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만일 내게 진짜 권총 한 자루가 생긴다면?'이라는 설정만으로도 [능라도에서 생긴 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병역의 의무를 갖지 않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실제로 내 손에 진짜 권총을 잡아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겠지만, 큰 오락실이나 유원지같은 곳에서 총쏘기 게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덥석 집어들 수밖에.
능라도에서 만난 인연들이 모처에서 회동을 갖는다. 그 자리에 불쑥 나타난 권총.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 무기를 코끼리로 명명하고, 누구든 이 코끼리와의 자의적인 동행을 할 수 있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코끼리를 데려가야 할 이유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하기야, 마음 속에 응어리 하나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까진 아니어도 오금이 저릿저릿하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었던 상상은 눈 앞에서 구체화된 도구를 빌미로 마음 한 켠에서 숨죽이고 있던 감정과 욕구를 들쑤시기에 이르니, 과연 사람의 마음은 도구에 의해 점령당하는 연약한 존재였던가, 씁쓸하기도 하다. 결국 코끼리는 각자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있던 원망과 절망과 슬픔을 폭발시키는 도구였고, 또 해소시키는 도구였다.
그런데 나는 [능라도에서 생긴 일]에서, 권총에 혹하여 시작한 독서이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의 문제에 더 깊이 매료되었다. 코끼리로 인해 드러난 원망과 절망과 슬픔의 근원은 소통의 단절이었고, 실상 능라도 역시 허공에서 떠도는 의미없는 소통의 공간이 아니었던가. 개인으로 구성되는 집합체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안에서, 대중 속에서, 사회 속에서 겉도는 개인이 생성되는 모순. 능라도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들이, 또 내가 능라도에서 얻고자 했던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능라도도, 능라도에서 생긴 일도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하 작가는 이 책에서 얼핏 민족과 사상을 언급했고, 판타지적 결말로 무엇인가 말하고자 했던 듯 한데, 그것에 대해서는 나로선 제대로 감잡을 수 없으니 유구무언. 하지만 [능라도에서 생긴 일]에서 권총과 소통을 읽는 것만도 내겐 충분히 의미있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