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 스물넷에 장애인이 된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한 노들야학의 뜨거운 희망 메시지
박경석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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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청소년적십자(RCY) 활동을 지도하면서 매월 나가는 곳이 있다. 반여동(부산)에 위치한 사랑샘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돕고 지원하는 단체이다. 그곳에서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장애인식개선거리캠페인을 진행하는데 여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을 안내하고 홍보하는 활동으로 인도의 턱을 없애고 건물 입구에 경사로를 만들자는 내용으로 거리의 행인과 점포의 주인들에게 설명도 하고 전단지도 나눠주며 활동한다.

  처음에는 장애인들과의 활동이 어색하거나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장애인들과 함께 먹고, 웃고, 땀 흘리고, 소리치다보니 이웃이나 친구들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활동이 불편하고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늘 밝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전동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길을 만나도, 장애인을 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거리낌 없이 웃음이 가득했다. 자신의 환경을 불행으로만 여기고 현실을 포기해버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대항하며, 살아가며, 싸워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싸움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 싸움의 중심에서 노들야학을 운영하고 있는 박경석 님이 쓴 책이 바로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이다. 해병대를 제대한 혈기왕성한 젊음의 시절에 행글라이딩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저자는 자신을 둘러싼 무감각 속에서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자살여행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읽기 시작한 성경을 통해 세상에 나갈 용기를 얻게 되었고, 노들야학에서 장애인을 가르치고, 생활하고 있다.

   노들야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조직을 운영하는 내용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장애인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받은 내용을 활용해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이 기억 남는다. 그래서 박경석 님은 거리로, 관공서, 법원으로 뛰쳐 나갔다. 

  집 밖으로 쉽게 나올 수 없는 장애인의 현실과 여러 위험에 노출된 이들의 안전이 안타까웠고 여러 가지 사고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렇게나 장애인에게 관심이 없었나 자책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비장애인인 내게는 아직 체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봉사관련 동아리와 단체에 속해 남들보다는 많은 관심과 이해를 하고 있다고 자부해왔지만 책을 읽다보니 나 역시도 겉으로만 장애인과 이들의 사회활동을 고민하는 척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럴싸한 구호나 명함에 적힌 가입단체만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속 좁은  행동인지, 사회가 아직 장애인에 대한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갖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노력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알수 있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장애인과 장애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매달 나가는 활동에서도 좀 더 밝고 열린 마음으로 장애인을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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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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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부산 송도해수욕장을 자주 갔었다. 같은 부산이라지만 우리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인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대중교통을 타고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당시 건설 붐을 타고 잘나가셨던 이모부님의 그라나다 자가용을 타고 자주 들렀던 기억이 난다.

  시내에서 한참을 들어가 언덕 하나를 넘으면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해안도로가 작은 해수욕장을 감싸고 있는 곳이었다. 그 길 곁으로 많은 횟집들이 성업 중이었고 그 앞 도로가에 아무렇게나 마련된 테이블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명개며 해삼을 먹었다.

  어떤 날에는 송도 앞바다에 위치한 거북섬으로 가기위해 나무로 엮어진 구름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발아래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가 투명했지만 흔들거리는 다리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그런 경치를 볼 여유는 없었다. 몸을 움직이며 다리를 더욱 출렁거리게 만드는 사촌 형들의 장난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런 다리를 지나서 도착한 거북섬은 안락한 낙원처럼 포근했었다. 그곳에서 바다를 보며 회를 먹고 산책을 하고...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송도에서는 조그만 횟배도 탔었다. 네다섯 명이 간신히 탈 수 있는 작은 배에 천막을 올리고 방석을 깔아 횟배로 개조한 놈인데 관광객들로 분비는 해변에서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회를 먹는 느낌이 일품이었다. 출렁이는 송도 앞다에 배를 띄워놓고 혈청소를 바라보며 먹는 아나고(붕장어)의 고소함이 아직도 선하다.

