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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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과학의 고전’이라는 이상야릇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는 그다지 낭만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시각에서 즐길 수 있는 뛰어난 내용의 작품이다.

 

한 남성이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서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기억의 끈을 놓치려고 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반전소설로서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를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본 심리학자의 시각에서는 장기간의 관찰과 치료에 대한 임상자료로서도 읽어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끔찍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억을 쫓고 있는 모습과 그가 겪었던 생활들에 대한 때로는 담담한 때로는 좌절하는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간간히 학문적인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부상병 자세스키의 일기에서 정리한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해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지만 자세스키의 일기들을 읽어나가면서 그가 겪은 고통을 떠올리게 된다면 쉽게 읽어나가기도 힘들었다.

 

루니야는 자세스키의 글을 통해서 최대한 그의 현재 상태와 노력에 대해서 말해주고는 있지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서 보다 직접적인 개입을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의 글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서 사람들이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기억은 간간히 떠올려질 뿐이고,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고통스러울 뿐인데도 자세스키는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노력은 때로는 실망스러운 결말이기도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글쓰기에 매달린다.

 

25년간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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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한길그레이트북스 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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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제목이 워낙 눈길을 끌어서 읽게 되었다. 제목은 ‘혁명론’이기는 하지만 내용은 어떻게 혁명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해주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내용이었다면 당장 불온서적으로 찍혀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않았을까?

 

한나 아렌트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미국 (독립이 아닌)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과 자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혁명을 지배받는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복시키는 행위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을 혁명의 한 요소정도로 혹은 어쩔 수 없이 표출되는 폭력적 행위로서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과 함께 그 과정을 완성시키는 제도와 입법 그리고 새로운 권력과 권위의 창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입장에 있고,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베버나 기타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학자로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혁명론’에서 다룬 논의에 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녀의 논의에 호응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는데, 그녀는 미국 혁명이 혁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호의적이었지만 그 제도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애매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제도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인 고착화를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미에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판은 그러한 제도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연 그 법과 제도가 적절하고 공정하게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당장 1960년대 말까지 미국 내에서 있었던 인종차별과 그 외의 성적 소수자 및 여성차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적절한 제도와 법이 있다면 알아서 모든 것은 굴러간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논의를 보다 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쩌면 제도화를 통해서 하나의 순간의 혹은 사건으로서의 혁명이 지속성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종의 영구 혁명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정치제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만 근대사회의 다른 축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도 않고 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에 대해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부분적으로 혹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맑스(마르크스)주의와는 일정부분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해관계 없이 근대 사회의 혁명을 말하기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논의는 폭이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 말고도 아쉬운 부분은 그녀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홀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시각들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일 수 있기도 하겠고, 그녀가 독일과 유럽에서 경험했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가 인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독재와 공포정치가 있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으로 이어졌고, 상대적으로 다원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상호협조적인) 양당제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전반적으로 그녀는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옹호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제도적인 부분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혁명세력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정치적인 혹은 제도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민중들의 불만을 대신해서 표출하는 것에 급급했고,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의 독재가 이뤄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많으며 이후의 혁명들도 미국 혁명에서 본받는 것인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서만 무언가를 본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의견이 많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비판으로 인해서 미국 혁명을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 대해서 조금은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례로 하워드 진과 같이 미국의 정치와 혁명이 기본적으로 가진자들의(즉,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일어난 것일 뿐이며 전혀 일반인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의 입장으로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의견은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논의에서는 동조하기는 힘들었지만 부분적인 혹은 분석적인 부분에서는 꽤나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많은 논의였다. 자유라는 것을 소극적 / 적극적 자유로 나눠서 보다 폭 넓게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폭력과 혁명에 대해서 풍부하게 논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고, 로베스피에르, 마키아벨리, 토마스 제퍼슨 등 역사적 중요 인물들의 정치적 선택을 보다 잘 알고 있지 못하여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어려움을 느끼며 읽게 되었다.

 

아마도 위의 인물들과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알고 있다면 보다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내용을 모르는 부분에서는 읽는데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어떤 과정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는지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일부 지식만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읽는데 꽤나 힘겨웠다.

