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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아사다 지로 지음, 정태원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덮고 나니 난데없이 옛날 영화 <Back To The Future>가 생각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엄마 아빠를 만나고, 지금의 아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 좌충우돌하는 코미디 영화. 누구인들 현재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거나, 나아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바꾸고 싶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까. [지하철]은 그런 이야기다. 아, 물론 코미디는 아니다.
속옷을 담은 트렁크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고객을 만나러 다니는 주인공 신지. 사는 형편이나 하는 일이나 별 볼 것 없는 이 남자는 전세계에 지점을 갖고 있는 일본의 거대 회사 회장님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회장님의 아들이 지금 왜 이러고 사느냐. 안하무인이고, 교양없고, 괴팍하며, 바람둥이에, 온갖 술수를 부려 사세를 확장해온 아버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져 형을 자살하게 만든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 보란 듯이 집을 나와 절대로 아버지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힘으로 가정을 꾸리긴 했는데, 여전히 그의 삶은 별로다.
그런 그에게 지하철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여행을 제공했다는 것은 참으로 그럴 듯한 일이다. 지하철은 현재 그를 지탱하는 삶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고, 여럿이 동시에 승차하고 있지만 관계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현재 향하여 달리고 있는 목적지를 볼 수 없는 어둡고 음침한 공간임과 동시에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향하여 달리고 있는 현상을 자기 의지대로 제어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지하철은 주인공이 처해있는 상황과 심경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매개체이다.
지하철을 타고 어느 순간 꿈꾸듯 과거를 여행하고 오는 주인공 신지.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내연녀인, 과거를 알 수 없는 묘령의 여인 미치코가 그와 동행하게 된다. 신지와 미치코는 각자, 때로는 함께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 밖에 있을 수 없게 만든 과거를 여행하는데, 그 과거를 직접 목격하면서 그들은 혼란과 충격의 회오리로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신지가 만난 어린 아버지와, 아버지의 연인과, 자살하기 직전의 형. 또 미치코가 만난 젊은 어머니. 신지와 미치코는 과거에 섞여 과거의 그들과 인연을 맺고 그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아마 현재를 바꿀 수도 있는 영향을 기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소설이든 영화든, 혹은 실제 상황이든 시간여행을 한다해도 과거와 현재는 그대로다.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의 작은 변화라 할 지라도 그것이 현재를 변화시킨다면 이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 아수라장일 것이므로. 변한 게 있다면 오직 현재의 자신이 더 많이 알게 되고, 제대로 이해하고, 그제서야 과거와 현재를 오롯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 다만 미치코의 경우처럼 차라리 과거에서부터 완전히 없었던 존재 혹은 없었던 상황으로 현재를 조금 조정하는 사소한 예외만이 있을 뿐이다.
일본작가의 소설이 득세하고 있는 와중에 내가 최근에 새로이 만난 몇몇 일본 작가와 작품 중 [지하철]은 가장 진중하다. 시간여행이라는 흥미로운 제재를 선택했으면서도 가족과 나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이유를 조심스럽게 지하철에 실었다. 1900년대 일본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주인공들의 시간여행에 더욱 적극적인 동행이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