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렙 ㅣ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4063150
‘픽션들’과 함께 보르헤스의 작품들 중 가장 최고작으로 꼽히는 (다시 말해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알렙’은 ‘픽션들’과 항상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은 작품이고, 그렇기 때문에 두 작품의 엇비슷함과 차이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두 작품의 비슷한 점을 찾기 보다는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에 따라 읽는 방식이 다른 법이니 그런 것에 대해서는 참고나 하면서 읽으면 될 것 같다.
어차피 읽는 것은 각자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걸 잃어가며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픽션들’이 좀 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혹은 하나의 소설-이야기 속에) 구겨 넣고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지켜보도록-경험하도록 만드는, 무언가 알다가도 모를 느낌의 기분으로 가득하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면, ‘알렙’은 좀 더 구체적이고 어떤 이야기의 틀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완성된 느낌을 갖게 되고 각각의 특징들이 명확하게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겹쳐져 있음으로 헷갈려지게 되지만.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다시 읽어보게 만드는 현기증을 만들어내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픽션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야박한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알렙’을 먼저 경험했다면 이런 평가를 하게 될 수 있을까?
앞선 이야기가 과연 무슨 이야기였는지, 어떻게 진행되어서 지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 항상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발한 재주가 있는...) 보르헤스이지만 ‘알렙’은 좀 더 명확하게 미로에서 헤매는 느낌을 만들기 보다는 이번에는 어떻게 뒤엉켜내고 뒤틀어버릴 것인가? 라는 기대와 궁금증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픽션들’에 비해서 좀 더 읽기가 수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보르헤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묘한 세계를 마음껏 펼쳐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엠마 순스’와 같이 냉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러면서도 어쩐지 퉁명스럽고 어떤 방식으로도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엄격하게 입장에서 전달하려고만 하는... 하지만 계속해서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하는... 좀처럼 어떤 글쓰기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보르헤스만의 독특한 글쓰기로 완벽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경탄하게 되며 계속해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소설-이야기도 있지만 자주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신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겹쳐내기도 하는 등 여러 관심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설-이야기로 완성시켜놓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엠마 순스’나 ‘아베하깐 엘 보하리, 자신의 미로에서 죽다’, ‘기다림’, ‘문턱의 남자’와 같은 작품들이 좋았기는 하지만 보르헤스는 개인적으로 그런 작품들에 대해서 (‘엠마 순스’를 제외한다면) 투덜거리듯이 냉소적으로 별달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라는 듯이 알려주고 있어서 어쩐지 ‘알렙’이 그로써는 전체적으로는 불만스럽게 느껴진 작품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속해서 비교를-비교만 하게 되는데, ‘픽션들’이 어쩐 형체를 만들어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듯이 ‘알렙’의 작품들을 의도했지만 결국 그런 작품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알렙’도 ‘알렙’ 나름대로 보르헤스의 작품들 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작품이고 여러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겠지만 ‘픽션들’을 생각한다면 무언가 완성된 작품이기 보다는 좀 더 다듬어내고 고민하면서 완성하려고 했던 느낌도 갖게 된다.
하지만 과연 ‘픽션들’처럼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힘겹기만 한 작품으로 완성했다면 어떤 기분으로 읽게 되었을까? 지금과 같은 느낌과는 분명 달랐을 것 같다.
‘알렙’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그의 작품)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서 가장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작품처럼 되어버리는 것 같다. ‘픽션들’로 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과 같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알렙’이 그렇게 어딘가로 향하기 위한 발판과도 같은(과정에 불과한) 작품일지는 의문이다. 분명 ‘알렙’은 ‘알렙’에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귀한 순간들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좀 더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신비함을 적게 느끼게 될 뿐이다.
모호함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게 불만스럽게 느껴져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 더 풍요로워지고 풍부해진 느낌도 든다.
‘픽션들’이 이론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발표하고 싶은 생각을 이야기-소설로 만들어내고 완성시켰기 때문에 그 충격과 놀라움이 여전하다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보르헤스의 생각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된다면(말하게 될 때 가장 앞서서 말하게 되는 작품이라면), ‘알렙’은 그걸 좀 더 유연하고 느슨하게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덜 실험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그것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꼭 그런 식으로 읽어야하고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교하게 되기는 하지만 꼭 비교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는 두 작품이 머물고 있는 눈길은 무척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더욱 절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항상 보르헤스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의문을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된다. 과연 보르헤스의 방식이 옳은 것인가? 글쓰기에 옳고 그름은 없겠지만 보르헤스의 방식에 너무 많은 관심을 (여전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많이 갖게 된다.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게 되어버려 쓰기와 읽기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를 잊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에 대해서 별의별 학문적 논의만 가득하게 되고, 글을 읽는 재미에 대해서도 온갖 별의별 해석을 내놓게 되면서 도대체 쓰게 될 때나 읽을 때나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고 써야만 할지를 고민하게 될 정도로 이론과 검토를 위한 쓰기와 읽기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보르헤스의 글이 혹은 그의 글을 읽는 것이 읽고 쓰는 가장 정점에 올라선 순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을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글을 읽는 본연의 즐거움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매력을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의 글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