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발명 - 인류의 지知와 종교의 기원, 카이에 소바주 4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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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자와 신이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는 신화와 종교를 중심으로 우리가 고대 사회에 비해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쉽게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사고구조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사고구조가 변화가 되었는지 그는 되도록 쉽게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의 강의를 책으로 펴낸 ‘카이에 소바주’는 대학생들에게 입문서적으로서도 좋은 내용이고, 흔히 일반인들이 말하는 ‘교양’있는 책으로서도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Claude Levi Strauss’의 구조주의 시각을 갖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단지 레비 스트로스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마르크스)와 라깡 그리고 자연과학 등 다양한 영역의 시각을 잘 이어주고 있으며 복잡한 듯 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례와 근거를 제시하려고 하고 있다.

 

시리즈 4권 ‘신의 발명’에서는 현생 인류의 뇌조직의 변화를 통해서 얻게 된 ‘초월성’에 대한 직관과 함께 이를 통해 발생한 ‘정령’ 혹은 ‘스피리트’에 대한 개념과 ‘신’ 또는 ‘초월자’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신교로 그리고 보다 ‘특이한’ 방식으로 발전한 ‘유일신’에 대한 관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를 풀어내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신에 대한 관념이 생겨났고, 최초의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신의 발명’은 시리즈 2권 ‘곰에서 왕으로’와 유사한 부분이 많고, 나카자와 신이치 본인도 그 부분을 인정하며 일신교의 등장과 왕이라는 지배자의 등장 그리고 자본주의의 등장은 각각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간히 그런 생각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이후의 논의들은 이런 부분에 더 집중하지는 않을까?

 

그는 기본적으로 신에 대한 ‘예외적인’ 시각인 일신교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권위와 복종을 강요하는 일신교의 문제점과 그 시각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고 있는데, 이런 그의 요구가 조금은 이상적이고 유치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분명 충분히 의미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레비 스트로스의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맑스의 유물론적인 시각도 충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논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모른다고 해도 읽는데 힘겹지는 않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다른 시리즈처럼 자신의 생각을 쉽게 이해시키며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쉽게 그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일신교와 유일신에 대한 신앙이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는지를 보다 세밀하게 논의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서 조금은 부족한 느낌을 갖게 해서 아쉬움을 갖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일신교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그의 논의는 분명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별다른 회의를 갖지 않고 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자신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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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 -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의 현장에서 보내온 생생한 일상의 기록
레티시아 비카이으 지음, 정재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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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조용히 극장에서 개봉되었었고, 나름대로 좋은 반응을 일으켰던 ‘바시르와 왈츠를’을 감상한 다음에 그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특별히 자료를 구한 것도 아니고 관련된 책을 읽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그저 언젠가는 그쪽과 관련된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만 있다가 우연히 구하게 된 비카이으의 ‘봉기’는 흥미를 갖고만 있었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은 다가간 느낌을 갖게 된 것 같다. 별다른 생각 없이 읽게 되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고 단순히 역사나 정치적 흐름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인터뷰들이 간간히 담겨져 있어서 보다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봉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인디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주변국들과의 정치적인 관계와 경제적인 관계 그리고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일반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며 정치적 / 사회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일반인들의 삶을 다루면서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통해 자체적인 정부를 갖춘 다음의 팔레스타인의 내부적인 갈등과 문제점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과 관계 변화들에 대해서 1980년대 이전에 대한 내용은 특별히 다루지 않기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지만 일반인들의 생활상과 정치 및 국가기구의 운영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등 종합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강경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면서도 팔레스타인 내부의 갈등과 부패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객관적인 시각으로 양쪽의 갈등을 말해주려고 하고 있다.