 

다수성과 대표성 그리고 평등 등 다양한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 혁명에 대해서 그녀가 갖고 있는 이상할 정도로의 편애는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또한 기본적으로 그녀의 논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읽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대 로마와 초기 기독교 사회에 대한 혁명세력들의 지속적인 관심의 이유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분석을 해주었기 때문에 조금은 당시의 시대를 생각하도록 만들고는 있다.

 

한나 아렌트는 책의 말미에서 자코뱅과 레닌의 볼셰비키의 예를 들며 혁명 결사들의 혁명 이전에 보여주었던 개방성과 함께 권력을 획득 한 이후의 폐쇄성과 독재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아마도 혁명을 꿈꾸는 혹은 진보적인 정치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 부분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현재의 정당제는 결국 과두정이고 엘리트 정치인들로 운영되어 일반인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결국 정당은 투표일에만 인민들을 대표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녀는 맑스와 레닌이 혁명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평의회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평의회에 대해서 혹은 최대한 직접적인 의사표시가 가능한 방식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녀의 논의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본인도 말을 했듯이 일종의 피라미드 형의 구조를 갖고 있고, 지극히 낙관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밑으로부터의 의견을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있으면서도 대표성을 잃지 않는... 일정 수준 이상의 평등성도 보장된, 과연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 정치를 할 수 있는 대안이 평의회일지 혹은 새로운 무엇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 없이 읽다가 조금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참고 : 혁명이라는 말이 원래는 ‘복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지극히 언어학적인 그녀의 설명에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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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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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68940288

 

 

 

이미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았기 때문에 덜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원작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이 작품은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아무래도 원작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는데, 역시나 원작은 영화보다 더 주인공 미하엘의 심리적 변화에 집중을 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혹은 못했던) 부분들을 소설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며 의문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약간이나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개인적으로 가장 의문스러웠던 부분인 ‘어째서 한나가 미하엘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는 소설에서도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미하엘도 다양한 이유를 찾아보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저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미하엘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도 별다른 소득은 없을 것이다. 그냥 그걸 받아들여야 이 작품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니까. 영화를 얘기하면서도 말했지만 그것도 사랑이고 사랑이라는 것이 특별한 절차나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도 그저 사랑인 것이다. 그게 슬픈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혹은 그들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도 그들은 그 사랑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소설은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미하엘과 한나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고 짧은 행복을 경험하는 시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갑작스런 그녀의 부재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미하엘의 심정과 그것을 잊게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부에서 미하엘은 과거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과 육체적인 매력으로 인해서 한나에게 큰 끌림을 느끼고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육체적인 관계와 함께 그런 관계 이외에 서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소년에게 부탁하는 ‘책 읽어주기’를 통해서 그들의 관계는 보다 더 발전된 관계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숨겨야 한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점점 더 파국을 향해가고 그들의 관계에서 고통과 사랑 그리고 수많은 감정들이 함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에 따라서 30대 중반의 여성과 10대 소년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설정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소설을 다 읽고,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알려줘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설정만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자세하게 그들의 육체적 관계를 묘사했냐고 되묻는다면 따로 해줄 말이 없다.

 

한나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1부에서는 전반적으로 미하엘이 그녀를 통해서 행복을 그리고 사랑을 알게 되어가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소설의 모습을 갖고 있다.