 

  바로 그 곳, 송도해수욕장(부산)이 주무대가 되었기에 더없이 반가웠다. 80년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물론 내 어린 시절이 <뜨거운 피>처럼 힘겹거나 폭력적인 삶은 아니었지만, 이것 또한 어떠하리! 시간에 윤색된 기억은 언제나 푸르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을. 

  이렇듯 정겹게 남아있는 송도해수욕장이었지만 <뜨거운 피>에서는 그리 평온하게 그려놓지 않았다. 구암이라는고 소개된 이곳은 돈과 여자, 각종 이권을 찾아 모여든 건달로 넘쳐났다. 말이 좋아 건달이지 실은 조직폭력배, 전과자, 마약중독자, 사채업자, 도박꾼, 밀수꾼, 포주 등 사회의 어두운 면에 기생하는 깡패들이라 보면 되겠다. 그래서인지 폭력이나 욕설은 애교 수준으로 등장하고 살인은 물론 시체처리를 위한 분쇄기도 심심찮게 등장할 정도로 살벌했다. 

  무식함과 잔인함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면이 오히려 나의 관심을 끌었다. 살인청부업을 그린 김언수 님의 전작, <설계자들>을 통해 그의 글 빨에 푹 빠져버린 것도 원인이었지만 폭력이 갖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멜로영화보다는 액션영화가 흥행에 더 유리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내 안에 숨겨진 강한남자 콤플렉스-남자는 울어도 안 되고 힘도 쌔야 한다는- 때문인가?  

 

  구암의 터줏대감이자 실세로 만리장 호텔을 운영하는 손영감과 그의 밑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각종 사업을 총괄하는 호텔 지배인 희수의 이야기로 80년대 우리 시대를 관통했던 조직폭력배의 생성과 번영, 암투와 잇권 다툼, 그리고 몰락과 부활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전개된다.

  손영감은 다른 조폭들처럼 세를 확장한다거나 밀수 등 큰 돈벌이에는 신경이 없고 구암을 관리하면서 받는 세금이나 중국산 고춧가루를 국내산과 섞어 파는 등 몸을 사리며 안전하게 조직을 운영한다. 그래서인지 외부세력과의 큰 마찰 없이 오랜 시간 구암을 지배했다.

  희수는 손영감의 오른팔로 구암의 질서를 잡거나 자잘한 싸움의 중재하는 등 바쁘게 살아가지만,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소모품 같은 자신의 삶에 불안을 느끼고 손영감 밑에서 나와 양동의 오락기 사업에 동참한다. 희수와 양동의 오락기 사업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급성장하지만 주류사업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양아들(아미)을 통해 자신과 구암을 둘러싼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평온하던 구암을 세력다툼의 중앙으로 내몰았고 푸른 바다는 핏빛으로 변해갔다.

 

  김언수 작가의 화려한 글 솜씨와 치밀한 전개로 지루할 틈 없이 읽었다. 기존의 조폭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봐온 의리와 배신이 뻔~하게 등장하지만 독특하고 미스터리한 손영감의 행보를 통해 이야기는 더욱 치밀해지고 인물은 더 따뜻해졌다. 손영감의 평범한 노파 모습 뒤에는 조직을 이끄는 보스의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과 자신과 구암을 위해 노력한 희수에 대한 애틋함이 녹아있었다. 

  그리고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낸 희수를 통해 우리의 삶과 급변했던 근현대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는 7~8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뤄냈지만 그 여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화려한 외적성장을 감당할 의식수준도 부족했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돈의 가치는 올라갔지만 가족의 응집력은 약해졌고 이탈도 심해졌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소외감은 커졌고 하나 둘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회는 국가발전이라는 명제 아래 전제주의적인 군사문화를 확대해 나갔고 개인의 희생은 당연시 되었다.  법과 양심 보다는 편법과 돈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가진 자는 더 많은 배팅으로 이득을 챙겼을 뿐 이윤은 고르게 분배되지 못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져갔다. 

