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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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러시아 혁명‘으로 얘기되는 러시아에서 벌어진 1917년 10월 사회주의 / 공산주의 혁명은 단순히 (기존 정권에서 새로운 정권으로) 정권이 교체되거나 지도자가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체제가 변하게 되는 것이었고, 전혀 다른 방식의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상-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꽤나 중요한 의미의 사건이(었)지만 알다시피 이후에 벌어진 체제를 둘러싼 경쟁과 그 경쟁에서의 실패 또는 패배로 인해서 러시아 혁명은 어렵사리 이뤄진 혁명의 성공이 쉽게 잊게 되었고 실패한 혁명으로 결론이 내려지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결론이 내려진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다시금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조롱의 대상으로만 비춰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린 혁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자 하는 나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찾게 된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1917년 10월 혁명이 이뤄지고 있던 당시의 러시아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현장 보고서이며 혁명이 벌어지는 그곳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저작일 것이다. 존 리드는 혁명의 중심에서 열정과 흥분을 최대한 자제하며 글을 써내려가고 있고, 그의 글을 통해서 쉽게 자제되지 않는 혁명의 열기를 느껴가며 혁명의 시작과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의 다양한 보고서와 자료들 그리고 연설문과 온갖 선언들을 통해서 그때 그 순간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고,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정세와 함께 혁명이 진행하는 과정 그리고 혁명이 이후에 벌어지게 된 혁명 세력과 혁명에 반대하는 혹은 애매한 입장을 갖고 있는 세력 사이의 투쟁을 간략하고 속도감 있게 다루고 있으면서 간간히 그때 당시의 도시의 분위기와 일반인들의 반응까지 검토하며 현장에서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고 있는 것이 없기에 존 리드의 글에 아주 빠져들게 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고 있는 혁명에 대한 옹호와 그 과정 속에서의 열정은 충분히 전달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결국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은 몰락하게 되고 레닌과 트로츠키로 대표되는 볼셰비키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으로 내용은 마무리 되는데, 존 리드는 이처럼 혁명의 성공을 자축하고 보다 나은 세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용을 마무리 하고 있지만 앞으로 혁명이 어떻게 변질이 되어가는지 그리고 어떤 참혹한 과정이 벌어지는지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존 리드가 전하는 환희와 감격에 조금은 거리감을 갖게 되기도 했다.

 

이제는 일부 소수들만이 논의하고 있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이제야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현실감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지금이야 말로 러시아 혁명을 얘기하고 재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바보 같더라도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어갈 것 같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만 있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저 실패한 혁명으로서 다뤄지고 있고, 잊고 침묵하도록 암묵적인 강요를 받고 있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조금은 재검토가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존 리드와 같은 무한한 긍정과 낙관으로서 검토할 것도 아니고, 옹호와 환희에 도취된 검토가 아닌 그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좀 더 나은 대안을 혹은 결과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금 실패가 이어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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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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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대한 온갖 찬사와 명성에 대해서 더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한두번 읽어보았기 때문에 다시금 읽어야 할 필요성도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한번 더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무척이나 후회할) 생각이 들어서 읽어보게 되었고, 역시나 명성과 찬사와는 다르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부분이 별로 없는 독서였을 뿐이었다.

가끔 이런 책들이 손에 잡히기 마련이다.

누구나가 칭송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전혀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만족스럽거나 재미를 느꼈던 적이 한번도 없었고, 또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신통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리아스’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분석은 이미 많이 거론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반복해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시의 트로이에 대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갈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때에는 여성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혹은 왜 그렇게 상세하게(혹은 지루하게) 집안 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인지를,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앞으로의 문학이 만들어낼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원형이 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전투에 개입하고 있는 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많이 논의가 되었고, 아마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별도로 책을 한권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없이 논의되고 읽혀지고 있는 ‘일리아스’는 실제로 읽게 된다면 갈등과 전투의 반복 속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그리고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모습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들을 찾아내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하는 것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어째서 갈등을 겪게 되는지,

헬레네는 어째서 트로이로 향하게 되었는지,

결국 트로이는 함락되었는지,

오디세우스는 나중에 어떤 죽을 고생을 하는지,

항상 얘기되는 ‘목마’는 정작 ‘일리아스’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인지 등등등

