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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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저서를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고 그가 가장 많은 고심을 거듭하며 써냈다고 하고 있고 그 자신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트랜스크리틱’을 읽으며 칸트와 맑스(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이 쉽지 않은 내용을 한번만 읽어서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하는 의견들이 쉽게 잊혀져서도 그리고 가볍게 다뤄져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인상적이고 기존의 칸트와 맑스에 대한 논의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들을 검토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지속적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시차’를 언급하며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던 것을 깨달음으로써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고 구성되는 것에 대해서 중요성을 말하고 있고, 이런 방식을 통해서 그는 칸트를 그리고 맑스를 검토하려고 한다.

 

그는 칸트를 검토하며 맑스를 개입시고 있고, 맑스를 검토하며 칸트를 개입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들을 각자에게 개입시키는 강도는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유기적이지도 않다. 적극적인 개입이기 보다는 유사성과 함께 그들이 얼마나 이후의 연구자들의 평가와는 다르게 ‘사이’에 놓여 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 같은데, 조금은 더 그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실천성’에 대해서 보다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어째서 보다 비중 있게 서로를 언급하고 개입시키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과 관심에 대해서 기존의 해석과 입장을 비판하며 그가 ‘물자체’를 통해서 ‘이성의 한계’를 얘기하기 보다는 반대로 가능성과 함께 이전의 철학자들과 그리고 그를 오해한 이후의 학자(가라타니 고진은 지속적으로 칸트와 맑스를 통해서 헤겔을 비판한다.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헤겔 이전의 칸트와 헤겔 이후의 맑스를 통해서 헤겔을 반박하고 있다)들에 비해서 그가 얼마나 지금 현재에 필요한 성찰과 전망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칸트에게 접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칸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는 모르고 있거나 부분적으로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들은 이해되기 보다는 막연하게만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칸트에 대해서 보다 알고 있었다면 그의 논의들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을 것 같지만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서 그의 논의들은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다.

그렇게 칸트를 논의한 다음에 가라타니 고진은 맑스를 논의하고 있고, 그는 기존의 맑스에 대한 연구자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그의 초기작들이 아닌 ‘자본론’을 중심으로 맑스에 대해서 접근하고 있다.

 

한동안 맑스에 대한 해석과 논의가 경직적이거나 문화적 혹은 철학적인 논의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서 가라타니 고진은 보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분에 많은 집중을 보이고 있는데, 가라타니 고진이 갖고 있는 맑스에 대한 의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보다 실천적 그리고 개개인의 주체적인 것에 중요성을 두고 있음으로 인해서 기존의 맑스주의자들의 접근과는 다르게 생산과정 보다는 유통과정과 생산과정에서의 계급투쟁이 아닌 소비행위에서의 비폭력적 투쟁과 변화에 대한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논의에 항상 ‘화폐’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맑스의 ‘프랑스혁명 3부작’과 ‘독일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한 학위 논문까지 언급하고 검토하며 맑스가 갖고 있는 다른 자본주의에 포섭된 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시각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의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입장과 시각이 갖고 있는 풍부한 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이후의 연구자들(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알튀세르, 그람시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연구자들)이 얼마나 맑스에 대해서 게으른 해석과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는지를 지적하며 그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맑스를 통해서 맑스의 연구가 갖고 있는 진면목과 함께 여전히 지금 현재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라보는데 탁월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최근의 맑스에 대한 그리고 그와 더불어 레닌에 대한 논의들에 대한 일종의 특징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실질적인 실천에 대해서 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 같은데, 가라타니 고진도 변화를 위한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는 기존의 다양한 운동(여성, 동성애와 같은 개별적이고 비주류 운동들과 소비자운동과 같은 체제 내 운동까지)들이 어떻게 ‘어소시에이션(연대, 연합, 연맹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해야 하는지와 이를 통해서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요소에 대항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입장은 보다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고, 그의 논의는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논의와는 별개로 그의 입장과 해석이 갖고 있는 열린 가능성은 충분히 흥미롭고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통해서 칸트와 맑스에 좀 더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의 연구자들이 보다 폭넓고 다양하게 가라타니 고진을 언급하고 인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이미 슬라보예 지젝은 이에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맑스와 레닌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굉장히 많은 생각들을 그리고 맑스와 칸트에 접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만든 저작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도 자주 떠올려야 할 것 같고, 그들을 읽을 때 자주 챙겨봐야 할 것 같다.