왕성한 성적 욕구와 함께 그녀에 대한 집착과 여성으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남녀관계와 모자관계가 약간은 섞여 있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작가는 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10대 소년이 갖고 있을 성적 욕구와 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2부에서는 한나가 사라진 다음에 그녀를 추억하고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미하엘의 모습과 우연히 선택한 학과(법학)와 이를 통한 세미나로 인해서 다시금 한나와 재회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과거 나치 친위대였으며 이로 인해서 그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한나를 만나게 된다. 아마도 원작과 소설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내용은 2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내용이 달라진 이유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2부에서의 대부분의 내용이 미하엘이 한나가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 대한 과거와 그리고 수치라고 생각했던 나치 시대에서의 그녀의 모습으로 인해서 갈팡질팡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시대에 대한 거부감의 뒤섞여서 점점 더 미하엘은 혼란스럽게 되어가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점점 더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보다 더 극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소설은 긴장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극적이기 보다는 냉정하게 이끌려고 하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어째서 아버지에 대한 묘사를 전혀 담지 않았는지 궁금했었는데, 역시나 원작에서는 미하엘과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미하엘이 아버지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은 색다른 부분은 영화에서는 크게 부각되었던 세미나를 진행하는 교수와 동료 학생들의 관계를 소설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교수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고, 영화에서 동료 학생들과의 논쟁들도 전혀 다루지 않고 있어서, 아마도 소설에서의 미하엘의 생각의 흐름들과 고민들로 인한 결론이 영화적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그런 식으로 보다 외향적으로 처리했던 것 같다. 또한 재판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수용소에서 한나가 소녀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했다는 증언 부분에서 한나가 미하엘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재판 도중 뒤를 돌아보며 그를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서 처리하고 있는데, 영화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하엘의 태도일 것이다. 영화는 그의 모습에서 조금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소설은 그가 보다 고립된 느낌을 갖게 만들고 그의 고민들을 보다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은 한나와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기 때문에 보다 복잡하게 다가온다. 여전히 독일인들의 머리 안에서 깊이 남겨져 있는 나치 시대의 기억과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막연한 어려움을 이 작품에서 설득력 있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어느정도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고민들과 그 고민들에 대한 미하엘의 선택에 대해서 동의할 사람들도 있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하는 것이지 원작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별로 소득이 없을 것 같다.

 

한나는 결국 종신형을 선고 받고 그렇게 그들의 만남은 다시금 헤어짐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3부로 이야기는 넘어가고 재판 이후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와 삶을 살아가던 미하엘의 모습들과 그가 어떻게 법제사를 선택하였고, 새로운 사랑을 하고 이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어쩌면 3부의 내용들은 조금은 길고 긴 에필로그처럼 느껴지게 되는데, 내용이 조금은 허탈한 결말로 인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사랑이 행복한 결말을 맞지 않게 되리라는 혹은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글을 통해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와 그의 딸의 관계를 통해서 미하엘의 고립감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지만 소설에서는 이미 그의 독백과 심리적 갈등으로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딸에 대한 내용은 미안함을 갖고 있다는 방식으로 아이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가슴 아프다는 내용으로 단순하게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한나라는 존재로 인해서 다시금 그녀를 위해서 책을 읽고 그것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그리고 숨겨왔던 마음을 표현하고 그녀도 이를 통해서 글을 배우고 그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가서 어째서 미하엘이 계속 한나와의 만남을 미루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미하엘이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이 변화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혹은 과거에 집착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바뀐 그녀의 모습을 보기 싫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처리하고 있다. 그리고 짧은 만남과 그녀의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괴로움을 이 작품은 말해주고 있다.

 

짧은 분량의 소설이면서도 꽤나 복잡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읽으면서도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 부분들도 많은 것 같다. 게다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서 읽어가며 간간히 멍하니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지 않을까?

 

번역가가 말하듯이 이 작품은 은유적으로 나치 시대의 과거를 끌어안기 위한 내용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읽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일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나치 시대와 유대인 학살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전혀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나치 시대에 대한 몇몇 책들을 접하고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자료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점점 더 그 시대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원론적인 혹은 누구다 대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답을 하라면 그건 무척 쉬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고,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 문제와 나치 시대에 대한 문제는 특히나 대답하기 힘들다. 혹은 곤혹스럽다.

 

쉽게 대답하는 사람에게 혹은 그걸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나가 재판장에게 물었듯이 ‘당신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주고 싶다.

그것에 대해서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그 시대와 그 수많은 것들은 내게 있어서 답을 미루고 싶은 문제로만 남겨져 있다. 나 자신도 과연 그것에 대해서 내 자신의 품위를 타인을 존중하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건 솔직히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존엄함을 갖고 살아가기란 생각 이상으로 힘들다.