‘일리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그리고 그리스 문학의 정수이면서도 드넓게 펼쳐진 그리스 신화와 문학의 한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리아스’의 진면목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꽤 깊이와 넓이가 있는 지식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 신화와 문학과 희극 및 비극들을 읽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좀 더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리아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야 할 것이고 깨달아가야 할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온갖 시건방과 함께 우정에 대한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임과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 향하는 과정으로서의) 분노와 헥토르의 (자살을 하듯이 선택하는) 용기에 대한 작품인 ‘일리아스’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이처럼 그저 읽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며 투덜거리게 될 뿐인 것 같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무지함을 그리고 부족함을 회피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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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름 2011-05-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도 세간의 베스트셀러 1Q84를 읽고나서 든 느낌이 상기되네요. 소문은 소문일 뿐 만족스럽진 않고...

배군 2011-05-28 22:51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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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요인들이 한데 섞이지 않았더라면 코뮌은 그러한 형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코뮌의 원재료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느린 리듬에 맞추어 이미 한데 모여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파리의 전경을 불가항력적인 방식으로 바꾸어놓은 경제와 사회 조직, 정치, 문화 영역에서 변형의 복합적인 양식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공간과 지리학에 맑스적 관점을 도입해서 색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데이비드 하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가 그다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만 갖고 있었을 뿐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루이 나폴레옹 시기에서부터 파리 코뮌 시기까지의 파리의 공간적 변화와 함께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 자본주의 근대화와 도시화 그리고 그 도시 안에서의 계급구조 및 기타 다양한 변화와 갈등을 매우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해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데이비드 하비의 시각은 맑스와 노동계급 혹은 빈곤층과 피지배계급에 애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분석은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검토한 뒤의 의견이기 때문에 편향된 의견이기 보다는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고 의미 있는 의견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는 ‘철저한 단절’로 요약되는 ‘근대성’이라는 신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내며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 과정과 함께 아직까지 근대 자본주의에 적합한 공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던 파리가 (오스망이 총괄하여 지휘하는)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는지를 논의하면서 파리에 대한 그리고 근대화에 따른 도시의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루이 나폴레옹과 오스망의 도시정비가 이후에 파리 코뮌이 발생되는데 일정부분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공간의 변형이 단순한 공간의 변형만이 아닌 사회관계와 정신구조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 / 오스망이 지배했던 시기가 보다 더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가 시작되고 ‘근대적 공간이 생성(물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확연한 구분도 이뤄진)’되는 시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데이비드 하비는 루이 나폴레옹 시기의 오스망의 주도하에 이뤄진 파리의 도시계획/ 도시정비야 말로 이전 사회와 일종의 커다란 / 진정한 변화가 모색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변화를 위해서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리고 그 이해관계에 반발하는 다양한 계급들과 그들의 입장에 따른 갈등과 반발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그 갈등 양상에 따라 그리고 거부감으로 인해서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가 되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파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생각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고, 변화되기 전과 변화되는 과정에서의 파리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계급 / 사회적) 관계와 도시와 농촌이라는 구분으로 인한 갈등,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과 자본의 운영 방식에 따른 이해관계의 차이에 대해서까지 매우 다양한 관점들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관점과 그 차이들로 인해서 파리의 변화에 대한 여러 입장의 차이 그리고 그로 인한 정부(정확하게 말한다면 루이 나폴레옹과 오스망)에 대한 뚜렷한 견해 차이, 노동자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활 속에서의 여성들의 위치까지 상세하고 정교하게 격렬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던 당시의 파리를 그리고 근대 도시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교한 분석을 통해서 각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순환과 함께 공간적 그리고 정신적인 구분이 확연해지는 계급들 사이의 대립을 논의하며 그들이 기존의 공간, 공동체 / 계급에서 새로운 공간과 공동체 / 계급으로 변화됨과 함께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발생되고 그 문제점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도시화에서 얼마나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마지막 종결부분에서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사크르퀘르 사원)라는 하나의 건축물이 어떻게 그 이면에 계급적 / 정치적 갈등을 그리고 수많은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숨기고 있는지를 (냉소적으로 조롱하듯이) 논의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인 도시가 어떤 갈등을 그리고 대립을 숨기고 있고 그것들을 확연하게 밝혀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 맑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에 대한 상세한 덧붙임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 발터 벤야민의 시각을 많이 엿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상세한 자료들 그리고 데비이드 하비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들은 파리라는 도시의 이면에 있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계급투쟁을 확연하게 드러내놓고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파리에서만 이뤄진 갈등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도시 어느 곳에서나 그 이면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루이 나폴레옹과 오스망의 파리는 그 갈등과 투쟁이 보다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검토 대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비드 하비의 논의는 파리에 대한 그리고 근대화와 자본주의 도시화에 대한 상세한 논의일 것이고, 그의 논의는 한국의 도시화와 근대화에 대한 논의로 당연히 이어져야 할 논의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그런 과정을 겪었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겪었던 것일까?