  희수는 자신의 시대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돈과 조직, 의리와 배신 사이를 오가며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못해 안쓰럽게까지 보였다. 어쩌면 희수는 몸뚱아리 빼놓고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우리들의 옛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책 이면에 깔려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암울하게 살아왔던 세월이 더 갑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현실을 타파해줄 무언가를 찾게 되고, 그 돌파구로 액션을 가장한 '폭력'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 역시 폭력적이다. 정치는 어지럽고 교육은 근시안적이다. 산하는 더욱 오염되어 가고 예술마저 돈벌이의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어딜 가든 한 밑천 잡아보려는 깡패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끝나지 않은 폭력의 시대를 종식시킬 진정한 히어로는 없는 것일까. 희수가 간직했던 소박한 꿈을 이뤄줄 지도자는 없는 것인가. 크고 작은 폭력 속에 살아가는 '희수'는 여전히 고달프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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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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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소설보다는 고전 중심으로 책을 보려고 노력 중이다. 요즘 책들은 재밌기는 하지만 반짝하고 지나가버리는 유행처럼 허무한 감도 있어 조금은 오래 남을만한, 여기저기서 꼭 읽어봐야 한다는 고전을 많이 보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민음사나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의 책들도 유심히 살펴보는데 그 때 눈에 띈 책이 바로 안다아시의 <해부학자>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의학이나 인체에 대한 미스터리 소설처럼 보였으나 소개글을 보니 조금은 다른 분야였다. 뭐랄까... 은밀하면서도 기발하고, 신비로우면서도 야할 것 같은! 그래서 고전이라면 갖게 되는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식상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은밀한, 음모에 가려진 성기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고 자극적인 성감대인, 음핵(클리토리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인데, 성에 대해 개방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이런 은밀하고도 기발한, 신비로우면서도 야사시~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는 믿음이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기대에 못 미쳤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실존했던 해부학자인 마테오 콜롬보는 그의 저서(<해부학에 관해>)를 통해 클리토리스에 대해 적으면서 이를 '비너스의 사랑'이라 이름 붙였었다.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안다아시(저자)는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 이 책이 썼다고 한다.

  소설이지만 이런 역사적 펙트까지 더해졌기에 좀 더 치밀하고 사실적일 거라 기대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비교적 근래(1977년)에 쓰인 소설이었지만 등장인물이 단편적이고 동기나 목적이 모호했다.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사건 전개가 너무 빨랐다. 좀더 긴 호흡으로 여성의 마음을, 육체를, 성감대를 기술하고 묘사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성급하게 시작했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린 첫 섹스의 허무함처럼, 자극적은 부분 이외에는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파트라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향기 하나로 이만큼의 매혹적인 글을 섰는데, 하물며 이런 어마어마한 소재(?)로 이정도 밖에 안 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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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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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 뜨거웠던 것 같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막혔다. 외출이라도 하려면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의 심정만큼 비장한 결심을 해야 했다. 이런 답답함은 에어컨 밑에 있는 그 순간만 제외하면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이야기의 각 부분들이 잘 연결되지 않았고 꼬부랑 이름의 등장인물은 날 계속 헛갈리게 했다. 이는 카뮈의 책이 어렵고 난해할 거라는 내 선입견과 맞물려 더욱 읽는 속도를 더디게 했다. 그렇다고 페스트가 퍼진 오랑 시의 암울함마저 뒤덮는 것은 아니었다.

 

  페스트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균이 옮겨져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으로 흑사병이라고도 하며 전염성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다고 한다(물론 지금은 많이 기술이 발달해 많이 안전해졌지만). 그래서 옛날에는 이 병이 한번 돌면 도시는 물론 국가 기능까지 마비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이런 페스트가 오랑 시에서 발병해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도시의 모든 출입구가 통제되면서 사람들의 이동도 제한되었다. 개인의 사생활은 없어지고 사회활동마저 제한되었다. 의사인 리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환자를 치료하며 치료제 개발에 노력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 고립되어 갔고 페스트는 물론이고 단절된 현실과 고립된 자신과도 싸워야했다.

