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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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p7)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p248)이었던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거짓말처럼 죽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파란만장한 아버지의 삶에 비해 초라하다 못해, 코미디같이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추모이자 회상이며, 기억이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p110)


  아리의 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철도노동자로 일하다 인민의 나라를 위해 지리산을 누볐던 해방전사였지만,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고향 구례에 터전을 잡았다. 화려한 이력과는 달리 노동(농사)에는 별다른 소질이 없었지만, 친척과 이웃, 하다못해 생면부지의 외지인의 어려운 일을 그냥 흘려듣지 않고 자기 일처럼 도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장례식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고, 이들을 통해 빨치산 뒤에 가려졌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게 된다.

  거대한 역사 속에 묻혀버린 한 개인의 이야기가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서러움과 아쉬움이 가득한 우리의 역사가 그러하듯, 거친 너울에 가려 보이지 않던 수면 아래의 다채로움이 소소하게 전해진다. 혁명전사, 혹은 빨치산이라는 잔혹한 이름 뒤에 숨겨진 아버지로서의, 아니 이웃이자, 친구, 남자로서의 삶...

  아버지의 장례식은 찬란했던 청준으로 시작해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한평생을 살아야했던 아버지의 무게를 벗어던지는 해방구였다.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p169)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p231)



  나의 아버지는 교육자였다. “집념은 기적을 낳는다”라는 믿음과 조국 근대화의 사명으로 학교를 세운 교육자였지만,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뼛속까지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십대 때 세운 고등공민학교를 오늘날의 특성화고등학교까지 발전시켰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국회의원의 꿈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출마했지만 매번 낙방을 거듭했다. 그는 노년이 되어 정치에 도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4년마다 치러지는 선거철이 되면 여러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돌며 정치자 문을 해주거나, 옛 기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과 글을 좋아해 늘 지인과의 술자리를 즐겼고, 거기에는 언제나 학교와 정치에 얽힌 무용담과 함께 시를 읊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니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난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심폐소생술을 받던 마지막 모습이 혈기 왕성하게 교정을 누비던 40대 후반의 아버지 모습과 오버랩된다. 부패 정권 타도를 외치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단상을 내리치던 모습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 힘없이 침상에 누워있던 모습과 대비된다.

  아리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역사와 함께, 혹은 그에 맞서, 싸우고 화해하며 살아왔다. 어떤 물리적인 업적이나 정치적 수식어를 동원하더라도 표현할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리와 나를 통해 여전히 세상에 녹아있다. 이것이 아버지의 남긴 최고의 해방일지가 아닐까.










아버지와 나(1975년 6월, 아버지가 세운 동래공업전수학교(지금은 금정전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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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수 2023-05-3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임승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제가 쓴 인문에세이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출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진심을 담아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지만 딱히 홍보할 방법이 없다 보니 답답한 마음에 저자가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책 여러 권을 가방에 넣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 승객분들에게 직접 육성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요). 갑작스러운 댓글에 불편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여러 일로 바쁘시겠지만 1분 정도만 시간을 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문득 제 신간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21세기 실사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속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오면서 생긴 독특한 인간관계와 에피소드가 있듯이, 두 딸의 아빠이자 반백살의 남성인 저도 30년째 사회주의자로 살아오면서 그런 삶을 견지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 때 사회주의자가 된 이후 인생이라는 여행의 경로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다 보니 갈림길에서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글치였던 공대생 출신이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선거 날 투표할 때면 지지율이 1%도 안 되는 후보에게 거침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뜬금없이 와인에 홀딱 빠져서는 대한민국 검사뿐만 아니라 노동 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인생 경로는 명승지 투어 같이 잘 차려진 패키지 여행과는 결이 달라서, 오지 탐험에서나 맞닥뜨릴 돌발 장면들이 순간순간 펼쳐졌습니다.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는 제가 사회주의자라는 여행 경로를 선택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 경로를 선택했을 때만 접할 수 있는 풍경, 경험할 수 있는 사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이 여행이 제법 맘에 들어서 설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이야기에 공감하리라 기대한다면 과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오지 탐험 여행서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리라 작은 기대를 해봅니다.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건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썼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읽으셨다면 제 책도 ‘실사판’으로서 무척 흥미롭게 읽으시리라 확신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권의 여행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아래에는 출판사의 책소개 일부를 발췌해서 옮깁니다. 귀중한 시간 할애해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인터넷서점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9181643

”우리는 과연 사회주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사회주의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의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어있다. 일례로 전 세계가 주목한 코로나19 감염병 대처 방식도 지극히 사회주의식이었다. 국가가 앞장서서 공공 재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감염병에 대처했으며 코로나 진단 검사와 치료를 누구나 무상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보건 의료 정책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공단, 국공립학교, 국공립어린이집, 무상 급식, 공공 임대 주택, 부자 증세 등등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복지 및 재분배 정책은 모두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 복지를 확대하길 원하면서도 왜 사회주의에는 유독 반감을 가질까?

저자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본격적으로 해소한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가 대세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30년 차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또한 자본주의의 은폐된 착취 시스템이 작동하는 원리를 해설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태생과 최후를 통찰한다.