 

 

참고 : 가라타니 고진의 인용들을 살펴보니 그동안의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내 연구자들은 반성 좀 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번역도 좀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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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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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87984593

 

 

 

영화 ‘더 리더’의 원작인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서 국내에 많이 알려진 베른하르트 슐링크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인 여섯 개의 단편을 모은 ‘다른 남자’는 관심을 만족시켜주면서도 조금은 아쉬움도 느껴지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독일 출신의 작가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은 기본적으로 (남성의) 외로움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저에 깔고 있고, 그 감정을 풀어내는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통해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표현하는 과정 속에 자주 과거의 기억과 망각 혹은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꿈이나 현실적인 선택 등의 방식을 통해서 감춰진 감정과 기억을 들춰내면서 다시금 그것을 덮어버리거나 좌절감에 쌓이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우울함과 피로감 그리고 고독일 것이다.

 

그런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성격에 딱 맞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는 아주 만족스러운 소재였고, 이야기였으며 거기에 그 이야기 속에 독일이 갖고 있는 유대인과 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함께 엮어내면서 보다 인상적인 작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남녀(소년과 여성)간의 사랑이라는 점에 설득력이 없다는 불만을 말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불만 보다는 만족스러움이 더 컸을 것이니 그의 글이 갖고 있는 매력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에 큰 이견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남자’의 경우도 표현하기 어려운 혹은 잘 표현하지 않는 소년에서부터 노년까지의 남성(만)의 외로움과 사랑 그리고 그리움과 후회 등의 다양한 감정을 짧은 이야기들 속에 표현해내고 있고, 그가 보여주었던 이야기와 표현력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하고 조금은 관심을 잃게 되기도 하고 있다.

 

일관된 이야기 구성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자신에 맞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남자’와 ‘주유소의 여인’이 인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었고,

‘청완두’는 같이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이야기 진행을 통해 신선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뒤늦은 후회라는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끼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좋기도 했지만, 그래서 밋밋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와 감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에 대한 기억 그리고 독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집어넣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이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와 같은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편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남성이 갖고 있는 성적인 환상 혹은 어두운 감정에 관해서만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그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감정들을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가도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만족감을 느끼게 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좋아할 것이고,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좋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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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
임석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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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조금씩 접하면서 임석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접하기는 뒤늦은 것 같다. 이름만 접했을 뿐 실제로 접하지는 않고 있었으니 항상 그렇듯이 게으름 때문인 것 같다.

 

건축과 미술이라는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드는 두 분야를 연결하여 서로를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는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는 근대 초기부터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의 유럽과 미국의 미술과 건축의 흐름을 통해서 시대적인 변화로 인해서 그리고 각 국가별 입장에 따라서 어떤 미술과 건축적 입장을 보였고 상호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어쨌거나 건축학자이기 때문인지 건축과 미술을 동등하게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건축적 흐름에 미술의 경향들을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거기에 역사적 / 정치적 / 사회적인 변화를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에 종합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장점이면서도 조금은 더 파고들지 못해서 아쉽다는 느낌도 들게 된다.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탁월하겠지만 더 파고들기 위해서는 각자의 노력을 필요로 할 것 같다.

 

건축과 미술의 흐름에 서로의 유사성과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 사회적인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건축과 미술 그리고 사회를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전공 서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다 다양한 관점을 갖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미국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련의 건축과 미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외의 국가 출신의(혹은 그 외의 국가에서 활동한) 건축가와 미술가들은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가령 스페인 출신의 가우디는 살짝 이름만 언급된다). 정치 / 사회적 흐름과 미술까지 연관시켜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략한 것 같은데... 조금은 아쉽다.

 

시리즈로 출판된 책인데, 아쉽게도 다른 시대와 관련된 책들은 구하지 못하고 있어서 읽기를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생각보다 다양한 자료와 분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술과 건축에 관한 입문서로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참고 : 임석재는 프로이트에 대해서 약간은 오해를 하고 있거나, 너무 편협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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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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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라고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보다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크라테스가 어떤 과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말들을 하였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기만 할 뿐이다.

 

플라톤이 써낸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함께 수록된 그 외의 글들은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만 있을 뿐인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생각과 말을 했던 사람인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고, 읽다보면 알고자 하는 의욕을 꺽기에도 충분한 방법일 것이다.

