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이해 : 인간의 확장 - 맥루한 1
마샬 맥루한 지음, 박정규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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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디어와 관련된 수많은 소식과 일련의 상황들(그다지 기분 좋지는 않은 상황들) 덕분에 미디어와 관련된 책을 한권 읽어보려고 했는데, 정말 엉뚱하고 뜬금없는 책을 고르게 된 것 같다. 나름대로 연관이 있다면 있겠지만...

 

마셜 맥루한의 대표작인 ‘미디어의 이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문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저 문장을 인용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부분만 읽고 나머지 부분은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하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이해’ 첫 번째 장인 ‘미디어는 메시지다’ 이후의 내용에서는 위의 내용과는 별도로 문화와 사회 그리고 문명에 대한 맥루한의 다양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과 관련된 인용이나 의견을 찾아보기는 꽤나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시각과 의견이 워낙 도발적이고 난해하다는 뜻일 수 있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지나칠 정도로 인상적인 위의 말만 머리에 남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미디어의 이해’를 끝까지 읽었다면, 이 책이 단순히 미디어라는 것에 대해서만 논의를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맥루한의 다양한 의견에 대해서 한번쯤은 귀를 기울이고 생각에 잠기게 될 것 같다.

 

맥루한은 기본적으로 ‘미디어’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단순히 신문, 방송 등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의사소통 및 사회형태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그에게 화폐, 자동차 등등도 모두 미디어다).

맥루한의 시각으로서는 미디어와 미디어가 아닌 것의 구분은 명확하지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을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시키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럼으로써 본연의 의미는 더욱 애매해지겠지만.

그리고 맥루한은 어떠한 미디어든 사용자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의미와 조건이 일정부분 존재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서 TV는 바보상자가 될 수 있기도 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상자가 될 수 있기도 한다는 말은 맥루한으로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TV의 기본적인 성격은 어떠하고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미디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매우 논쟁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의 장들에서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논의를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다양한 미디어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읽어나가면서 그의 논의가 단순히 미디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에 대한 논의로 넓혀지고 있으며 언어학과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에 대해서 자주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학에 대해서(특히 구술과 문자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서 큰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미디어의 이해’에서의 맥루한의 논의는 매우 산발적이고 흩뿌려져있다. 마치 케이블 TV에서 본방송과 광고가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혹은 수없이 다양한 케이블 방송 채널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의 논의는 흩뿌려져있고 뒤섞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읽어나가면서 그의 논의를 따라가기는 매우 어렵고 집중하기가 힘들다.

 

또한, 맥루한은 미디어와 사회에 대해서 상세하고 세밀한 분석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미디어와 사회의 밑바탕인) ‘사회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의 ) 논의를 밝히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단순히 기술의 발달로(만) 미디어가 다양하고 확장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의 사회체제가(즉,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보다 폭발적으로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언어학부터 시작해서 문명에 대한 생각까지 논의하는 맥루한의 다양한 관심이 어째서 사회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회피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술의 발달 대부분을 긍정적으로만 묘사부하는 듯이 하고 있는데(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고 있지 않지만 꽤나 흥미롭고 흥분되는 어조를 숨기지 않는다), 그로 인해서 발생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기술 발달을 경험하게 되는 격차(선진국 후진국 간의 혹은 계급간의 격차)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냥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무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회피했던 것일까?

 

어쨌든 ‘미디어의 이해’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고, 그 의견이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한번 읽게 되면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참고 : 도대체 한글로 ‘맥루언’의 정확한 표기법은 어떤 것일까? 하도 여러 가지로 번역되는 그의 이름이라 검색하기도 귀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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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동서 미스터리 북스 26
뒤 모리에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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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모리에의 레베카를 접하는 방법은 두가지 정도일 것 같다.

첫 번째는 다양한 책을 접하다가 그녀의 책을 알게 되는 방법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히치콕의 영화를 통해서 이 소설을 알게 되어 원작도 읽어보기 위해서 접하는 방식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방식을 통해서 ‘레베카’를 일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접하게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레베카’는 히치콕의 영화와 이야기 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몇몇 설정들과 전후관계가 조금은 다르기는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로서는 소설을 읽으며 큰 차이점을 느끼지 않고 쉽게 이야기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다.

