리오를 소설로 만들어낸 느낌도 들게 되고, 재미를 만끽하다가도 갑작스럽게 묘한 감수성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어쨌든 이런 온갖 사연으로 가득했던 ‘고래’에 대한 얘기를 되도록 짧게 해보련다.
엄청난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분명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게 되지만 막상 ‘고래’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무척 머뭇거리며 그저 재미난 책이라고 말하게 되기만 할 것 같다.
도무지 정리가 쉽지 않은 이야기의 펼쳐짐 때문에 이런 멈칫함을 느끼게 되는데, 온갖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뿌려지기도-뻗어나가기도 하면서 갑작스럽게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에 쉽게 정리가 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뻗어나는 과정을 그저 즐기게 될 뿐이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단지 간간히 불필요하게 뻗어나가는 경우도 느껴지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서 쓸데없이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군더더기조차도 ‘고래’가 갖고 있는 묵직함을 손상시키진 못하고 있다.
‘고래’를 읽으면서 느낀 기분은 막연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비슷한 분위기 혹은 정서가 느껴진다는 기분이었는데, 어떤 부분이 어떻게 그런 식의 기분을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할 것 같다. 그저 이미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은 사람으로서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만 꺼내게 될 것 같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고래’가 온갖 문화들의 영향 속에서 완성된 느낌을 갖게 된다는 말을 함께 꺼내게 될 것 같다. 소설과 문학, 영화나 음악 그리고 다른 수많은 것들이 하나의 작품에 뒤섞여 있다는 기분이 들게 되는데, 그건 단지 ‘고래’에서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갖고 있는 중요성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
만약 ‘고래’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거들 듯이 말을 건넨다면 단지 소설과 문학만을 즐긴 사람들은 ‘고래’가 만들어내는 재미들에 무척 부분적으로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얘기하게 될 것 같다.
‘고래’의 구성은 결국 노파와 금복 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심인물 속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연들과 이야기들 그리고 수다들일 것 같은데, 이야기는 언뜻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사적 경험(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독재로 얼룩진 근현대사 등등)을 비스듬하게 언급하고만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어떤 배경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그 시대적 배경을 뭉개듯이 ‘고래’에 가져와 마음껏 배치하고 구겨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일반적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이야기 흐름이나 세계관이 아니기 때문에 묘하게 겹쳐져 있고 일부러 약간은 어그러져 있도록 의도한 것 같기 때문에 시간관념이나 세계관 그리고 실제 한국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조금씩 틀어지게 만들어놓고 있어서 작가의 생각에 따라 조금씩은 구불거리고 몇몇 순간들을 겹쳐놓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거기에 헐리우드의 서부영화와 기타 여러 문화적인 영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는 무국적 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되는 것 같다.
포스트모던을 꺼내들어 작품에 대해서 말하게 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굳이 그런 틀을 꺼내면서까지 ‘고래’의 (이야기로서의) 날뜀을 말하고 싶어지는 않게 된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보아서는 이야기를 위해서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하고 있다는 비난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비난을 내세우기 보다는 저자의 시각이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의 시선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에(혹은 냉소와 싸늘함 시선 속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평가를 조심스럽게 미루고 싶어지게 된다.
특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온갖 문장들이 옛말과 현대어 그리고 비속어와 외래어가 난무하고 함께 겹쳐져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읽기를 경험하게 되었고, 변화무쌍한 이야기의 진행 덕분에 흥겨움을 느끼게 되기는 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어떤 슬픔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비극의 가득함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면(‘고래’에서 찾아낸다면) 계속해서 어떤 법칙들을 나열하고 알려주는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기도 한데, 온갖 운명들과 숙명들로 가득하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알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함에 내몰려지는 모습들과 함께 장난스럽고 퉁명스럽게 던져지는 법칙의 나열이 각각의 인물들이 겪게 되는 슬픔-운명과 숙명을 축약해서 알려주는 의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노파와 금복 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진행이기는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도 금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노파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고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있고, 춘희의 경우도 중심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되고(이야기가 부족해서 이야기를 쥐어짜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고난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걸 중심으로 놓기에는 부족함을 느끼기에(어쩌면 길고 긴 후일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금복이라는 존재가 중심을 잡으면서 나머지 인물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이어지는 느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노파와 춘희는 세상과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고립된-고독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금복은 세상과 싸우고 이겨낸 존재로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결말은 셋 모두 비극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고래’가 어떤 특정한 개인-등장인물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할 것 같다. 이 작품은 특정 개인이 중심이 아닌 온갖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고, 각각의 이야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펼쳐지고 접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뻗어나감과 모여짐을 즐겨야만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등장하고 사라지는지를 그리고 다시금 나타나는지를 이해해야만 할 것 같다.
한편의 복수극이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한다면 여러 편의 우화들을 합쳐놓은 것 같은 ‘고래’는 어떤 법칙들로 가득하지만 그 법칙들의 비극성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그리고 다시금 일어서는 더러운 팔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겠지만 그 이어지는 슬픔 속에서도 삶에 대한 끈질김을 보여주는 모습들로 인해서 더욱 강렬하게 기억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이야기는 계속되고... 삶도 계속된다.
거대함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혹은 행복을 꿈꾸지만 그 행복과는 멀어지기만 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고래’는 단연 최고라고 말하게 되지만 이 능청스러운 수다에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가능하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저 감탄하며 이 놀라운 작품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참고 : 1.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금복이 아닌 文이 될 것 같다.
2. 쓸데없고 정리되지 않는 생각 한 가지. 근데, 과연 ‘고래’를 한국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고래’는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한국의 역사적 경 험을 비스듬하게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한국 소설이기 보 다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보아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국제소설과 아시아소설과 한국소설 중에서 어떤 식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바보스러운 구분을 하게 되지는 않지만 단지 무언가 좀 더 요란스럽게 ‘고래’가 펼쳐놓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을 평가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