 

사랑과 사랑에 대한 추억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집착과 같은 개인적인 감정과 함께 역사에 대한 혹은 시대에 대한 입장까지 이 작품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잘 버무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그 짧은 사랑이 그들의 삶에서 큰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또 얼마나 그 추억들을 통해서 행복을 느꼈는지 알고 있기에 이 작품은 여전히 내게 있어서는 소중한 작품일 것 같다.

 

 

 

참고 : 지금껏 아우슈비츠는 독일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 있다고 한다.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또 이렇게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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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 한길그레이트북스 94
앤서니 기든스 지음, 임영일 외 옮김 / 한길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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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앤서니 기든스에 대해서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저작 중 구입해 두었던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이 있어서 그동안 미루고만 있던 책을 펼치게 되었다.

 

현대 사회학자들 중에서 고전 학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알려진 기든스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기 보다는 최대한 그 학자의 사상의 흐름을 설명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은 입문서로서 좋은 내용으로 이뤄져 있는 것 같다.

 

그동안 고전 학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어려운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사상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은 (사회학자답게) 맑스(마르크스), 베버 그리고 뒤르켕인데, 사회학자답다는 말이 우선 나오게 되고, 사회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조합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베버와 뒤르켕보다는 맑스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의 조합에 보다 더 관심을 갖기 마련인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의 논의는 조금은 생소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보다 철학적인 방식이 아닌 사회에 대한 분석의 방법으로는 베버와 뒤르켕이 더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유독 다뤄지지 않고 있지만 생각해 본다면 꽤나 중요한 학자인 베버와 뒤르켕의 사상의 핵심들을 그들의 사상의 흐름에 따라 논의를 해주기 때문에 조금은 어려운 그들의 논의들을 잘 알려주고 있고, 각각의 학자들의 사회에 대한 시각을 잘 파악해주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회와 세상을 이해했고, 당시의 역사적 흐름에서 그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들려주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맑스를 중심으로 베버와 뒤르켕을 대조시켜 논의의 핵심들 중에서 그들이 어떻게 입장의 차이를 갖고 있었는지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워낙 방대한 저작을 남긴 학자들이기 때문에 보는 이들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축약했거나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되기 시작한 혹은 이제 고전 사회학자들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는 꽤 쓸만한 구석이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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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진중권의 발언들은 조금은 선정적이고 과격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가 표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분명히 기분 나쁘게 듣게 될 것이고, 그의 생각에는 동의해도 그의 발언이 조금은 격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그의 발언에 조금은 민감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니 그의 말투에 그다지 기분 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혈기가 넘치던 2002년에 발표한 ‘폭력과 상스러움’은 그가 여전히 악에 바친 듯이 싸우고 있는(때로는 진흙탕인줄 알면서도 그는 뛰어든다) 수구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여전히 사회에 대한 권력을 움켜잡고 있는 조선일보의 만행들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세력 그리고 그런 세력에 기생하고 있는 자유주의라고 자처하는 보신주의자들에 대해서 그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고, 다양한 곳에 기고한 글들이라 조금은 통일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참여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사회가 그리고 지식인이 보여주어야 할 모습들에 대한 모색과 자신만의 결론도 내세우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체형성과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짧은 분량이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기 때문에 그의 다양한 시각들(에세이스트와 저널리스트로서의 시각과 학자로서의 시각)을 살펴볼 수 있다 .

 

이후의 그의 저작들이 미학에 관한 책들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국인은 어떻게 권력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꾸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후의 그의 관심들을 조금은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그의 주된 비판세력은 수구기득권 세력이라고 불리는 자들인데, 그들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넘어서서 유사 파시즘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 그는 큰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 세력이 현재 모든 곳에서 권력일 움켜잡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망도 그리 밝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한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성이 없다는 것을 그 자신이 우선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되도록 그는 비슷한 주제의 글들을 묶어두고 그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는 방식을 취해서 보다 통일성을 만들어내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이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논의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에 관한 장이 가장 인상 깊었다.

 

홍세화, 진중권, 김규항, 박노자 등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2000년대 초부터 그들의 발언과 의견들에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지적하는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고 보다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것에서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고, 사회가 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불편하지만 타당한 그들의 의견에 조금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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