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이븐 블랙 ㅣ 블랙 캣(Black Cat) 14
앤 클리브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영림카디널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을 읽고 나서 실망하는 경우는 세 가지다. 하나, 범인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둘, 이야기의 구성이 허술하거나 너무 비약시키는 등 짜임새와 개연성이 부족한 경우. 셋, 이야기의 구심점이 사건 또는 범인에게 맞춰지지 않고 주변 이야기를 너절하게 늘어놓아 긴장감과 속도감이 떨어지는 경우.
내가 읽은 [레이븐 블랙]은 세 번째 경우에 해당된다. 400여 페이지의 분량이니 일반적인 소설보다 조금 더 두꺼운 책. 그 두께를 팽팽한 긴장감과 짜릿한 속도감으로 채우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이만한 두께에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였을까?
영국의 외딴 섬, 스산한 겨울, 발견되는 사체. 배경과 분위기와 시작이 영국의 추리소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의 그것과 같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옛 추리소설의 기억을 떠올리며 순조로운 출발. 조금은 지저분하고 어수룩한 외모의 형사가 등장하고-그렇지만 분명 이 형사가 사건을 해결할 것이고, 각자 뭔가 비밀스러우면서도 석연치 않은, 그래서 혹시 범인일지도 모를 구석이 보이는 주변인들, 여기까지가 딱 좋았다. 너무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평한다 해도 나 개인적인 취향은 바로 이거다. 특정 장소는 아니지만 고립된 것과 마찬가지인 장소에서, 너도 나도 다 아는 관계인 등장인물들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아무개는 아마도 진짜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직감을 가진 형사의 고군분투로 진짜 범인을 밝혀내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레이븐 블랙]은 이야기의 틀을 잘 잡아놓고 시작했으면서도 급작스럽게 맥빠지기 시작한다. 주변인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나머지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 서정성이 강한 소설책을 읽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지루하다. 그 지루함은 몇몇 개성있는 캐릭터를 가진 인물을 빼면 의미없는 인물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인데, 각자가 범인이거나 최소한 이 사건과 관련되었을지로 모른다는 속임수를 놓고자 의도했던 바이겠지만, 인물들의 하릴없는 일상은 속임수도 아니요, 암시도 아니다.
또 결정적인 인물 두 명-형사와 범인의 행보 역시 밋밋하다. 단서없는 미궁의 사건 속에서 대부분은 놓치고 있는 작은 단초를 시작으로 논리와 직감을 동원한 범인 쫓기의 활약상을 형사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범인이란! 범인의 살해 동기를 수긍할 수 있을 만큼의 심리묘사나 상황묘사가, 양적으로는 많았을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 마디로 시시하다.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는 갈까마귀, 레이븐 블랙이 처음 발견된 사체를 쪼는 것으로 그럴 듯하게 시작된 [레이븐 블랙]은 결국엔 아무 것도 불길할 것 없는, 그저 어느 외딴 섬에서 일어난 단순 우발적인 살인사건의 서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