도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대답을 찾아내고 발견해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 우리 자신이 구성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해야만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 발터 벤야민의 저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어느 정도 데이비드 하비가 벤야민의 입장을 받아들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플로베르와 발자크의 작품들을 읽어보려고 다짐만 했던 것이 매우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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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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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들어서 많은 문학 및 대중소설들이 되도록 ‘가벼워’ 지려고 하고 있고 보다 ‘개인적인 취향’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의도적인(혹은 별다른 의도 없는) 가벼움과 개인주의에 대해서 입장에 따라 호감을 갖기도 하고 불만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최근의 경향은 진지함에 대한 거부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처럼 단순하게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기도 하겠지만 분명 이전에 비해서는 무언가가 달려졌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다지 한국 작가들의 소설들을 자주 접하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특정 작가들을 열거하고 대표적인 작품들을 꼽을 수는 없겠지만 박민규 또한 그와 같은 최근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처럼 다뤄지는 것 같은데, 우연하게 읽게 된 (박민규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널리 알린)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만을 본다면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언가 조금은 들뜨고 호들갑스러운 초반 분위기로 인해서 가벼움과 야구에 대한 개인적인 애착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작품처럼 느껴지게 되지만 중반과 후반부로 가면서 가벼움 속에서 묵직함을 던지고 있고, 예민한 통찰력을 안겨주고 있는 평범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비범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인공 ‘나’라는 인물을 통해서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얘기할 것 많은 시기를 숨차듯이 질주하고 관통하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저 잊혀졌고 패배로 얼룩졌던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한 개인적인 애착과 함께 그 추억에 대한 수다를 풀어놓는 작품처럼 오해하게 만들며 읽는 사람을 끌어들이다가도 ‘프로야구’라는 스포츠와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만년 꼴지 팀을 통해서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점들 그리고 그 문제들을 공고히 하고 있고 더욱 확대재생산하게 만들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신구조에 대해서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농담 따먹기를 하듯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소속’과 ‘계급’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고, ‘경쟁’과 ‘승자독식’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러한 괴로움만 더해가는 사회구조와 일반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그로부터 이탈하기를 권하면서 안정적이면서 환상으로 가득한 끝맺음을 보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좀 더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실천적이고 행동을 요구하는 사람들로서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어떠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갖고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 것으로 (절충하듯이 혹은 성급하게) 정리하고 있는 끝맺음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는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난하듯이 진행하면서도 예리함을 갑작스럽게 내놓기도 하고 있고, 담담하게 내뱉다가도 갑작스럽게 감정을 토해내고 있는 박민규의 글쓰기가 꽤 인상적인 것 같다는 말 정도만 꺼내면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다른 작품들이 이와 같은 성향인지 아니면 조금은 다른 방식의 내용들인지 모르겠지만 지나칠 정도로 유쾌하고 재미난 작품이었고, 충분히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가벼움과 평범함 그리고 느긋함과 무심함을 능청스럽게 옹호하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서 그저 애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부분적으로는 불만스럽고 불필요하다는 장면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조차도 만족감을 줄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봄날의 나른한 단잠과도 같은 달콤한 작품이었다. 물론, 그 달콤함은 꿈을 깨게 되는 순간 곧장 잊게 되고 쓰디씀만 남겨질 것 같지만...

