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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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플갱어 :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과 똑같은 대상(환영)을 보는 현상.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분신·생령·분신복제' 등 여러 용어로 쓰인다. (네이버 백과사전)

  친구에서게 건내받은 비디오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발견한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인 그는 같은 영화사에서 제작된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체크해가며 다니엘 산타클라라는 이름을 찾아낸다. 그리고 애인의 이름으로 영화사에 편지를 보내 그의 본명이 안토니오 클라로인 것을 확인한다.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안토니오 클라로에게 전화를 걸어 쌍둥이와 같은 자신들의 외모를 이야기하며 만날것을 제안한다. 안토니오 클라로는 의미없는 일이라 여기며 거절하지만 몇일 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수천년을 날아온 해성이 만나는듯한 긴강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조금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승부욕으로 새로운 존재를 찾아나선다. 그렇게 둘은 만났다.
  하지만 둘의 삶은 이미 전과 같지 않았다. 분신의 등장으로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더 행복해진 반면 안토니오 클라로는 삶은 뒤틀어져 버린 것. 이에 안토니오 클라로는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에게 복수를 감행하는데... 

  소설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물을 찾아나서는 중심 사건에 비해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의 사적인 생각과 일상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또한 화자는 주인공(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이 겪게되는 이야기 속에 적극 개입한다.
  사실 이런 전개가 익숙하지 않아 소설을 읽기 어려웠다. 특히 문단 구분없이 길게 써내려간 글이 소설을 더욱 답답하게 했다. 마치 우울증을 앓고 있는 테르툴리아노 막시오 아폰소의 삶처럼 말이다.
  작가(주제 사라마구)는 빠른 탬포로 써내려갈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사건을 왜 이렇게 지루하리만치 섬세하게 끌고갔을까. 어쩌면 이런 막막한 구성을 통해 현대인의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왜곡되는 이상과 불안한 직장, 책임으로 묶여버린 가정, 그 어디에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은 현대인의 마음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급기야 자신의 존재사실은 물론 의미조차도 망각하게 되었다.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그랫듯,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인간의 존재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 것 같다. 그의 눈에는 우리들이 세상을 구별하고 인식하는 외형의 허상, 겉모습에 흔들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게 느껴졌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두고 싶은 자존심마져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놀라움과 부끄러움으로 <도플갱어>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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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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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도 달린다. 퇴근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시간을 이용해 어둠이 깔린 강변에 선다. 찌뿌등한 몸을 좌우로 흔들며 하루 동안에 쌓인 긴장을 풀어준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하고는 양팔을 가볍게 털고 서서히 몸을 움직인다. 쌀쌀한 밤공기가 셔츠 사이로 파고든다.
  점점 호흡이 빨라지더니 적당히 데워진 몸이 점차 안정되면 뻣뻣하던 몸도 데워진 땀과 함께 부드러워진다. 규칙적인 들숨과 날숨 사이를 건너뛰며 도시의 야경을 가른다. 나를 달린다.
  일주일 서너 번씩 반복되는 달리기지만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내일 있을 회의를 생각하거나 아이들의 학원비를 걱정하기도 한다. 혹은 MP3의 음악에 심취하거나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리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는 말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달리기와 존재하기>는 달리기를 통한 명상법이자 그 결과물로 형이상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함축적이면서 정신적이다. 그래서 달리기에 대한 테크닉이나 기술보다는 러너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명상서적에 가깝다.  하지만 달리기만을 국한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여러 생각과 느낌들을 달리기라는 테마를 통해 묶어놓았다는 편이 옳겠다.
  그래서 조금 산만하고 난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때도 있다. 그저 멍하게 텍스트만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마치 오랜 달리기에 길들여진 다리처럼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내가 아직 달리기의 진정한 맛을 깨닫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지 쉬언의 글은 여전히 모호했다. 
 
  또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운동을, 운동선수를 애찬하며 운동만이 세상의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정기적으로 달리고 운동을 하는(적어도 하려고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뿌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조금 지나친 감도 없질 않다. 보약도 몸에 좋다고 장복하면 오히려 독이 되듯이 운동의 장점만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 자칫 운동이 갖는 소소한 재미를 오히려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부담스러운 칭찬이나 거창한 이론보다는 달릴 때의 징~한 느낌을 담담히 그려낸  하루키의 글이 오히려 진솔해 보였다.   
 