다만 원작에서는 결말 이후의 상황을 보여준 다음에 과거를 회상하며 작품을 시작하고 있고, 마지막 장면에서 덴버스 부인에 의해서 모든 것이 불타올랐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난 것인지 (약간은) 모호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원작은 600페이지에 가까울 정도로 내용이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작품의 주인공 ‘나(그녀의 이름은 다뤄지지 않고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의 심리적 갈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조금은 느슨해진 기분으로 읽게 될 것 같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주인공 ‘나’가 영화에 비해서 보다 어리숙하고 레베카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고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20대 초반의 여성이 20살 이상의 연상의 남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체로 결혼을 해서 전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거대한 저택의 여주인이 되었다는 것과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의 부담감, 그리고 쌓여져만 가게 되는 오해로 인한 혼란을 소설을 집요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연기와 짧은 몇 마디의 대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보다는 세밀하면서도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반대로 영화를 몰랐다면 꽤나 흥미롭고 기묘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직전에 벌어지는 속도감과 긴박감은 영화에 비해서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영화의 팬도 그리고 뒤 모리에에 관심이 있는 독자 모두 만족감을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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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 카이에 소바주 3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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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의 세 번째 강의인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는 약간은 어리둥절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제목 때문에 기존의 내용에서 벗어난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기는 하지만 기존에 논의하였던 내용의 벗어나지 않는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이다.

 

그의 이번 강의의 주된 내용은 마르셀 모스 증여론을 중심으로 맑스(마르크스)와 라깡의 이론과 연계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고, 과거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존재하였던 ‘순수증여’와 ‘증여’가 근대 사회에서는 점점 사라져가고 증여가 아닌 ‘교환’만이 남겨진 (황폐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고대 신화와 전설들을 통해서 과거 ‘순수증여’와 ‘증여’가 존재하던 시대의 모습들을 보여준 다음에 이제는 그런 모습이 사라져버리고 ‘교환과 경제’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버린 근대의 모습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사회는 교환만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닌 잃어버린 ‘순수증여’와 ‘증여’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한없이 파괴되어만 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도 또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의 작업물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이뤄지고 있고, 비슷한 결론과 (약간은 모호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반복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의견이기 때문에 불만보다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를 생각하게 만든다.

 

마르셀 모스와 맑스 그리고 라깡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끌어 간다는 말 때문에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있고, 맑스의 대한 부분은 어떻게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만을 가볍게 다루고 있고, 라깡은 그의 이론을 갖고 논의하기 보다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되었던 ‘보르메오의 매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크게 어렵게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경제만을 말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과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떠올리며 나카자와 신이치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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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아가씨와 철학자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경서 옮김 / 아테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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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개봉되어서 뒤늦게 피츠제럴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로만 알려졌던 그에 대한 인식이 보다 커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로만 단순하게 그를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이 알려졌듯이 미국의 ‘재즈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그 시대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는 소설들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첫 번째 단편집인 ‘말괄량이 아가씨와 철학자들’은 과거와는 단절하고 새롭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당시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선명히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허영심과 그 이외의 복잡한 내면 심경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낸 작가로만 치부할 수 없을 것 같다.

 

경제적인 이유도 많이 작용해서 그는 꽤나 많은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였는데, 모든 작품이 뛰어난 완성도는 아닐지라도 각각의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노련한 심리묘사와 함께 재즈시대의 어느 파티장에 참석한 것 같은 흥겨움과 나른함 그리고 피곤함이 담겨져 있다. 간간히 인생과 삶에 대한 통찰력 혹은 아이러니를 들려주기도 한다.

 

첫 번째 단편이기 때문에 이후의 작품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후에 찾아볼 수 있는 세련되면서도 어쩐지 나른함도 느껴지는 그의 글 특유의 느낌이 묻어나고 있다.

 

마치 봄날의 밝은 오후와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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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사이언스 클래식 4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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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과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 중 한명이고(북두칠성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런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과학과 천문학에 대해서 흥미를 느낄 수 있거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선택할 것 같다.

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교양 수준의 과학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고, 여전히 그 매력을 잃지 않는 좋은 책이면서도 과학과 관련된 책은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을 읽으라는 말을 살짝 의심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제목과 표지부터 무슨 내용에 대한 책인지 따로 펼쳐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검증된 인류의 기원부터 지금까지의 태양계와 우주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떤 것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을 알기 위한 과학이 어떻게 발전되었으며 몰락했었고 부활하였는지 읽는 이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도 꽤나 세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은 방대하고 부피도 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중간 중간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어렵게 느껴져서 대충 훑어보게 되었을 뿐이고 나머지 부분은 독자들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다양한 사례나 일화들을 포함시켜서 쉽게 포기하지는 않게 만들고 있다.

또한, 칼 세이건은 과학에 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자로서 전쟁과 기아 그리고 다양한 국가 및 국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임으로써 과학이 과학으로써만 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언급하여 일반인들에게 과학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게 만들도록 하고 있고, 과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단순한 연구와 발견만을 하며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약간은 지나친 낙관주의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충분히 분별력을 갖고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학과 우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딱히 어떤 것부터 읽어봐야 할지 난감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약간은(혹은 매우) 두껍기는 하지만 여유를 갖고 읽는다면 많은 기초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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