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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노라 에프런 지음, 박산호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내 또래라면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 때 '해리샐리'는 당시 대한민국 청춘남녀들 사이에서 당연한 데이트코스였고, 주연 여배우 맥라이언은 뭇남성들의 이상형으로 자리매김했고, 여성들 사이에선 이후 맥라이언의 헤어스타일이 유행했고, 우리나라 모 화장품 CF에까지 출연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해리샐리는 흥행대박인 영화였는데, 영화 역사에 있어서 해리샐리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개척한 작품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서두가 길었다. 그 해리샐리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여성이고 그 이전부터 이력이 화려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는 것을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영화 해리샐리의 작품성을 따지기 이전에 일단 유쾌하고 발랄하고 달콤하고 행복했던 영화라는 기억 덕분에 구미가 당길 수 밖에 없다. 이 책 역시 그렇겠지, 라는 예감.
목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얼굴과 몸을 연결하는 부위, 목 말이다. 나이들었다는 흔적이 제일 쉽게 드러나는 부위가 목이라서 거울보기가 싫다고 한다. 이 책을 더 읽다보면 대충 저자의 나이를 짐작할 힌트가 나오곤 하는데 어림해서 60대 중후반이니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내가 정말 저자를 이해한 대목은 이 챕터의 마지막 문단이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고 슬기로워지고 성숙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가?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 바로 내 목이었다.' (20페이지)
이것이 이 책의, 아니 저자의 스타일이다. 유쾌하고 발랄하지 않은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여주인공이 할 법한 대사와 행동과 생각이 책 전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물론 그런 여주인공 치고는 좀 나이가 많지만.
15개의 챕터에 담긴 저자의 문장은 나이에 맞지 않게-아무리 저자의 나이를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자기가 목 이야기부터 시작했으니 생각 안할 수가 없다- 통통 튄다. 목 이야기도 그렇지만 핸드백 취향이나 미모 가꾸기, 또 요리와 육아책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는 여자들끼리만 묻어두고 사는 비밀같은 치부를 한 점 부끄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유쾌한 코미디로 승화시키고, 케네디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과의 묘한 관계(?)를 드러냄으로서 로맨틱한 분위기도 맛보인다. 오죽하면 내가 영어독해력이 좋아 영어로 된 글 맛을 제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원서를 읽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나이듦'에 따른 저자의 상념이라고 해야 맞겠다. 이러이러한 것이 멋진 노년이고, 그러기 위해서 어떤 것들에 의미를 두고 어떤 것들은 무시하라는 투와는 정반대로 솔직하게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저자만이 가졌을 정통 로맨틱 코미디 戰法으로.
'사용설명서에는 목욕할 때마다 한 컵씩 넣으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한 컵을 넣어봤자 티도 나지 않는다. 오래 전에 터득한 사실이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목욕 오일을 아끼다 죽는다면 참 한심하게 느껴질 거라는 점이다. 그래서 목욕 오일을 듬뿍 넣는다.. (중략).. 난 이제 목욕 오일을 사러 나가봐야 겠다. 이만 안녕.' (119 페이지-책의 끝)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나는 해리샐리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지만 여러번 보지는 않았다. 아마 영화관에서 한 번, TV에서 해줄 때 한 번쯤 더 보았을 것이다.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도 충분히 재미있게 본 책인 것은 분명한데, 두고두고 몇 번씩 일부러 꺼내어 볼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 내가 60대에 접어들어 저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면 그 때는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그렇듯 깊은 여운으로 몸이 떨릴만큼은 아니라는 뜻.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머리아픈 세상사를 떠나 가볍고 상쾌한 무언가를 찾을 때라면 이 책만큼 잘 어울릴 책도 없을 것이니, 해리샐리 영화처럼 흥행대박은 아니더라도 꾸준한 열혈팬을 가질만 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