사회주의로의 강요는 없다. 다만 질문이 시작될 뿐이다. 최악의 빈부 격차, 극심한 이윤 지상주의, 유례없는 환경 파괴,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가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켜나갈 것인지. 증오와 배척, 불평등와 불공정 너머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삶의 지표에 진중한 화두를 던진다“
 
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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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인간인데요. 휴머노이드 아니에요." (p37)
  이렇게 끌려온 철이는 다른 로봇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힌다. 여기서 인간인 선이와 휴머노이드 로봇인 민이를 만나면서 자신도 어쩌면 휴머노이드 로봇일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이렇게 수용소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민병대가 쳐들어온 혼란한 틈을 타 셋은 수용소를 탈출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이는 죽고, 재생 휴머노이드인 달마를 만난다.

  <작별인사>는 김영하 님의 기존 소설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일단 배경부터가 로봇과 미래사회다 보니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휴머노이드, 과학, 로봇, 복제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면서, 사회시간인 줄 알고 기다리던 교실에 갑자기 컴퓨터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랄까(아니 신선함이라고 해야 옳을 듯). 김영하 님의 색다른 시도와 관점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점점 흥미로웠다.

  책장이 넘어가자 로봇과 인간의 대결처럼 보이던 소설에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겉모습만 보면 인간의 정체성을 간직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방황기 정도로 보이지만, 텍스트 곳곳에 남겨진 내용은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 심오해진다. 

  우리 인간은 점점 복잡해지고 시스템화 되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와 이를 증명한다고 믿는(아니 착각인가?) 자의식이나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가. 뇌?
  그럼 이 신경 덩어리가 인간의 근원이란 말인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기술은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유전자 조작이나 장기이식, 의체기술은 생명의 경계마저 사라지게 했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글을 쓰는 인공지능부터, 뇌에 전기적 자극을 통해 시각을 재생하고, 최면이나 무의식을 이용해 기억도 조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젠 뇌의 기능과 복합적인 사고력만으로 인간임을 증명하기도 어려워졌다. 

  
  나는 인간이 길거리의 가로수나 개울가의 올챙이,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나 안방의 옷장, 자동으로 온도를 맞춰주는 김치냉장고나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과 무엇이 다른지 자문해본다. 생물학적인 외형이나 '나'라는 생각이나 의식만으로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지 두려워진다. 이런 인식마저도 사회적 관습이나 보편적 규율에 따라 학습된 것은 아닐까.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진짜 나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최근 챗봇(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채팅로봇)이 많이 화자 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정보를 학습해 새롭게 가공해 제공하는 서비스로 마치 유명한 교수나 석학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논리정연하다. 심지어 몇 달이 걸릴 보고서나 어려운 숙제도 척척 풀어내고 있어 일부에서는 사회문제로까지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로봇은 인간의 능력과 일을 대신해줄 것이다.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이들이 만들어낸 생산물을 즐기고 소비하는, 수동적인 것들 뿐이리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만 반응하는 고물덩어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작별인사>는 수동적인 삶에 대한 김영하 식의 작별 인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것을 주문하는, 인류에 대한 마지막 인사...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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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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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키우기 원치 않는 아이인 경우 국가에서 운영하는 메디컬 센터에서 아이를 낳고 그와 동시에 NC 센터에 맡겼다."(p26)

  "아이를 입양하려는 사람들과 NC의 아이들을 아무도 모르게 가족으로 묶어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NC 센터 핵심 역할이자 목표였다. 물론 아무나 부모가 될 수는 없었다. 예비 양부모(pre foster parents), 간단히 프리 포스터라고 불리는 이들은 깐깐한 서류 심사와 건강 검진, 심리 검사를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이라는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NC의 아이들은 부모 면접을 영어 발음이 비슷한 '페인트'라는 은어로 불렀다.(p33)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고 고를 수 있다면? 이라는 다소 황당한 질문에서 시작한 소설은, NC 센터에 머무르며 부모 면접을 기다리는 제누와 아키, 노아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페인팅 자체에 흥미가 없어 보이는 제누와, 어떻게 해서든 페인팅을 성공해 사회로 나가려는 아키, 페인팅 한 부모와의 불화로 다시 NC로 돌아온 노아.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부모를 만나길 원하지만, 몇 번의 만남으로 평생을 함께하게 될 부모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자식이 부모에게 원하는 것이 있듯이, 부모들 역시 자신만의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아이들을 입양하고 한다. 이 인위적인 상황 속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역할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한다.

  당신은 부모나 자식을 자신의 보호하고 대변해줄 대리인으로서 대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본인이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꿈을 대신 이뤄주는 클론(복제품)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주변의 평판이나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부모와 자식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본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목적으로 가족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는 테두리에 갇혀 서로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반성해본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나에게 덧칠된 페인팅은 없는지 얼굴을 만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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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윈터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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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가 밝았지만 난 여전히 스마트폰을 끼고 살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틈만 생기면 맹목적으로 폰을 켠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당신은 책 읽는 모습이 제일 보기 좋던데... 올해는 책 좀 읽지?" 란다. 뭐, 지도 밀크(우리집 반려견) 다음으로 폰만 보면서... ^^

아무튼, 이렇게 아내가 읽어보라며 권한 책이 김호연 님의 <불편한 편의점>이다. "엄마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우리집 1호 가훈처럼, 그녀의 명령에 책을 펼친다. 2023년의 첫 책!

