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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04년 6월
평점 :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제목이 워낙 눈길을 끌어서 읽게 되었다. 제목은 ‘혁명론’이기는 하지만 내용은 어떻게 혁명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말해주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내용이었다면 당장 불온서적으로 찍혀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않았을까?
한나 아렌트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여전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미국 (독립이 아닌)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과 자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혁명을 지배받는 계급이 지배하는 계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전복시키는 행위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을 혁명의 한 요소정도로 혹은 어쩔 수 없이 표출되는 폭력적 행위로서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과 함께 그 과정을 완성시키는 제도와 입법 그리고 새로운 권력과 권위의 창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극히) 부정적인 입장에 있고,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베버나 기타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학자로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혁명론’에서 다룬 논의에 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녀의 논의에 호응하기 보다는 부정적인 입장에 있었는데, 그녀는 미국 혁명이 혁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장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호의적이었지만 그 제도가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애매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제도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인 고착화를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미에 간략하게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판은 그러한 제도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연 그 법과 제도가 적절하고 공정하게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당장 1960년대 말까지 미국 내에서 있었던 인종차별과 그 외의 성적 소수자 및 여성차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적절한 제도와 법이 있다면 알아서 모든 것은 굴러간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논의를 보다 주의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쩌면 제도화를 통해서 하나의 순간의 혹은 사건으로서의 혁명이 지속성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종의 영구 혁명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미국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정치제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지만 근대사회의 다른 축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도 않고 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에 대해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부분적으로 혹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맑스(마르크스)주의와는 일정부분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되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이해관계 없이 근대 사회의 혁명을 말하기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논의는 폭이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 말고도 아쉬운 부분은 그녀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지나치게 홀대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시각들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일 수 있기도 하겠고, 그녀가 독일과 유럽에서 경험했던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가 인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독재와 공포정치가 있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으로 이어졌고, 상대적으로 다원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상호협조적인) 양당제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전반적으로 그녀는 미국 혁명에 대해서는 옹호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제도적인 부분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혁명세력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정치적인 혹은 제도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민중들의 불만을 대신해서 표출하는 것에 급급했고,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의 독재가 이뤄졌다는 점으로 인해서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많으며 이후의 혁명들도 미국 혁명에서 본받는 것인 아니라 프랑스 혁명에서만 무언가를 본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크게 실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한 의견이 많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비판으로 인해서 미국 혁명을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 대해서 조금은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례로 하워드 진과 같이 미국의 정치와 혁명이 기본적으로 가진자들의(즉,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일어난 것일 뿐이며 전혀 일반인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의 입장으로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의견은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논의에서는 동조하기는 힘들었지만 부분적인 혹은 분석적인 부분에서는 꽤나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많은 논의였다. 자유라는 것을 소극적 / 적극적 자유로 나눠서 보다 폭 넓게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폭력과 혁명에 대해서 풍부하게 논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고, 로베스피에르, 마키아벨리, 토마스 제퍼슨 등 역사적 중요 인물들의 정치적 선택을 보다 잘 알고 있지 못하여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어려움을 느끼며 읽게 되었다.
아마도 위의 인물들과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알고 있다면 보다 흥미롭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내용을 모르는 부분에서는 읽는데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어떤 과정에 의해서 혁명이 일어났는지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일부 지식만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읽는데 꽤나 힘겨웠다.
다수성과 대표성 그리고 평등 등 다양한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 혁명에 대해서 그녀가 갖고 있는 이상할 정도로의 편애는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또한 기본적으로 그녀의 논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지 읽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대 로마와 초기 기독교 사회에 대한 혁명세력들의 지속적인 관심의 이유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분석을 해주었기 때문에 조금은 당시의 시대를 생각하도록 만들고는 있다.
한나 아렌트는 책의 말미에서 자코뱅과 레닌의 볼셰비키의 예를 들며 혁명 결사들의 혁명 이전에 보여주었던 개방성과 함께 권력을 획득 한 이후의 폐쇄성과 독재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아마도 혁명을 꿈꾸는 혹은 진보적인 정치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한번쯤은 이 부분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현재의 정당제는 결국 과두정이고 엘리트 정치인들로 운영되어 일반인들의 의사를 제대로 표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결국 정당은 투표일에만 인민들을 대표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그녀는 맑스와 레닌이 혁명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평의회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평의회에 대해서 혹은 최대한 직접적인 의사표시가 가능한 방식에 대해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데, 그녀의 논의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이 본인도 말을 했듯이 일종의 피라미드 형의 구조를 갖고 있고, 지극히 낙관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밑으로부터의 의견을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될 수 있으면서도 대표성을 잃지 않는... 일정 수준 이상의 평등성도 보장된, 과연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 정치를 할 수 있는 대안이 평의회일지 혹은 새로운 무엇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 없이 읽다가 조금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참고 : 혁명이라는 말이 원래는 ‘복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지극히 언어학적인 그녀의 설명에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