  달리고 싶다. 다시 한 번 42.195km에 도전하고 싶다. 2011년에 경주에서 열린 동아마라톤에 나갔다가 30km 이후로 거의 자포자기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열망을 더없이 간절하다. 물론 5시간 이내에 완주하려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겠지만, 최소한 지금만큼은,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만큼은 여느 서브3(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완주) 주자 못지않은 마음이다. 

  이 느낌을 올 가을까지 유지하며 춘천(춘천마라톤)을 달려야겠다. 나의 한계, 그 위태로운 경계선을 뛰어넘고 싶다. 화이팅, 프리즘(fre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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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개정판
파커 J. 파머 지음, 홍윤주 옮김 / 한문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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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어느 블로거가 남긴 평을 보고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이내 지워버리는 여느 책과는 달리 몇 년을 묵혀두고 말았다. 아마도 제목 속에 포함된 '삶(life)'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 무겁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책 표지에 소개된 파커 J. 파머의 프로필(미국의 유명한 교육지도자, 사회운동가)을 보니 예전에 그의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교육관련 서적으로 교사의 마음가짐을 적어놓은 책이었지 싶다. 아무튼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반가움과 함께 책을 제대로 골랐다는 안도감, 혹은 자부심이 든 것도 사실.

  하지만 이번 책은 교육에 대해, 혹은 사회에 대해 실질적인 방향을 제시한다기보다는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명상서라고 하겠다.

 

  우선 저자는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말하며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고 재생산된 이상에서 벗어나 자신 내부로부터 들리는 목소리를 직시하라고 한다. 이른바 '소명'에 충실 하라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어두웠던 지난날과 이를 통해 채득하게 된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단점은 감추게 마련인데 그는 오히려 자기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드러냄으로써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런 작지만 대단한 용기가 그를 미국 교육계의 대부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현실 앞에 당당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가 인상 깊다.

  책이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극적인 사건이나 엄청난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닌, 작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느낌을 적다보니 조금 밋밋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심심함이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이 된 것 같다. 저자 자신의 깨달음을 자랑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자기 모습을 관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말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뭔가 특별한 사건에 의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소소한 일상이 모여 의식의 작은 부분들을 변화시키지 않던가. 느린 강물에 떠밀린 모래가 거대한 삼각주를 만들듯 우리의 삶도 부지불식간에 완성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200페이지 안쪽의 얇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겨진 내용은 자못 진지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려들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라고 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외부적인 운으로만 돌리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해하는 지침으로 삼으라고 했다. 결국 소명을 이해하고 발견해가는 과정을 통해 진실한 삶을 꾸려나가라는 것이 파커 J. 파머가 말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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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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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근처 하천을 달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움츠렸던 몸이 하천변에 핀 벚꽃처럼 화사하게 깨어났다. 겨울 동안 쉬었던 뻣뻣한 몸도 시원한 봄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꽃잎이 되었다.
  오래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이 있었다. 미국의 대표하는 소설이라 할만큼 문학적 가치와 대중적인 인기를 동기에 받고 있는 고전으로 그리 두꺼운 책도, 어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읽어내기가 어려웠던 책이다.
  새봄을 맞아 묵은 옷을 정리하듯 오래전에 묵혀두고 정리하지 못했던, 읽어낼 수 없었던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펼쳐든다.

  하지만 역시 종잡을 수 없었다. 뭐랄까, 이야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이야기에 빠질만하면 전체상황과 동떨어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장에 난감해졌다. 원작의 느낌도 이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번역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전체의 흐름보다는 문장의 구조에만 집착한 단편적인 번역이 미국을 대표한다는 고전을 난해하게 만들었지 싶다. 더욱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1910년대 후반의 미국,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더 책읽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인터넷을 뒤져 개츠비의 줄거리를 찾아본다. 그러자 막혀있던 내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난 왜 몰랐을까. 등장인물이 헛갈려서인가? 아니면 조금은 난해한(사실이 그렇다) 번역에 신경을 쓴 나머지 줄거리의 흐름을 놓쳐버린 것인가?" 아무튼 이제야 본 괘도에 올라온 느낌이다. 흑흑, 1/3 가량 읽은 책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첨부터 봐야겠다. 나야말로 소소한 번역문에 집착하지 말고 이야기와 그 속내에 집중하며 읽어야겠다.