 

‘변명’과 ‘크리톤’ 그리고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어떤 주장을 펼쳤고, 어떤 오해를 받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했는지 그리고 재판에 대한 결과에 따라 죽음을 맞기 전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는지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논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고, 그 대화 속에 소크라테스와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모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 논리적이지 않고 모순이 있으며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반박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허구를 들춰냄으로써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아쉽게도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매우 논리적이고 상대방이 갖고 있는 논리의 모순과 허구를 들춰내는 것에는 성공적이지만 그 방식이 의도와는 다른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는 걸맞지 않은 고발을 당하고 판결을 받게 되는 것 같다.

 

그는 그렇게 허구를 들춰내고 모순을 지적함과 함께 반대로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매우 논리적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의견은 수긍하게 되면서도 어쩐지 논리를 갖고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도 하고, 그의 입장과 생각에 접근하기도 하지만 플라톤의 글은 다수의 그릇됨과 소수의 올바름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존중과 거부에 대해서, 질서와 안정 그리고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혀나가다가도 생각에 잠기게 만들게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진보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한 사람들의 글을 접한다면 보다 그에 대해서 보다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 이상으로 양면적인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얼마나 아테네를 사랑했는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변명’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하고,

‘크리톤’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다.

‘파이돈’은 논리성과 주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전달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향연’을 통해서 에로스라는 주제를 갖고 다양한 관심을 엿보여주고 있다.

 

조금은 어렵기도 하고, 논리를 따라가다가 논리 속에서 길을 잃게 되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생각과(그리고 플라톤의 생각과) 그 생각에 따른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깨닫고 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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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유로 세대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알레산드로 리마싸 지음, 김효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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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46304450

 

 

 

2007년에 발표되어 한국 사회에 큰 화제를 뿌렸고 영향을 끼쳤던,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데 큰 생각과 시각의 틀을 제공했던 ‘88만원 세대’라는 책과 신조어가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좀 더 이른 시기에 유럽에서도 이와 유사한 ‘천 유로 세대’라는 신조어가 얘기되기 시작했고, 둘은 차이점 보다는 유사점이 큰 용어였고 둘 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20 - 30대 비정규직 젊은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소모품처럼 다뤄지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소속될 수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슬픈 낙인이었다. 비참하고 서글프기만 한 의미를 갖고 있는 ‘88만원 세대’와 ‘천 유로 세대’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해결 방안은 도출되지 않고 있고, 누구나 의미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더 깊어지고 그렇게 깊어져만 가는 문제가 언제 터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은 그저 문제가 커지기만 할지도 모른다.

 

이런 세대를 위한 많은 말들과 의견, 더 지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하기만 할 뿐인 ‘담론’들이 들리기는 하지만 실제 그 세대들이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그들을 분석하고 파악하려는 이들에 의해서만 그들은 다뤄지고 논의되고만 있을 뿐이었었다.

 

이런 좌절의 세대에 대한 책들 중에서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와 알레산드로 리마싸의 ‘천 유로 세대’는 그렇기 때문에 보다 의미를 갖고 다뤄져야 하는 책일 것이고 자신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담일 것이다.

 

네명의 천 유로 세대 젊은이들의 내용으로 담겨져 있고, 그들의 애환과 고달픔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경쾌함을 잃지 않고 있는 내용을 담은 ‘천 유로 세대’는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매달을 근근히 살아가고 있고, 그렇게 겨우 삶을 꾸려나가는 와중에도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획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 사이에서 항상 계산하고 선택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네명의 젊은이 중 중심인물인 클라우디오를 통해서 이들의 일상과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삶을 통해서 그들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고난을 엿보게 하고 있고, 그들의 생활과 삶을 통해서 지금을 살아가는 젊음과 좌절만 갖고 있는 좌절의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그들보다 더 좋지 않은 형편에 놓인 노숙자 노인을 통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고, 지금의 현실에 안주할 수 밖에 없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좀 더 진취적이고 주눅이 들어 좌절만이 남은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한 시대의 중심 세대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세대를 분석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청춘소설과 같은 글쓰기를 통해서 보다 그들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다가가게 되는 것 같다.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얘기했듯이 좌절할 권리는 없는 자신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지기를 꿈꾸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저 좌절하기만 했을 뿐인 내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더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한 자신들의 삶을 그들은 조금은 즐기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삶을 살아감으로써 내가 놓쳤던 그리고 잃었던 것들을 잠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재미난 대중소설이면서,

지금 세대를 잠시 생각해보기도 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었다.

자신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어떤 대중소설이 있는지 혹은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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