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문 뒤의 야콥
페터 헤르틀링 지음, 김의숙 그림,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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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굉장히 초초했다. 소설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마무리 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야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이제 몇 페이지도 안 남았는데 작가는 과연 어떻게 수습하려고 계속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거지? " 하는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극적으로 풀려버린다. "아하! 그래, 이거면 되겠군." 하며 막막했던 가슴이 시원스레 뚫려버렸다.

  야콥, 그 이름도 그렇지만 <파란 문 뒤의 야콥>이라는 제목도 조금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마치 이슬람 문화권의 이야기인 것도 같고 동화나 우화 같은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을 접한 지는 좀 된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줄 책 선물을 고르려다가 저렴한 가격과 좋은 평들에 끌려 두세 권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마나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고르면서 접했던 대중매체의 분위기에 이미 질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직접 펼쳐드니 그간의 느낌과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청소년용이라는 단순한 범주에 넣기에는 상당히 심오한(?)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주변의 변화에 민감해진 야콥이 상상속의 대상과 이야기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는 이야기지만 단순히 한 아동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했다기보다는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이 추가된, 일종의 사례집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정신분열증이나 다중인격과 같이 영화에서나 봐왔던 내용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심심풀이 소설로서 읽기에는 그 속에 깃든 심리묘사와 행동패턴이 예사롭지 않아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기승전결이 분명한 보편적인 소설과 비교하면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독백과 내레이션으로만 구성되는 일인극을 관람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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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 세계역사문화기행
정목일 지음 / 문학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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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을 쓰면서 단련된 내공의 힘인지 정목일 님의 글에는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애잔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진다. 그래서 여행기에서 소홀해지기 쉬운 지나친 감상이나 과장에 빠지지 않고 역사와 유물, 과거와 현재, 중국과 한국이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적절하게 버무려 놓았다. 특히 역사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어 실크로드의 여러 도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치 차분한 가운데 진행되는 현지 설명회나 문화 강좌를 듣는 것처럼 진솔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반복되거나 중첩되는 문맥이 자주 보이기도 했다. 기행문이 갖고 있는 수필적인 요소, 즉 여행 중에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기행문의 특성상 여행 중의 메모와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글로 남기다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 같다. 퇴고 과정에서 더 꼼꼼히 신경 썼으면 더 좋은 글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선명하지 못한 사진도 조금 아쉬웠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크로드 모습을 담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낮은 화소 때문인지 편집상의 문제인지 크게 확대된 일부 사진의 화질이 선명하지 못했다. 정목일 님의 유려한 글과 대비되기에 더욱 아쉽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서안(장안)에서 시작해 돈황에서 투루판, 우루무치까지 이어진 실크로드(천산북로)의 여정 중에서 우루무치 부분은 상당히 빈약해 보였다. 실크로드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천산천지(천산에 위치한 호수)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저자의 일정이 그러했는지 기록 과정에서의 집중력 부족인지는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이유야 어떻든 좀더 ‘느린’ 결말, 여행의 마무리가 아쉬웠다.

얼마 뒤 7월 중순부터 보름정도의 일정으로 실크로드를 여행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님의 말처럼 더 알찬 여행을 위해 실크로드와 도시에 관련된 몇 권의 책을 같이 읽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읽은 책 중에서는 단연 최고라 말하고 싶다. 가이드북과 여행기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행하는 것이 좋은 여행인지도 몸소 보여주니 말이다. 실크로드를 여행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정독해봐야겠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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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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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여름, 나는 부산시민회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엄마는 방금 시작된 LA올림픽 개막식을 같이 보자고 했지만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는 몇 시간씩 계속되는 개막식보다는 김청기 감독의 여름방학 특선만화영화가 더 구미에 맞았다. 아무튼 무더운 도심의 거리에는 버스와 택시, 그리고 막 붐을 타기 시작한 자가용들이 넘쳐나고 있었고 냉방이 안 되는 버스 안에서는 멀리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이 중계되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의 기억은 뿌연 차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희미해져버렸지만 그렇다고 1984년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단지 개개인의 기억 속이나 도서관의 책장, 영화의 장면 속에서 숨어들어 훗날을 회고할 뿐이다. 다양한 매체로 부활해 현실을 기록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은 부정되거나 현재를 위한 도구로 재구성 되었다.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의 기록을 조작하고 조작된 기록은 곧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은 주민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텔레스크린'을 통해 개인의 감정까지도 수시로 감시했다. 특히 '이중사고'를 통해 개인의 생각까지도 통제하고 있었다.
  "'이중사고'는 '영사'(영국사회주의)의 핵심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도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p298)
 
