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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의 걸작으로 불리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기나긴 이별'을 읽게 되었다.
너무 때늦게 읽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역시나 그의 작품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챈들러의 작품은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하드보일드와 느와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규정해주고 있는 작품이며, 사립탐정이라는 존재가 어떤 느낌과 외양 / 성격의 캐릭터인지 편견을 갖도록 만드는데도 가장 큰 일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멋진 책들 덕분에 사립탐정은 단순히 하나의 직업에서 벗어나 도시와 사회의 추악한 이면에 대한 르포기자와 같은 위치로 승격되게 되어버렸다.
혹은 자본주의 사회-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지막 남은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말타의 매'의 대실 해미트와 챈들러가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평가이겠지만.
책 뒷부분에 레이먼드 챈들러와 '기나긴 이별'에 대한 장문의 해설이 포함되어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보다 이해를 갖고 감상하게 되어서 '매니아라면 최소한 이정도는 되야하는구나'라는 느낌을 갖고 즐겁게 작품을 읽었지만, 역시나 해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길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필립 말로의 팬이나 챈들러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말로의 개인적인 감상과 다양한 묘사에 감탄을 하게 되겠지만 처음 접하는 독자들로서는 너무 감상적이고 느린 구성 때문에 긴장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레이먼드 챈들러 본인이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무에 그랬을까?
어쩐지 작품에서 나오는 작가는 본인에 대한 얘기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당연히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또다른 분신과 같은 캐릭터 필립 말로는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성격이고, 의외로 지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본인의 대사를 통해서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통해서나 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기는 한데,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사립탐정의 모습을 갖고 있다(반대로 그가 그려낸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서 써먹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필립 말로는 해설자들이나 여러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추악한 도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허우적 거리는지를 냉철하지만 학자나 철학자와 같이 분석적으는 보지 않는다.
아마도 냉소적으로 보면서도 그것에 개입하게 되는 필립 말로의 모습에 팬들을 열광하게 되는 것 같고, 항상 어떠한 것으로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도(돈 / 여자 / 권력은 그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사건의 중심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러한 것들에 무너지고, 좌절하고, 타협하는 우리들에게는 영웅과 같이 보여진다.
게다가... 그는 밝게 빛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처럼 추악하고 더러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다 현실적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 같다.
그가 간간히 내뱉는 사회에 대한 지독한 냉소나 통찰력은 어떤 내용에서는 소름으 돋을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정확한 평가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저작들은 범죄소설이라느 장르를 넘어서 일정부분 사회소설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제임스 엘로이가 항상 목표로 하고 있는 바로 그정도의 위치를 그는 처음부터 올라서서 시작했다.
추악한 세상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거나 혹은 함께 발을 딛고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되었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들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부유한 여인.
그리고 그 죽음을 밝혀나가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사회의 지배층부터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모두들 하나씩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필립 말로는 이들과 함께 도시의 미로속에서 고뇌를 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어째서 지금까지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아마도 자본주의와 도시화가 끝장나게 되는 이후에나 옛날 이야기처럼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챈들러-말로가 보았던 추악한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당신이나 나나 더러운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 그것에 면죄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말타의 매'를 재미나게 읽었는데,
이상하게 '빅 슬립'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고 있다.
이번에 '기나긴 이별'과 '호수의 여인'을 함께 구입했는데,
이 기회에 '빅 슬립'도 다시 읽으면서 한동안 레이먼드 챈들로-필립 말로에 빠져서 지내야겠다.
우리는 도시와 아직은 이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이별을 했다는 것은 이제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니까.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저작들은 여전히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본인도 지키지도 못하는 (되지도 않는) 고귀한 말들에 비해서 보다 현실적이고 통찰력을 제공한다.
나머지 책들은... 어떻게 구한다...
참고 :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은 작가'라기 보다는 '좋은 작가를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지만 그가 추천하는 작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편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내가 보다 빨리 피츠제럴드와 챈들로와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를 레이먼드 카버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