 

여러 각도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쪽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꽤 흥미로운 내용일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양쪽의 지배 권력이 이 관계를 통해서 얻고 있었던 이점에 대한 내용과 이스라엘의 보수적인 정책 그리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부패와 문제점들이 일제강점기와 남북갈등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 모습들과 유사한 부분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이런 방식으로 팔레스타인 사회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많은 부분이 다르겠지만 보다 다양한 시각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구할 수 있게 된다면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책들을 몇 가지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보다 더 인상적이다.

 

 

 

참고 : 내용의 말미에 어째서 자살테러가 일어나는지, 왜 젊은이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짧게 다루고 있는데,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그런 모습들에서 좌절에 빠져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잠시 비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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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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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제국’을 읽으면서 하워드 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책을 한권 더 읽게 되니 그에 대한 관심은 열광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도 촘스키와 함께 매우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하워드 진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삶을 살아 왔는지와 삶을 살면서 어떻게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진보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들려주고 있다.

 

3개의 장으로 내용은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장에서는 그가 우연히 미국 남부에 있는 대학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흑인인권 운동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두 번째 장에서는 그의 또다른 관심영역인 반전운동에 참여하여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장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1980년대 이후의 진보운동의 침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뛰어난 학자이자 행동가인 하워드 진 개인의 삶을 말해주면서 삶과 함께했던, 그가 참여한 운동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며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전과 인권신장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이 자신의 철학과 생각 그리고 논의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가 강의실에서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을 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 저작을 통해서 단순히 읽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로 참여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재촉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좋은 의미에서) 편견을 갖고 있는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하워드 진은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낭만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인 입장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째서 자신이 그런 입장인지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하고 있다.

 

하워드 진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상세히 말하고 있으면서도 그 삶이 단순히 개인적인 삶만이 아니라 사회와 유기적인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의 이 저작은 자서전처럼 읽히면서도 하워드 진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미국 인권운동 그리고 반전운동이 어떻게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성공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행동하는 지식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그는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읽고 봄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행동할 수 있기를 실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다면... 실천과 행동에 더 큰 힘을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이라는 말은 쉽게 들릴 수 있지만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읽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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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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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과학의 고전’이라는 이상야릇한 서문으로 시작하는 ‘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는 그다지 낭만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시각에서 즐길 수 있는 뛰어난 내용의 작품이다.

 

한 남성이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으로 인해서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자신의 기억의 끈을 놓치려고 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반전소설로서도 읽을 수 있겠지만, 그를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본 심리학자의 시각에서는 장기간의 관찰과 치료에 대한 임상자료로서도 읽어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끔찍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억을 쫓고 있는 모습과 그가 겪었던 생활들에 대한 때로는 담담한 때로는 좌절하는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간간히 학문적인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부상병 자세스키의 일기에서 정리한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해설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지만 자세스키의 일기들을 읽어나가면서 그가 겪은 고통을 떠올리게 된다면 쉽게 읽어나가기도 힘들었다.

 

루니야는 자세스키의 글을 통해서 최대한 그의 현재 상태와 노력에 대해서 말해주고는 있지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서 보다 직접적인 개입을 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의 글들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서 사람들이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기억은 간간히 떠올려질 뿐이고,

읽는 것도 쓰는 것도 고통스러울 뿐인데도 자세스키는 자신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노력은 때로는 실망스러운 결말이기도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삶의 의미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글쓰기에 매달린다.

 

25년간 그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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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한길그레이트북스 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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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제목이 워낙 눈길을 끌어서 읽게 되었다. 제목은 ‘혁명론’이기는 하지만 내용은 어떻게 혁명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해주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내용이었다면 당장 불온서적으로 찍혀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않았을까?