  작가가 소설을 발표한 시기가 1949이었으니 대략 삼사십년 정도의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 때도 놀라운 해안인 것 같다. 오웰이 살았던 당시(1930, 40년대)가 산업화의 결과로 물질적은 풍요는 이뤄냈지만 빈부격차나 대량실업, 사회주의의 등장 등 대단히 혼란스럽고 격변하는 시기였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극한 대립상황 속에서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는 지성인의 방황이었을까.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대해 걱정스러운 시선이 안타깝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는 허울만 좋은 '주의'나 '이즘'의 맹점을 정확히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는 물질만능주의와 부의 양극화를 초래했고 사회주의 역시 만인의 평등을 내세워 특정 집단의 이익만 챙겼다. 이념이야 어떻든 지배 계급은 결국 다수의 민중(노동자)을 지배하면서 세력 확장에만 열을 올렸다.
  작가는 시간이 흐르고 사상이 바뀌어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궁핍한 현실을 생각하면서 <동물농장>과 <1984>를 쓰지 않았을까. 눈앞에 펼쳐진 갑갑한 현실은 벗어나고 싶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외부적인 요건보다는 인간의 내부적인 노력에 의해서 유토피아를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몇 세대가 지난 책이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조지 오웰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책의 주인공 윈스턴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사소한 기호부터 정치적 신념은 물론 이성에 대한 사랑까지도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로부터 강요된 순종은 자신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바뀌어버린 자신마저도 인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개인'은 사라지고 사회와 하나가 되었다.
  거창한 사상이나 이념 논쟁은 수면 아래로 사그라졌지만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구속하고 조정하려는 '사회'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가족의 생존과 개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위는 끝이 없지만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기업은 태평스럽기만 하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도 이네 잊어버리고 만다. 어쩌면 우리의 대부분은 이미 여유와 편리, 돈과 명예라는 미끼를 통해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렸는지 모르겠다.
  1949년에서 1984년, 2011년에 이르는 반세기의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 속에 숨어있는 '전체주의'의 어두운 일면은 여전한 것 같다.


( freeism.net ) 문성만, 미래, SF, 고전, 책, 독서, 독후감,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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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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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순정>(<도망자 이치도>)에서 이미 봐왔듯 시공을 초월한 독특한 분위기와 끊임없이 터지는 유머로 많은 이의 신뢰를 받는 작가, 성석제.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될 만큼 ‘재미’라는 요소를 똘똘 뭉친 작가다. 그는 반복적인 비유와 허를 찌르는 역설로 독자를 빨아들였고 독자는 그의 글을 통해 고루한 일상을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마디로 성석제표 롤러코스터라고나 할까.

 <왕을 찾아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빠른 사전전개와 거침없이 쏟아지는 유머, 거기다 오감을 자극하는 폭력성까지 더해져 최고의 재미를 제공한다.
 ‘지역’의 왕으로 군림했던 마사오(박정부)의 부음을 듣고 달려간 나(장원두). 그곳에서 마사오의 지난 행적과 그의 죽음 뒤에 벌어지는 세력다툼을 보게 된다. 결국 나의 옛 친구인 제천(박제천)이가 잔머리와 세치 혀로 왕좌를 차지한다. 그는 조직의 이인자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뒤 옛 세력을 규합해 지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한 지역을 풍미한 일종의 폭력사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는 특정 지명 대신 ‘지역’이라는 대명사를 그대로 끌어 썼다. 모호한 듯 보이는 이 설정을 통해 허구 속의 공간이 독자 개개인의 지역으로 되살아났다. 누구의 도시도, 누구의 공간도 아니기에 오히려 만인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내가 딛고선 이곳이 소설 속 무대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폭력이 갖고 있는 한계는 여실해 보였다. 폭력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인간사의 변화무상함을 그리고는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무협활극에 비해 깊이가 다소 부족해 보인다. 달콤하게 입안을 휘감는 인스턴트식품의 가벼움이랄까. 내 몸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재미라는 성석제 님의 전매특허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계속되는 단맛에 입안이 얼얼해버릴 정도였으니 신맛, 쓴맛과 같은 깊은 맛을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여전히 최고의 재미를 보여주는 작가, 성석제. 다음번 작품에서는 좀 더 변화된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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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징 노르가이 - 히말라야가 처음 허락한 사람
에드 더글러스 지음, 신현승 외 옮김 / 시공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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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나 평전이라 하면 보통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운 위인이나 혹은 그에 상응하는, 기념비적인 리더의 삶을 그리는데 적어도 내 생각에는 <텐징 노르가이>는 그런 주류에서는 조금 벗어난 책인 것 같다. 하지만 중심에 조금 비껴선 듯한, 이런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에 더 흥미가 동했는지 모르겠다.

 텐징은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8848m)를 최초로 오른 세르파였다. 세르파라고 하면 원래 히말라야에 사는 고산족의 이름이었지만 그들의 탁월한 고지 적응력 때문에 고산등반을 하려는 서구 등반가들의 가이드나 짐꾼으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가이드나 짐꾼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무튼 텐징이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등반대를 이끈 대장도, 영국에서 온 정식 일원도 아니었기에 서구인의 관점에서 회고되는 역사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인도나 네팔, 티벳에서는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받는 세르파였고 소수 민족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와 명예도 얻었다.
 그러나 텐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세상 속에 휩쓸리면서 갈 곳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된다. 세상의 환호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오는 혼란은 그이 인생 후반기를 어둡게 했다. 어쩌면 이런 순탄하지 않은 일생질곡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텐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세르파족의 히말라야 등반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방대한 이야기들은 텐징에 대한 관심을 흐려놓았다. 물론 그를 잘 알기위해 세세한 '역사'를 알아야겠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개인적인 측면에 비해 공적인 서술범위가 상대적으로 넓은 것 같았다. 요즘 책에 대한 집중도가 흐트러진 내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지만 텐징의 외적인 행적 외에는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내가 원했던 것은 30년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등정기록사가 아니라 1953년 초등 기록과 이를 있게 한 텐징의 내면적은 성장, 혹은 변화를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히말라야를 휩쓸던 눈바람의 기억이 나를 어지럽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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