서울역에서 술에 절어 노숙 생활을 하고 있던 독고는 염여사의 파우치를 찾아준 것을 계기로 그녀의 편의점에서 일하게 된다. 독고는 알콜성 치매로 인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말도 어눌하지만, 특유의 우직함과 부지런함으로 주변에서도 인정받게 되고, 정상적인 삶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아내의 말처럼 술술 읽힌다. 편의점에서 한 끼를 가볍게 해결하듯, 어렵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읽었다. 어수룩한 거지가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멋진 왕자로 환골탈태하지만, 사실은 왕자 자신이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동화 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부하거나 식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편의점이라는 일상적인 장소를 통해 우리 이웃의 현실적인 고민을 다루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고물가 시대에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삼각김밥이나 컵라면, 도시락은 물론, 만 원 한 장이면 네 캔의 맥주까지 살 수 있는, 휴지부터 치약, 칫솔, 면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용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심지어는 1+1처럼 하나를 덤으로 얻을 수 있는 행운까지 누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

책에는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편의점 선반에 잘 정리해 비치한 물건처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김호연 작가 본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 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면 명절을 맞아 차례상의 음식 가짓수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나의 이야기기도 했다. 너무 일상적이기에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불편한 편의점>이 되어 우릴 포근하고 편하게 보듬어주는 것 같다.

올해는 폰을 접고 책을 좀 읽어야겠다. 클릭 하나로 세상을 구경하는 편리한 스마트폰보다, 한 장씩 넘기며 작가의 생각을 음미하고, 나와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불편한’ 책을 가까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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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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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소설은 단순한 서사를 넘어 브랜드가 되었다. 함축적이고 인상적인 첫 문장, 오감으로 전해지는 묘사 방법, 화자와 대상을 교차하며 반어적으로 서술되는 생각들. 이 모든 것은 김훈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었고, 그의 책을 선택하고 읽는 확실한 이유가 되었다.

  <저만치 혼자서> 역시 김훈이라는 이름만으로 선택한 책.

 

<명태와 고래>

  "태백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단편 첫 문장, 9페이지)

간첩 혐의를 받고 13년 간을 복역하고 출소한 이춘개는 향일포로 향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차가운 물(한류)를 따라 이동하는 명태처럼, 개인의 삶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춘개의 삶은 한국전쟁이나 이념갈등 같은 거대한 시대적 상황, 마치 해류를 거슬러 살아가는 고래와 대비된다.

 

<저녁 내기 장기>

  "저녁 내기 판이 길어져서 이춘갑은 시장했다. 차車, 마馬가 모두 죽은 들판에서 초상楚象이 포包의 엄호를 받으며 좌변을 치고 들어왔고, 한병漢兵이 힙겹게 상 길을 끊어내고 있었다. 오개남이 졸卒을 옆으로 밀자 초포楚包가 한궁漢宮을 바로 겨누었다."(97페이지)

  해질녘 마을 공터에선 한漢과 초楚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춘갑과 오개남은 각자의 고된 삶을 해쳐나온 일상의 명장들은 아닐까... 우리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가 장기판 위에서 펼쳐진다.

 

<영자>

  "노량진 고시텔은 십층짜리 주상복합건물에 있었다."(단편 첫 문장, 149페이지)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구준생인 나는 같은 구준생인 영자와 동거를 시작한다. 공무원 시험의 엄청난 경쟁률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갑갑한 일상을 더욱 건조하게 만들었다.

  20년 정도전에 노량진에서 임용을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분주하게만 보이던 고시생들을 측은하면서도 신기한듯 바라보며, 노량진 고시촌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공무원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리시대의 서글픈 단면이다.

 

<저만치 혼자서>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는 한발 비켜선 수녀님이나 신부님이지만, 이들이 늘 바라본 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 저만치 혼자서 우리를 향해 기도하고 세상을 위해 봉사한다. 도라지수녀원은 수녀들의 노후를 위해 만들어진 호스피스 수녀원이다.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수녀님과 이를 돌보는 신부님의 이야기.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이야기를 찾아봤다. 그리고 그의 누나가 쓴 <누구에게나 삶은 가볍지 않다>는 중앙일보 칼럼도 읽었다. 나가 미안해지고, 겸손해지는 하루다...


  이들 작품 외에도 <손>, <대장 내시경 검사>, <48GOP>가 실려있다.

  무더운 여름이 물러가면서 책을 잡기 시작했다. 9시부터는 아예 온 가족의 스마트폰을 수거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로 약속까지 했다. 폰과 멀어져야 책이 보이고, 여유가 찾아온다. 책과 폰은 영원한 상극이 아닐까. 폰을 접고 책을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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