 

한나 아렌트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미국 (독립이 아닌)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과 자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혁명을 지배받는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복시키는 행위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을 혁명의 한 요소정도로 혹은 어쩔 수 없이 표출되는 폭력적 행위로서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과 함께 그 과정을 완성시키는 제도와 입법 그리고 새로운 권력과 권위의 창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입장에 있고,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베버나 기타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학자로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혁명론’에서 다룬 논의에 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녀의 논의에 호응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는데, 그녀는 미국 혁명이 혁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호의적이었지만 그 제도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애매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제도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인 고착화를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미에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판은 그러한 제도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연 그 법과 제도가 적절하고 공정하게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당장 1960년대 말까지 미국 내에서 있었던 인종차별과 그 외의 성적 소수자 및 여성차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적절한 제도와 법이 있다면 알아서 모든 것은 굴러간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논의를 보다 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쩌면 제도화를 통해서 하나의 순간의 혹은 사건으로서의 혁명이 지속성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종의 영구 혁명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정치제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만 근대사회의 다른 축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도 않고 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에 대해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부분적으로 혹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맑스(마르크스)주의와는 일정부분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해관계 없이 근대 사회의 혁명을 말하기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논의는 폭이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 말고도 아쉬운 부분은 그녀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홀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시각들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일 수 있기도 하겠고, 그녀가 독일과 유럽에서 경험했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가 인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독재와 공포정치가 있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으로 이어졌고, 상대적으로 다원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상호협조적인) 양당제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전반적으로 그녀는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옹호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제도적인 부분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혁명세력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정치적인 혹은 제도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민중들의 불만을 대신해서 표출하는 것에 급급했고,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의 독재가 이뤄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많으며 이후의 혁명들도 미국 혁명에서 본받는 것인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서만 무언가를 본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의견이 많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비판으로 인해서 미국 혁명을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 대해서 조금은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례로 하워드 진과 같이 미국의 정치와 혁명이 기본적으로 가진자들의(즉,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일어난 것일 뿐이며 전혀 일반인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의 입장으로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의견은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논의에서는 동조하기는 힘들었지만 부분적인 혹은 분석적인 부분에서는 꽤나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많은 논의였다. 자유라는 것을 소극적 / 적극적 자유로 나눠서 보다 폭 넓게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폭력과 혁명에 대해서 풍부하게 논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고, 로베스피에르, 마키아벨리, 토마스 제퍼슨 등 역사적 중요 인물들의 정치적 선택을 보다 잘 알고 있지 못하여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어려움을 느끼며 읽게 되었다.

 

아마도 위의 인물들과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알고 있다면 보다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내용을 모르는 부분에서는 읽는데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어떤 과정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는지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일부 지식만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읽는데 꽤나 힘겨웠다.

 

다수성과 대표성 그리고 평등 등 다양한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 혁명에 대해서 그녀가 갖고 있는 이상할 정도로의 편애는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또한 기본적으로 그녀의 논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읽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대 로마와 초기 기독교 사회에 대한 혁명세력들의 지속적인 관심의 이유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분석을 해주었기 때문에 조금은 당시의 시대를 생각하도록 만들고는 있다.

 

한나 아렌트는 책의 말미에서 자코뱅과 레닌의 볼셰비키의 예를 들며 혁명 결사들의 혁명 이전에 보여주었던 개방성과 함께 권력을 획득 한 이후의 폐쇄성과 독재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아마도 혁명을 꿈꾸는 혹은 진보적인 정치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 부분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현재의 정당제는 결국 과두정이고 엘리트 정치인들로 운영되어 일반인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결국 정당은 투표일에만 인민들을 대표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녀는 맑스와 레닌이 혁명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평의회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평의회에 대해서 혹은 최대한 직접적인 의사표시가 가능한 방식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녀의 논의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본인도 말을 했듯이 일종의 피라미드 형의 구조를 갖고 있고, 지극히 낙관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밑으로부터의 의견을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있으면서도 대표성을 잃지 않는... 일정 수준 이상의 평등성도 보장된, 과연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 정치를 할 수 있는 대안이 평의회일지 혹은 새로운 무엇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 없이 읽다가 조금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참고 : 혁명이라는 말이 원래는 ‘복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지극히 언어학적인 그녀의 설명에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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