  내(닉 케러웨이)가 이사 간 집 옆에는 개츠비라는 젊은 거부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파티를 열지만 정작 그는 술을 마시지도 않을 뿐더러 파티에 한발 비껴선 모습이다. 그의 이런 모습이 세간의 흥미를 자극했지만 사실은 5년 전에 헤어졌던 여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화려한 파티를 통해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톰 뷰캐넌이라는 사람의 아내였기에 데이지와 친척관계인 내가 중간에서 만남을 주선하게 된다.
  개츠비와 만난 데이지는 돌아온 옛사랑, 그것도 거부가 되어 돌아온 개츠비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남편(톰 뷰캐넌)이 이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발생한 사고를 통해 개츠비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개츠비는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는 자신을 떠나간 그녀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 굳게 확신했다. 개츠비는 그렇게 그녀를 찾은 듯 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면에 감추어진 질투는 개츠비의 금빛 차양을 거침없이 파괴해버렸다.
  인간의 사랑, 하지만 돈과 권력에 의지한 사랑은 늘 질투와 좌절을 불러왔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문명은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신기루였기에 이를 붙잡기 위해선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권력이 필요했다. 결국 커져버린 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개구리처럼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순수했던 사랑도 죽어버렸다.
  개츠비는 한창 산업화와 주식시장의 급증으로 호황을 누리던 20세기 초의 미국사회에 닮아 있었다. 무일푼의 젊은이에서 순식간에 대부호로 성장했고 연일 파티를 열며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사랑마저도 살수 있다고 믿었던 세상이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산산 조각나 버렸듯이 개츠비의 꿈도 이네 사그라져버렸다. 


  아침 출근길에 바닥에 쌓인 하얀 꽃잎들을 본다. 봄 햇살을 받으며 화사하게 빛나던 벚꽃은 휘몰아친 광풍에 쓸려가 마른 가지만 남아버렸다. 영원할 것 같은 화려함은 한순간의 꿈이었나 싶게 사라져버렸다.
  <위대한 개츠비>는 인간의 욕망과 물질문명의 허상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노래했기에 아직도 읽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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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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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로 소설을 시작된다. 생일잔치를 위해 시골서 올라온 아버지는 함께 올라온 어머니를 서울역에서 놓쳐버린다. 그렇게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아들과 딸, 아버지는 서울 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닌다. 큰아들이 서울로 올라와 처음 자리 잡은 동네에서부터 그들이 살았던 곳을 거쳐 가며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어머니를 봤다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질 못한다. 
 
  소설은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시선을 통해 그녀의 잊혀졌던 과거를 하나씩 끄집어낸다. 자식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몸 편할 날이 없었던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가슴 속에 묻어둔 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 명의 여자였던 것. 너무나 평범했던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네들의 삶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되짚고있다.
  어머니, 그 이름 속에는 세상의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따뜻함과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반겨줄 포근함이 묻어있었다. 어떤 투정도 다 받아줄 것 같고 어떤 부탁도 거절 없이 들어줄 것 같은 마법의 상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우리는 이 보금자리를 처음부터 늘 그곳에 있어왔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것처럼 여기며 무시하고 외면해버렸다. 
  이렇듯 자식과 남편을 위해 반평생을 살아온 대가치고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였지만 우리들의 어머니는, 당신과 나의 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빌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한 번의 투정이나 불평도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지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대학 보내 달라, 결혼시켜 달라, 집 사 달라, 얘 봐 달라, 학원비 보테 달라며 늘 손만 벌리는 내 모습에 비해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 어제의 안부를 묻는 말에도 건성으로 말해버렸고, 피곤해하는 어머니를 보더라도 선뜻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이제는 바꿔야겠다. 나의 안위를 부탁하기에 앞서 그녀의 건강을, 즐거움을, 행복을 부탁해야겠다. 나에게, 그리고 어머니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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