  <페스트>에서 급속하게 퍼지는 전염병은 가족이나 친구, 이웃과의 이별을 가져왔고, 죽음을 통해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페스트가 장기화되고 불안과 통제가 오래될수록 개인감정과 건강상의 문제 넘어 인간에 대한 존재가치까지 흔들어놓았다.

  개인의 삶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극도로 통제된 상황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역경이 닥쳤을 때 흔히 좀 더 노력해 현실을 극복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개인이나 단체가 포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버린 상황이라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외부의 환경과 끝까지 맞서 싸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새로운 질서 속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갈지도 모른다. 혹은 종교나 초월적인 존재에 기대어 현실을 외면하고자 도망치는 경우도 있겠다.

  지나간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무의미하듯 직접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 또한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불행을 위안 삼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무시해버릴 수도 있으리라. 이런 단절은 고통의 중심에 있는 사람에게는 외적인 고립보다 더 무서운 이 아닐까 싶다.


  페스트가 뒤흔든 오랑시의 모습은 온갖 거대한 난관에 가로막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나약한데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라 현실에 타협하거나 순응한다고 해서 함부로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거대한 벽 앞에 근시안적인 대처법으로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안쓰러웠다. <페스트>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전염병이었다.

 

  숨을 틀어막는 무더운 날씨에 갇혀버린 나는 페스트가 뒤덮은 답답한 도시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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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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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6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콩쿠르상과 더불어 세계3대 문학상이라는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방송에서는 대서특필했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그녀의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독서는 물론 문화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그녀의 인터뷰와 책 소개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한강의 범람'이라할 만큼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수상소식 이전부터 한강의 글은 제법 알려져 있었다. 서평 블로그나 인터넷 서점에 걸린 그녀의 책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방송 인터뷰도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난다. 가느다란 실눈을 뜨고 두 손바닥을 맞잡은 채 등장인물을 이야기하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내가 그녀를 인지하게 된 계기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전에 부산에서 한승원 작가의 <잠수 거미>를 가지고 독서토론회를 했었는데 그때 한승원 작가의 딸도 소설을 쓴다고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잊고 있다가 서점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한 씨 성의 여류작가를 보고는 그녀가 바로 한승원 작가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여류작가의 글은 잘 읽지 않는 편이었지만 한승원 작가를 통해 연결된 고리가 있었기에 조금은 더 애착을 가지고 바라본 것 같다. 특히 부녀가 함께 글을 쓴다는 것이 신기했고 둘 다 나름의 스타일로 나름의 인지도를 얻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남일 같지 않게 흥분되고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채식주의자>는 동명의 단편과 함께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 연작으로 엮어져 있다. <채식주의자>는 어떤 꿈을 꾼 후로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 영혜를 남편의 시선으로, <몽고반점>은 영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에 집착하는 형부의 시선으로, 마지막 <나무 불꽃>은 채식이라는 일련의 사건 이후 점점 현실의 끈을 놓아버리는 영혜를 그녀 언니의 시선에서 이야기한다.

  영혜의 채식은 어두운 숲에서 핏방울이 채 가시지 않은 날고기를 씹어 먹던 꿈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곧 가족과 사회의 폭력에 내버려진 과거와 연결되어 영혜를 더욱 더 깊은 채식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자신의 몽고반점을 통해 자연의 순수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형부의 예술행위마저 자의든 타의든 폭력으로 마무리되어 버림으로써 세상과는 더 높은 담장을 쌓아버린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거부한 채 나무가 되고자 한다. 일채의 인위적인 구속과 시선, 인정과 형식, 억압과 폭력, 세상과 삶을 태워버리려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은 치밀한 삶 곁으로 가는 솔바람이 스쳐간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아련하게 떠오르는 푸른 기억을 막을 순 없다. 아무런 이유나  미련 없이 옅은 바람결에도 하늘하늘 떠다닐 수 있는 민들레 홀씨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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