참고 : 이상한 말이겠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이고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내용임에도 이상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마치 다른 국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고 해외 작가가 쓴 소설인데 지명과 명칭, 이름만을 바꿔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딱히 국제적인 성향의 작품이라는 뜻도 아닌데... 이상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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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3부작 - 개정판, 소나무총서 1
칼 마르크스 지음 / 소나무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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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쓴 수많은 글들 중 그의 ‘정세 분석’과 ‘정치 평론’과 관련해서 가장 탁월한 분석력을 확인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프랑스 혁명 후반기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이후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으며, 혁명에 대한 순수한 혹은 순진한 믿음이 많이 반영되고 있는 저작이다.

많은 이들이 얘기하듯이 각각의 상황이 종료되고 충분히 검토가 된 이후에 남기게 된 글이 아니라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도중 혹은 직후의 당시에 대한 분석과 평가이기 때문에 조금은 어수선한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분석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충분히 그 뛰어남을 인정하게 만드는 분석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이론적 입장에서 분석을 하고 있는지와 함께 그 이론적 입장이 현실과 밀접함을 보여주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권력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획득한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떤 정치적 선택들을 하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사회주의 / 공산주의를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희망이 실현된 순간으로서 기억되는 파리 코뮌에 대한 ‘프랑스 내전’까지 프랑스 혁명의 후반기에 대한 맑스의 상세한 분석은 단순히 당시에 있었던 사실들의 그리고 사건들의 나열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이 갖고 있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분석되고 있고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맑스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내용이 될 것 같다. 물론, 어렵기도 무척이나 어렵고 난해하기 때문에 조금은 골머리를 앓기도 할 것이다.

맑스는 매우 상세하게 당시의 상황들과 정치적 변화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수많은 정파와 계급 그리고 입장에 따라 여러 집단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임을 보였는지를 그리고 그런 정치적 선택과 움직임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켰는지, 반대로 그릇된 판단으로 이익에 반하게 되었는지를 냉철하고 정교가 분석하면서 조롱과 야유를 덧붙이고 있다.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이라는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경제적 / 정치적 / 사회적인 다양한 입장에 따라 계급을 그리고 집단을 구분하며 어떻게 그와 같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계급투쟁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그 정교하고 면밀한 분석으로 인해서 오히려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가 더 어려운 느낌을 갖게 된다.

맑스는 대중들의 요구를 반영하면서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루이 보나파르트로 대표되는 정치권력의 문제점과 한계 그리고 앞으로 예측되는 파국을 전망하며 전체적인 흐름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프랑스 혁명의 최후의 비극인 파리 코뮌을 통해서 코뮌이 갖는 사회적 / 정치적 / 계급적인 중요성과 함께 앞으로 진정한 혁명을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로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자본론’을 집필하던 후기의 맑스가 아닌 흔히들 말하는 ‘청년 시절’의 맑스의 열정적이고 온갖 조롱과 야유 그리고 냉소가 곁들여진 일급 정치 평론이기 때문에 나름 읽는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워낙 당시의 혼란을 상세하고 역동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후반기에 대해서 적절한 기본 지식이 없다면 무엇을 분석하고 있고 논의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만 하고 읽기 어렵게만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영웅들의 시기인 프랑스 혁명의 전반기가 아닌 몰락으로 향하는 과정에서의 혼탁함 그리고 자멸의 과정처럼 느껴지는 후반기에 대한 글들이기 때문에 비교적 관심이 덜하게 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그 중요성으로 따지면 오히려 더 중요한 시기에 관한 분석인 것 같기도 하다.

‘정치 평론가’로서의 맑스가 갖고 있는 탁월한 분석력과 함께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계급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단순히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이라는 두 가지의 계급과 그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만을 논의했다고 오해될 수 있는 맑스의 폭넓고 정교한 분석력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맑스가 보이고 있는 분석을 최근에 많이 논의되는 아비투스와 헤게모니와 같은 관점과 연결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참고 : 1. 출판이 된지가 오래되었고, 이미 절판된 책이라 좀 더 바람직한 번역으로 개정 및 보강하여 새롭게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번역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2. 읽으면 알겠지만 맑스는 분석을 하는 도중 온갖 조롱과 야유를 던지고 있는데, 그런 조롱과 야유가 매우 지적이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지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이 워낙 교양이 높았던 것일까? 아니면 필요 이상으로 아는 것이 많아서 놀리는 것도 수준 있게 놀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놀림의 대상이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도 모르는 놀림이 의미가 있는 놀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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